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 카이로스총서 33
황수영 지음 / 갈무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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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생성을 통해 본 생명

 

 

 

 

17세기 근대 이래로 자연 현상을 필연적 법칙과 원리를 통해 기술하려는 자연과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거의 유일한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생명현상의 가변성, 근본적 불안정성은 17세기 근대 자연과학의 맹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현상의 고유성이 법칙을 일탈하는 예측불가능한 오류로 정의되기도 한다. 따라서 생명현상은 자연과학, 즉 이 진리의 검증체계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지게 했다. 우리는 종종 시스템의 장애를 통해서 기존 시스템을 점검할 필요성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18세기 말 생기론자들은 생명을 연구하는 고유한 방법론과 학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17세기 근대의 자연과학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로 환원하여 분석적으로 이해하며, 부분들을 통해 전체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과학적 방법론은 물리학과 화학의 연구방법이다. 하지만 물 70%, 지방 25%, 단백질과 탄수화물, 미네랄 등의 함량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똑같은 함량으로 구성된 새로운 는 지금의 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직관이 생긴다. 양적 동일성이 결코 동일한 질적 차이까지 구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요소의 동일성보다 요소들 간의 유기적 관계들 속에서 생명체의 고유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생명체 운동의 메커니즘을 밝혀내도 정작 그 구성을 유지시키는 내재적 힘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공통적으로 물리화학적 원리에서 독립된 생명원리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에 따라서 생리적 현상과 다양한 질병을 설명”(108)하는 것이 생기론자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베르그손을 기존 물리화학에서 통용되는 과학적 합리성에 문제를 제기한 생기론자로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에 나타나는 예측불가능성, 우발성과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진화론과 생명을 설명한다. 책에 등장하는 캉길렘, 시몽동, 들뢰즈 역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생기론자이다. 또한 이들의 공통점은 자연과학에서 독점적으로 연구되던 생명의 문제를 철학의 영역에서 전유한 (과학)철학자라는 것이다.

 

 

책의 구성은 기존 베르그손 연구에서 시도되지 않았던 독창적 베르그손적 계보의 구성을 따른다. 이 책은 크게 1부에서 진화론을 바라보는 과학적 입장과 베르그손 철학의 대결을 살펴보고 2부에서 생명체 수준의 문제에 주목한 캉길렘과의 비교, 3부에서 생성에 초점을 맞추어, 물질 수준의 개체화에 주목한 시몽동과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차이의 철학으로 발전시킨 들뢰즈를 통해 베르그손적 계보를 구성해낸다. 이 계보가 내게 다소 의아한 이유는 캉길렘은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의 후예로 통상 간주되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서 연속성을 부정하고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인식론적 단절개념을 과학사의 핵심적 개념으로 보았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에 맞서 새롭게 이론이 구성된다는 역사적 인식론을 연구방법의 토대로 삼아 과학사 연구의 영역을 물리학과 화학에 한정시켰지만. 캉길렘은 역사적 인식론을 참조하여 이론보다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생물학과 의학을 토대로 과학사를 연구한 과학사가이다. 이 프랑스 과학철학의 역사적 인식론계보에는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등을 저술한 철학자 미셸 푸코 역시 포함된다. 푸코는 이들의 인식론적 연구방법을 계승하여 새롭게 고고학적 방법을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새로운 계보 구성은 베르그손을 중심점으로 설정한 그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멘드비랑-라베송-베르그손으로 구성된 프랑스 유심론 철학의 계보를 뒤이은 이 계보에는 생명생성개념을 탐구한 베르그손의 후예를 구성하려는 철학적 계획이 엿보인다. 저자는 생명생성을 순환적으로 서로를 규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 설정한다. “생명철학은 생성철학을 전제로 하며 생성철학은 생명현상, 특히 생명현상의 일부를 이루는 의식현상에 모범을 두고 있다.”(14) 캉길렘과 베르그손을 대비할 수 있는 이유는 베르그손이 진화 및 생명의 창조 등 거시적 관점에서 주로 생명을 다룬 반면에 캉길렘은 생명체가 개체 수준에서 겪는 현상들을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한 베르그손이 물질 수준의 생명 현상이나 개체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데 반하여, 시몽동은 물리학이 보여주는 물질의 생성과정을 연구하면서 개체화와 생명현상의 관계”(14)를 연구한다. 캉길렘과 시몽동은 베르그손이 주목하지 않았던 개체 수준의 생명체와 물질 수준의 개체화 문제에 주목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베르그손의 생명 연구의 미완점을 보완하는 후예들로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단순히 생성생명의 키워드를 연구했다기보다는 베르그손의 독창적 개념인 지속“‘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운동’”(359)로 재해석하여 생성의 문제에 주목한 차이의 철학을 구성한다.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는 먼저 진화론을 중심으로 생명현상의 연속적인 창조 현상을 검토한다. 진화론은 개체군 내의 우연한 변이들의 축적과 유전이 자연선택과 적응에 의해 이루어지며, 따라서 점진적으로 새로운 개체군을 형성(24,28)하며 이것이 진화의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현재 신다윈주의자들은 유전자는 분자 수준의 안정성을 토대로 동일 개체를 재생산하며, 변이는 분자 차원의 우연한 돌연변이들에 의해 설명할 수 있고, 진화는 이러한 변이들의 집적이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거나 제거됨으로써 이루어진다”(50)고 말한다.

 

 

현재 생명체들의 공동 조상이 시간을 거치면서 그 후손들이 다양한 종적 특질들을 가지게 된다는 진화론의 두 가지 전제 중 하나는생물다양성이 개체들 간의 미소한 차이들이 아니라 종 이상의 차원의 근본적 차이이며 다른 하나는 생물의 시간 속의 변화 역시 거시적 차원, 즉 종적 차원에서의 근본적 변화”(24)이다. 베르그손이 신다윈주의에 비판을 제기하는 이유는 우연변이와 적응만 강조해서는 진화의 적극적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며, 변이의 원인이나 진화의 커다란 계통들을 설명하는 데(29)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우연적인 방식과 기계론을 오가는 이러한 애매함에 대한 이론적 난점에 대해 베르그손은 생명체의 진화나 발생이 이미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새로운 것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무하다.”(40)고 말한다. 기계론과 목적론 둘 다 원인과 목적이라는 힘에 의해 움직이며 진화의 시간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에 반해 베르그손은 생명의 본질을 창조로 보았으며, 저자는 생명체의 행위는 행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예견이 불가능하다는 의미”(32)에서 우발적이라 말한다. “생명체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시간적 현상이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33)하다.

 

 

진화의 커다란 계통을 설명하는 베르그손의 진화론의 핵심적 개념은 분기(divergence,bifurcation)’이다. 이는 생물계통수는 단선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다층적인 혹은 계층적인 내포를 갖는다”(26)는 것이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운동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연속적 흐름으로 간주했으며, 생명의 운동은 이러한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들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생명운동의 원인으로 가정되는 것은 생명의 약동이며, 약동 자체는 역사적이며 사건적 성격을 띈다(33~39). 생명의 약동을 통해 베르그손은 폭발에 의한 힘의 분산(분기)으로 여러 종들의 출현을 설명해낸다. 비록 그것은 예측불가능한 방식으로 진행하지만 원초적 힘에서 유래하는 우발적 사건의 축적은 시간 속에서 일정한 방향을 낳기도 한다. 이 방향, ‘경향이 우리가 바라보는 커다란 종적 변화인 것이다(45). 따라서 베르그손은 종은 생명이 물질적 힘 속에 구현한 경향들이며,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되는 흐름”(180)이라 말한다.

 

 

베르그손은 생명의 사건적 우연성을 강조하며, 사건으로서의 생성이 진화에서 일어나는 창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책을 읽은 후에 생긴 의문점은 개체 수준의 안정성(자기동일성)과 종 수준의 변화가 과연 어떻게 양립가능한가이다. 이 양극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문제인데 베르그손은 종 수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진화를 우연적인 생명의 약동을 통해서 가정하는 데서 생성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낯설다.

 

 

베르그손 진화론 설명의 한계는 1953DNA의 이중나선구조 발견 이전에 발표된 학설이라는 점이다. 유전물질의 실체를 발견한 것은 생명의 규범성의 토대를 물질 수준으로 확고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이것이 어떻게 끊임없는 종적 변화와 개체적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유전 프로그램의 실패가 종 수준의 변화라면, 그 실패의 원인은 단순한 분자 수준의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인가? 캉길렘이 설명하듯이 적극적으로 생명의 생존환경을 최적화시키려는 개체의 노력은 DNA에 기재된 유전 프로그램에 없기 때문에, 과연 종 수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DNA에 반영되지 못하는 그저 우연적 요소일 뿐인가?

 

 

단순히 생명의 생성적 측면을 살펴보면 우연한 움직임, 창조적 운동이 나타난다는 베르그손과는 달리 캉길렘은 개체 수준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환경에 대해 내재적 규범을 새로이 설정해 자신의 생존을 최적화시키는 노력이 존재한다고 본다. 캉길렘은 이를 규범성이라 칭하며 생명의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한다. 신다윈주의와 베르그손이 공통으로 말하는 진화의 우연성과는 달리 생명체의 변화는 생명체가 적극적인 규범설정을 통해 이뤄낸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려는 생명체 수준의 행동에 이미 가치평가가 개입된다는 것을 저자는 캉길렘의 독창적 발견이라 강조한다. 쾌락을 주는 것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활동을 통해 생명체는 선호와 배제의 기제를 작동한다. 유기체는 이러한 가치부여 활동에서 생겨난 규범을 설정하는 존재다.

 

 

규범은 정상과 병리를 가르는 문제인데, 정상을 향한 규범설정의 실패가 병리적인 것이 아니다. 규범성의 문제는 개체의 체험에 기반하며 생명체의 일인칭적 주관성과 관련한 문제”(148)이다. 개체는 늘 규범을 세우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규범설정을 통해 병리적인 질적 체험을 하는 경우에만 병리적이라 말할 수 있다. 진화론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고유성에 초점을 맞춘 1,2부의 내용은 단순히 철학적 담론에 관심 있는 이들 뿐만이 아니라 영미 생명윤리와 낯선 논의방식 때문에도 의학계, 과학계에서도 새롭게 논의 주제로 삼을 법하다.

 

 

저자가 말한 바대로 서양어에서 삶과 생명은 같은 말(영어 ‘life’, 불어 ‘vie’, 독어 ‘Leben’)로 표현된다.”(127)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때, 서양의 사유방식으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우리가 삶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위협, 질병 등의 부정적 요소에 의해 침탈당하는 삶의 불안정성 때문이다. 생명 역시 이런 부정적 요소에 의해 변질되거나 언제라도 죽을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지만 생명은 이러한 위기를 이겨낼 자기치유능력이 전제된 존재다. 이 자가치유능력은 기계와 생명체를 구분하는 고유한 특성이다. 기계는 고장난 자신의 몸을 스스로 고치지 못한다.

 

 

베르그손 철학을 중심으로 모인 여러 서양철학자들의 사유는 이런 생명체의 자기치유능력을 비롯한 창조, 생명의 능동적 역량, 그래서 위기를 이겨내는 역량인 힐링의 능력이 우리에게 내재함을 보여준다. 만약에 다시 이 자기치유능력의 근원 혹은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이 책을 보다 우리 현실의 문제와 가깝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힐링을 목적으로 책을 넘기기에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이 다소 낯설고 전문적이다. 하지만 생명철학의 문제를 촘촘하게 엮어낸 저자의 창조적건축물로서 책의 면모를 꼼꼼하게 파악한다면, 어떠한 흥미로운 답변들이 나오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받고 쓴 서평이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책을 보고 쓴 서평이 아닌 건 객관적 서평임을 애초에 부정할 수 있는 근거로 생각이 됩니다. 이 서평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최대한 책을 들춰보기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감안하시고 보시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말

 

 

* 베르그손이나 베르그송이냐

 

표기법의 차이이다. 기존의 독자들은 베르그송이 익숙하겠지만, 베르그손 부모의 출신 국가를 고려한 발음이 베르그손인 듯 하다.

 

 

* 캉길렘, 캉귀옘, 깡길렘

 

프랑스 철학자 표기법 중 가장 궁금한 발음이 Canguilhem이다. www.forvo.com에서 프랑스인이 발음하는 canguilhem 발음을 찾아봤더니 깡길렘에 가깝게 들리는 듯 하다. 에밀 뒤르켐의 뒤르켐Durkheim을 생각하면, lh는 깡귀옘으로 발음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캉길렘을 선호하는 이유는 푸꼬가 아닌 푸코를 선호하는 이유와 같다. 푸꼬나 깡길렘이 원래의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겠지만, 푸코나 푸꼬, 캉길렘이나 깡길렘이 프랑스어권에서 큰 변별적 차이를 낳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현실 세계의 과학적 지식과 과학의 지식과 방법에 대한 철학적 반성reflexion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개인적으로도 너무 반갑다. 특히 프랑스철학과 과학은 멀고도 먼 거리를 가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과학의 지식과 방법을 반성하는 프랑스 인식론(과학사, 과학철학)은 데카르트 이래로 그 계보를 계속 이어나가는 듯 하다. , 당대의 과학적 성과를 반성하고 철학적으로 되새김질 하려는 노력은 프랑스의 전통이다. 그리고 이를 오용(?)하는 것이 20세기 현대 프랑스 철학적 특성이라는 세간의 견해에 대해, 나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생명의 고유성을 설명하려는 과학과 철학의 입장을 개인적으로도 공부하기 위해서는 캉길렘, 바슐라르, 카바이예스 등 암튼 많이 공부해야 싶다. 왜 굳이 철학 중에서도 프랑스 쪽 과학철학에 흥미가 계속 가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취향이 이러려니 하련다. 고등학교 때부터 생물 배울 때가 꽤 재밌었다. 어쨌든 정치철학과 과학철학 둘 다 현재로서는 좋다.

 

 

*베르그손의 기본적 개념에 대한 정확한 숙지 없이 썼기 때문에 한 쪽에는 부끄러움이, 다른 한 쪽에는 이게 내 한계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생긴다.

 

 

*다음에는 캉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보고 서평을 썼으면 좋겠다. 특히 20년 후에 덧붙인 내용이 내 관심주제에 가깝다. 캉길렘의 문체를 쓰윽 보니 푸코의 문체와 닮아서 놀랍다. 이래서 스승이라 부르는 건가.

 

 

서평의 결론은 기승베르그손/푸코-캉길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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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논리 - 세상의 헛소리를 간파하는 77가지 방법
줄리언 바지니 지음, 강수정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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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일상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까? 나 역시도 의문이다. 학문의 가치가 단순히 우리 삶의 '즉각적' 효용성에 기준을 두고 있는 이 시대의 일반적인 판단은 철학이 '그들만의 것'이라고 치부하게끔 한다.


 그러면서도 철학자나 혹은 배운 지식인(예를 들면 진중권), 혹은 대중 철학자 강신주처럼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책을 사거나 강연을 듣고, 동시대의 시사에 대한 이야기를 원하는 것은 무슨 심리인가? 다들 그들이 가지는 일상의 '통찰', 철학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도 그들의 철학적 통찰력을 부러워하고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궁금해서 책의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너무나 단순하게, 어린 시절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걸린 '책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책을 만든다'라는 슬로건이 인상에 남아서, 그들을 만든 책을 기계적으로 알고 싶어 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철학적 통찰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체계적 혹은 이론적 사유 없이 그만한 통찰을 자연스레 삶의 지혜로서 갖출 힘은 내게는 없다. 깨달은 것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한 칸트의 이야기나 프랑스 철학의 기발한 생각은 넘어서더라도 일상의 모든 사람들이 판단을 잘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논리학이 아닌가 싶다. 나는 논리학을 수업으로도 들은 적이 없어서 너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이런 철학자의 책은 난해한 문장으로 나를 괴롭히지도 않고, 가짜 논리라고 치부할 만한 문장들을 라디오밴드 톰 요크의 말이나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the unknown knowns 같은 꽤 유명한 논리적 비약들)의 말들을 사례로 하여 우리가 얼마나 가짜 논리에 휩싸이고 넘어가기 쉬운지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심지어 대중 철학책에서도 줄리언 바지니가 언급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세히는 생각이 안나지만 이런 생각을 안하는 사람은 제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라든가. 삶을 알고 싶으면 이 책을 꼭 봐야 한다는 것은 전제를 이미 선취함으로써 반박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편협한 문제 설정을 이루고 있다.


 허수아비의 오류라든가, 화려한 수사학적 문장을 파헤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못 보게 하고 논증 대신에 무력한 말들만 내놓게 하므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이나 명제의 정확한 판단을 방해한다. 그런 판단은 우리가 옹호하는 측에서 내놓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문장에서도 발견하는데 충분한 증거가 없다거나, 일부의 옹호를 지지로 착각하는 정치인들이나 할 법한 부정확한 일반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영국식 유머를 좋아하는데 철학자의 냉소적인 어투를 여기서 보게 되어서 즐거웠다. 

이 대목이 나오는 가짜 논리의 예시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유명한 거짓말이다.

나는 그 여자, 르윈스키 양과 성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절반의 진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거짓 암시의 기미를 전부 제거하기 전부 제거하기 위해 드러내고 밝혀야 하는 괄호 속의 말들, 뒤에 감춰 뒀던 말들을 생각해 보라. 지방을 줄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높지요),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셔츠 색깔 근사한데 (하지만 모양은 형편없어).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하얀 거짓말과 고약한 꿍꿍이를 숨긴 절반의 진실 사이의 경계는 희박하다. 그 경계는 어디서 무너질까? (200~201)


52. 거짓과 진실의 교집합 -절반의 진실 Half Truths 

 

책은 전혀 어렵지 않고, 또 짧게 끝난다. 책을 읽으면서 한국인으로서 이색적인 것은 장하석(경제학자 장하준의 동생) 교수의 연구 성과가 인용된 것이다. <Inventing the temperature>라는 책을 펴내면서 그는 우리가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진리로 간주되온 명제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에, 쉽게 진리라는 주장에 넘어가지 말 것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장하석 교수의 주장이 책에 등장한다. 물이 담는 용기에 따라서도 끓는점은 변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의심했을 법한 사실을 비판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고 그는 따라서 <Is Water H2O?>라는 책도 발간했다. 


 장하석 교수를 검색하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최근 강연한 내용을 보기도 했는데, 철학의 가치를 세상이 경직된 사고를 하는 것을 막고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사회에는 자기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푸코의 다르게 생각하기가 떠올랐다) 자신의 연구사례를 들면서 말하는 그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주장은 내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지만, 영미권 과학철학자로서 그가 밝히는 철학의 유용성이 오히려 일반 대중에게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장하석 교수는 현재 캠브리지 대학교 과학철학과 과학사(Department of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과 석좌교수다). 나는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편인데, 그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감한다.


어쩌다보니 서평이 철학의 유용성과 가짜 논리로 확장된 주제를 향해가고 있지만, 일상에서 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를 원하는 사람, 이성을 자기 힘으로 사용하기를 말하는 칸트식 계몽주의의 후예들, 생각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 논리학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책을 들춰도 좋을 것이다. 나도 이 서평을 쓰면서 의도적으로 가짜 논리를 하나 이상 사용하기는 했는데 ... 메시지의 전달과 논리적 오류 사이의 간극은 꽤 좁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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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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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들은 철학 수업 제목은 '대중문화와 철학'이었다. 대학생 치고 너무 얕은 인문학적 지식 때문에

나름대로 컴플렉스를 가졌던 듯 하다. 그 수업에서 인상 깊은 철학자 세 명이 푸코, 하버마스, 지젝이었다.

아마도 그 수업을 강의하신 선생님의 영향 탓인듯 한데, 푸코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느껴왔던 사회적 억압과 통제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명확하게 드러내주었기 때문에 일종의 희열까지 느낄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벤담의

판옵티콘을 예시로 들었기 때문에 그 감시체제의 원리와 피치자들에게 가해지는 자발적 내면화와 통제의 효율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근대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지배와 폭력성을 드러내는 포스트모던(이 용어는 

논란이 많지만 아무튼 당시 수업 내용에 따르자면 이렇게 표현하기로 한다)적 경향과는 반대로 오히려 

이성에서 다시 근대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재밌었다.


지젝은 소련의 혁명을 가능케 한 것이 오히려 착각, 그 불가능성을 오인한데서 혁명을 현실화시키는 힘이 나온다는

재밌는 주장 때문에 관심이 갔다. 다른 곳에서 들은 세미나를 통해서는 지젝이 알튀세르의 발언을 다시 말한 것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그의 책 하나도 제대로 들춰보지 못해서 내가 평가를 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어쨌든 내 앞길에서 중요한 철학자들 중 2명이 한꺼번에 나온 책이니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이 책은 김영사에서 기획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32번째 책인데,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대중 강의에서 김용옥 씨가 추천해서

사게 된 책이다. 아마 인문학에 목말랐거나 철학 주변을 맴돌던 초짜들이 많이 샀을 걸로 생각된다.


 

 내용에 관한 정리는 다음에 미루기로 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해야겠다.


나는 푸코에 관해서만 몇 마디 던질 수 있을 뿐이고, 하버마스는 잘 몰라서 저자의 글에 대해 균형잡힌 평가는 할 수 없다.

먼저 서구의 근대의 합리성, 이성의 역사를 개괄한 면은 매우 중요하고 비중상 적절하게 다루어졌다고 본다.

그 다음에 푸코와 하버마스 사상을 개괄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나오는데 문제는 푸코를 다루는 지면에서

용어상의 혼란이 생겼다는 점이다.


 푸코의 저서 중 아마 가장 유명할 듯한 <광기의 역사>의 원저는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이다.

여기서 이 책의 저자 하상복씨는 비이성을 "정신착란"이라고 말한 점이다. 또 뒷면에 가서는 이를 실성이라고 해놓고 

또 다시 비이성이라고도 말한다. 비이성=정신착란=실성 모두 동일한 용어 déraison 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리된 개념이아닌데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법한 실수이다. (쪽수 역시 다시 병기하겠다)


 

 마지막의 키워드를 서술하는 점에서 지식에 대한 관심이 권력에 대한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이 마치 <말과 사물>이후로

급전환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1970년 <담론의 질서>부터가 맞을 듯 하고 지식의 고고학이라 부를 전기의 푸코는 1969년

<지식의 고고학>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푸코가 싫어하지만 구조주의자라 부를 만한 측면에 관해서는 비중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데 그 점은 아쉽다.  뒤의 지식인 지형도에서는 분명 라캉과 알튀세르를 푸코에게 영향을 준 구조주의자로서 명시해놓고

있는데... 이 점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1970년 이후로 권력의 계보학이라 부를 이후 푸코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지식-권력의

관계를 파헤치는 계보학적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이 전환시기의 이유와 정확한 시기 구분이

보통의 푸코 연구자들의 구분과 다르다는 것이고 이유도 명확히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지식인 지형도에

푸코에게 영향을 준 과학철학자인 바슐라르와 캉길렘이 누락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지식인 지형도에서 아쉬운 점은 두 철학자 모두 당대에서 자신의 이론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에도 뚜렷이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이기 때문에 두 철학자를 계승한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푸코의 철학을 계승, 자신의 것으로 발전시킨 아감벤이나(생명 관리 정치 개념을 변형시킨 것으로 아는데 이는 1970년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교수로 취임한 이후 매년 강의한 1970년 대 후반 강의록에 나온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3세대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가 하버마스의 이론을 어떻게 계승하고 변형시켰는지(악셀 호네트의 유명한 

저서는 '인정투쟁'이다)에 대해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흥미롭게도 악셀 호네트 역시 박사 학위 논문이 푸코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목표는 인문학에 관심 있는 대중이 두 사상가의 저작을 직접 읽어보게 할 만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깊이 읽기'는 두 저자에 대한 2차 문헌만 나열해 놓고, 중요한 주요 저서에 대한 코멘트나 강조가 빠져있다는 게 안타깝다. 1차 문헌으로 저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해주는 노력이 빠진 게 아쉽다.



 책 발행 시기가 2009년이라 아쉽지만 푸코는 단행본으로 발간한 저서 말고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나 루뱅 대학 등에서 강의한 강의록 등 다양한 저서가 나오는 실정이다. 그리고 푸코의 사상은 감시와 처벌이 말한 규율사회에 관한 점이외에도 신자유주의와 그 통치성에 대해 분석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거의 다 발간되었기 때문에 단행본 저서와 궤를 같이하면서도 그에 다 담기지 못한 푸코 사상의 면모를 볼 수 있어서 그의 사상체계를 개괄하는 데 추가되야할 정보가 늘었다. 최근에는 '통치성governmentality'에 대한 분석이 현재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관련되어 주목해야 할 부분인 듯 하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저서도 이 책에 소개된 것들만 아니라 중요한 저서가 있으면 추가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목에 대해서. 마치 푸코가 광기의 시대를 옹호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는 데 푸코는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광기를 고고학적 작업으로 역사적 탐구를 행했다 뿐이지 시대 전체가 광기인 양 말하지 않는다. 고전주의 시대에 시작된

이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 억압된 '광기'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광기의 시대는 아마 출판사측의 상술 '전략'인듯 하다. 

오해를 자아내는 제목 선정은 지양되어야 한다.


 대체적으로는 두 사상가 전반에 대해 잘 다룬 저서라고 평한다. 구체적인 디테일의 오류는 있었지만 나 역시 하버마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너무 비판한 듯 하여 미안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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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치철학에 관심 있는 줄 몰랐는데 미셸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안전,영토,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및 <민주주의는 왜 죽었는가>, <권력과 저항> 등을 사서 읽다보니 정치철학으로 제 관심주제가 수렴한다는 것과 난장 출판사의 책이 꽤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판사 이름도 모르고 책만 보았는데, 현대 정치철학, 인문학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을 출판하는 고마운 출판사라서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한 해외 저서의 번역의 질 또한 중요한 문제인데, 믿을 만한 책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난장에서 이택광 교수의 저서 등 국내 연구자들의 책 또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난장이 정치철학이나 현대 철학 분야로 총서도 기획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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