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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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뱀파이어 소녀의 헌신적 추종자인 남자가 소녀에게 줄 피를 마련하기 위해 죄없는 소년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목을 베고 피를 받는다는 살인 장면이 초입에 나오기에, 이 소설의 첫인상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장르를 불문하고 힘없는 아이가 학대받고 상처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 - 특히 아이 - 를 살해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었다. 해서 얼마 읽지도 않고 이 책을 권해준 이에게 혹평을 퍼부었다. 이게 뭐냐고, 뱀파이어 소녀 엘리를 사랑하는 늙은 남자 호칸은 결국 비겁한 변태 살인마와 다를 게 뭐냐고 말이다. 차라리 혈액 은행을 습격하든 자기의 피를 뽑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엘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해 봐야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이다. 책을 넘어 책을 권한 이에게도 싫은 소리를 했는데, 너는 너무 로맨티스트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게 어디까지일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조폭 영화가 의리니 뭐니 아무리 당의정마냥 감싸고 포장해도 결국 깡패새끼들 얘기 아니냐고, 희생된 아이의 부모 마음이 찢어지는데 사랑 타령이 나오느냐고 윽박질렀다. 심히, 흥분했다.

흥분한 애아빠 독자 앞에서, 책을 권한 이는 조용히 답했다.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다고, 정말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전 이야기에 설득이 됐어요. 그리고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응원해요." 라고.  

두 권짜리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을 끝까지 참고 읽었다. 과연 네가 날 설득하는지 두고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인정했다. 나 역시, 우정이든 사랑이든 소녀 엘리와 소년 오스카르를 응원한다. 


동화 <빨간 모자>를 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안 듣고 늑대 출몰지역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극히 계몽적인 목적을 위해 쓰인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남자를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서 늑대 - 남자 - 를 만나, 결국 순결을 잃는다고나 할까? 처녀의 흔적인 빨간 피는, 빨간 모자와 연결되어 섬짓한 구석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뱀파이어 역시 조심해야할 늑대나 남자일지 모르겠다. 불로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희생자를 습격하기 위해선 별 수 없이 창밖에 매달려 '나 좀 들여보내 줘!'라 말해야만 하는 뱀파이어. 상대가 '들어와, 널 초대할게'라 말해야 겨우 상대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줄리엣이고 상대가 로미오가 아닌 이상, 남자를 함부로 들였다가는 쪽쪽 빨린 후 내쳐지는 신세가 된다. 그러니 조심해라, 쯤 될까? 해서 전형적인 뱀파이어는 에로틱한 면모가 많다. 순진한 처녀가 냉큼 자기 방에 들일 정도로 미끈한 남자 내지는, 키스마크 남길 엉큼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탐닉하는 뱀파이어라. 피가 모자라 헐떡이지만 왠지 끈적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렛미인>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부정하고 나선다. <렛미인>에 어울리는 건 <빨간 모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결국, 뱀파이어도 '먹고 살자고' 흡혈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찌보면 김훈의 <남한산성>일지도. 뱀파이어 소녀 엘리는 '너 같은 애들이 많니?'란 오스카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리 배고파도, 사람이 사람을 물어 뜯을 수는 없다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이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뱀파이어에게 에로티시즘과 관음이 빠진 대신 실존이 들어찼다. 그리고 일견 어울리지 않을듯한 뱀파이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그저 거리에 나앉아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사회보장제도가 훌륭한 이야기의 배경, 스웨덴의 그림자 드리워진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알콜 중독자, 약물 중독자, 왕따 소년, 흔한 이혼과 고양이에게 둘러싸인 악취 풍기는 사람. 사람들은 뱀파이어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삶을 구걸할 필요가 없지만, 절실함을 버린 대신 비루한 삶과 소외를 선물받았다. <렛미인>은 기존 뱀파이어 소설에서 에로티시즘만 빼고 끝난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관찰까지 덤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백미는,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왕따 소년 오스카르의 우정, 또는 사랑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이 작품은, 뱀파이어의 삶에 대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밀착 취재하여 디테일을 살렸지만, 두 소년소녀의 우정과 감정을 바늘귀에 꿴 명주실로 거미줄을 자아내듯 연약한듯, 위태로운듯, 안타까운듯, 하지만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먹잇감인 인간의 종에 속한 '친구'를 지키고자 하는 엘리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소녀 엘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달팽이집 속의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엘리를 구하고, 엘리는 오스카르를 구한다. 엘리의 정체를 알게 된 오스카르는 <렛미인>에 대해 선입견을 지녔던 나처럼 엘리를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공간에 들어간 뱀파이어는 어찌되느냐는 오스카르의 짓궂은 질문에 엘리는 바로, 그 즉시, 초대가 없었음에도 문턱을 넘는다. 온몸으로 피를 쏟으며 힘이 빠져가는 엘리. 다급한 오스카르는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애타게 부르짖는다. 소년이 소녀의 절실함을 이해 못하고 살인귀, 괴물 취급을 했음에도,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걸어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고자 했고, 그를 알고자 했고, 그의 위로와 사랑이 간절했던 것이다.

 
초대받지 못한 엘리
 

렛미인. 들어가도 되겠니? 쯤이다만,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도 되겠니? 너의 삶으로,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뱀파이어보다도 더 끔찍한 인간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판치는 세상에서, 존엄이나 존귀, 인권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서 비루한 삶을 좀먹듯 연명해가는 비겁한 삶 속에서, 살기 위한 본능과 흔들리는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진짜 괴물이 있다. 하지만 인간들 틈에 끼어있는 그 '괴물'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기에' 아련하다. 뻣뻣한 종이 책장에 여린 손가락을 베인듯 엘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쓰리고 안타깝다. 오스카르와 엘리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엘리의 정체성, 상처 역시, 쓰리고 안타깝다. 위선과 거짓으로 상대의 삶에 발을 걸친 듯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온몸으로 피를 쏟아낼 지라도 너에게 다가가겠다는 소녀가, 너무 안타깝고 애틋하다.  

혐오와 선입견으로 시작했지만 괴물에게서 인간을 배웠다. 외로움 속에서, 거절당함의 두려움을 안고서 창밖에서 떨고 있는 소녀, 또는 뱀파이어에게서.

나는, 그녀만큼 절실한가? 삶이, 사랑이, 세상이, 그녀만큼 절실한가?

렛미인.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가도, 될까요?

피흘리는 엘리의 그림은, 영화 <렛미인>의 엘리가 아닌, 제 이미지 속의 엘리를 그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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