빛의 바다
코다마 유키 지음, 이정원 옮김 / 애니북스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그날따라 유독 짐이 많았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어깨엔 가방을 메고, 종로에 나가는 271번 버스를 탔다. 겨우 자리가 나 앉자마자 <빛의 바다>를 펼쳤다. 읽다가 눈물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새카만 30대 남자가, 양 손 가득 주렁주렁 짐을 매달고, 덩치에 비해 턱없이 작은 만화책, 그것도 표지는 반짝이는 종이를 쓴데다가 상반신을 벗은 인어아가씨가 물 위로 몸을 드러낸 만화책을 보며 훌쩍인다면 어찌 보이겠는가? 흉하다, 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30대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보따리 장사 나가는 오타쿠라 볼지도 모를 일. 의외로 저 쇼핑백 안에는 세일러문 코스프레 복장이 숨어있을지도 몰라, 따위의. 

눈물을 참고 책 날개를 들춰보니 작가 약력에 생년은 없고 월일, 출생지, 혈액형이 적혀있다. 9월 26일생. 나가사키 현. A형. A형 작가일 거라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그리다니, A형일거라 생각했다. 혈액형별 성격 분류 따위, 전세계에서 한국이나 일본에서만 통하는 거라지만,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지만, 누군가 내게 "혈액형이 뭐예요?"라 물었을 때 "A형요. 대문자 A형이에요."라 답하면 열이면 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들이 A형에게서 보길 기대하는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 

코다마 유키. <낫 심플>의 오노 나츠메, <허니와 클로버>의 우미노 치카와 더불어 일본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여성 작가라는데, 일본어는 전혀 모르고 오직 한국어 쓰기와 회화만 가능하니 일본 사정은 잘 모르겠고. 코다마 유키의 작품이 국내에서 소개된 것도 <백조 액추얼리>에 이어 <빛의 바다>가 겨우 두 권째이니 주목받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만, 작품을 보니 충분히 <낫 심플>, <허니와 클로버>와 함께 놓을만 하다. 잘 살펴보니 국내에서만 책을 겨우 두 권 낸게 아니라 일본 현지에서도 단행본은 두 권 뿐인가 보다. <빛의 바다> 말미를 보니 '이렇게 인생 첫 단행본을 낼 수 있게 돼서 정말로, 정말로 기뻐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라 써있다. 아이고, 이런 내공을 지닌 작가가 이런 겸손함이라니. 이런 풋풋함과 겸손함을 지닌 작가가 후에는 바쏘가 아닌 오노 나츠메처럼 얼음공주가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2000년에 데뷔했는데 2007년에 첫 책을 내다니 사람 자체가 겸손한건가 싶기도 하다. 

오노 나츠메의 작품엔 이국적인 판타지가 매력인데, 한편으론 너무 쿨하고 멋진 이들만 가득해 나같은 얼굴 크고 다리짧은 동양인은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다. 배경이 현실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흐르지만 등장 인물들이 너무 판타지 같다고나 할까? 반대로 코다마 유키의 작품은 시작부터 판타지다. <백조 액추얼리>는 은혜를 갚기 위해 어여쁜 여인으로 변한 백조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이고, <빛의 바다>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사랑받는 인어들이 등장하니 시작부터 동화와 같은 설정을 갖춘 채 이야기가 흐른다. 은혜 갚는 백조나 포유류과에 속해 아기를 낳는 인어는 분명 픽션이다만, 코다마 유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듯하다. 추억 속 앨범에서 예전 사랑했던 이의 사진이 톡, 하고 떨어진 듯. 코다마 유키가 그린 백조와 인어의 세상은 '옛날엔 그랬어. 백조가 있었고 인어와 사랑을 나눴지.'라 자연스레 고백하게 되는 느낌이다.  

<빛의 바다>에는 알차게 다섯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모두가 가슴이 아리고, 한편으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무도회장에서 즉석만남에 열을 올리며 사랑은 그저 여인을 배 아래 놓는 것, 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답답해할 이야기들이다. 까짓, 질러 버려. 한번 자빠뜨리면 그만이야! 왜 답답하게 우물쭈물해! 꼬셔 버려, 고백했다 아니면 아닌 거고, 쪽팔림은 순간이지만 밤은 길다, 라 생각하는 마초와 쾌남들이 본다면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보이고, 속 터진다.  

하지만 비 온 후 길을 걸을 때 행여 산책 나온 달팽이를 밟을까 조마조마하는 사람들, 토끼풀꽃(클로버)로 팔찌나 반지를 엮어보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화관을 만들어 본 사람들, 말없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길을 걷는 게 마냥 행복한 사람들, 뜨거운 성관계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게 때로 더 행복하고 좋은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여전히 두근거리는 사람들, 지금, 사랑으로 행복한 사람들. 그들이 보면 가슴 깊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었을 때 선물하고픈 사람이 바로 떠오른다면 분명 당신은 행복한 사람일 테고.

겨우 두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사랑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코다마 유키보다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작가를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순정' 만화이다. 재벌집 아들놈이나 꽃미남 꽃미녀나 8등신, 더 나아가서는 9등신 따위가 나오지 않아도, 이 작품에는 '순정'이 담겨있다. 순정, 명사,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어느 순간부터 '순정'은 '순정의 공식'이 생겨나며 남자들이 외면하는 만화 장르의 하나가 되었다지만, 코다마 유키의 '순정'은 자신을 내던져 사랑하는 애틋하고 섬세한 이들의 마음결이 어루만져져서 좋다. 남자들은 흔히 순정만화를 보다 '아, 조금 더 가면 이놈이랑 여자 주인공이랑 눈 맞겠구먼.' '얘가 걔지? 결국 셋이서 삼각관계 이루지? 아우, 징그러. 얘네들 인간관계가 왜 이렇게 좁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그 여자만 사랑하고' 라 말하며 완결편을 보지 않고서도 앞일을 예측하는 신묘함을 보인다지만, 코다마 유키의 작품은 충격 대예언이나 앞일 때려맞추기가 통하지 않는다. 코다마 유키의 매력은 관계를 좇거나 얼개와 흐름을 비중있게 두는 게 아니라 '지금 사랑에 빠진 이의 두근거림'을 눈부시게 잡아내기 때문이다.  

아, 이 작품을 보니, 다시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위험한 작품이다. 30대 유부남 아저씨가 사랑이라니. 극도로 위험한 작품이다. 위험한 만큼, 이 작품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적어도 A형 남자를 움직일만한 섬세함과 따뜻함이 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겨울의 군고구마는 껍질을 까주고, 차가운 귤은 손에 넣어 덥혀주고, 그녀가 장갑을 끼기 전 미리 따뜻하게 품고 있는 그런 순정. 그리고 그녀 옆이 아니라 그녀의 흔적과 발자국을 좇아 어딘가 모서리 뒤에서 가슴을 두근거리던 순정. 

제대로 된 순정을 만났다.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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