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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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서 우울의 끝을 본 것 같다. 괴이한 트라우마와 흐릿한 기억, 정체모를 욕구와 욕망, 이따금 미친 듯이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 불현듯 솟구치는 무엇을 향하는 건지도 모를 분노와 화. 바로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의 주인공 ‘나’가 갖고 있는 우울함을 이끌어내는 것들이다. 죽은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어린 나의 모습, 바로 이 기억은 정말 음산하게 ‘나’의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갔다.




  ‘나’의 직업은 교도관이다. 상관에게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듣고 인정받는 교도관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 고아원 문 앞에 버려졌었고, 그 후로도 한 번 더 버려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곳에서 한 때의 연인 게이코를 만났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친구 마시타를 만났다. 마시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마시타는 ‘나’와 비슷했다. 자꾸만 마시타가 ‘나’에게 그런 사실을 주장해서 어쩌면 그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속은 온통 혼란으로 뒤덮인 채 겉으로는 지극히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착실한 교도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소년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법한 사형수가 들어온다. 거센 여론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은 야마이, 상관과의 사형제도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야마이를 보면서 ‘나’는 그가 동생 같고 이미 잃어버린 마시타 같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같은 고아였기에.




  ‘나’는 줄곧 고아원 원장님을 떠올린다. 너무 뛰어다니는 바람에 새로 받은 지 얼마 안 된 운동화가 헤져도 화를 내지 않으시던 원장님.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인생에 대해서 모든 것에 가까울 만큼 많은 것을 알려주신 원장님이었다. 하마터면 자신도 야마이와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난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이 많음을 보여주신 원장님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로, 적어도 겉으로는 반듯한 그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도 야마이에게 그런 인생의 선배가 되고자 한다. 자신에 대해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버러지만도 못한, 어떤 존재하는 것쯤으로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야마이의 마음에 조금은 온기가 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 ‘나’는 적극적으로 야마이에게 다가간다. 그러고서 얼마 후 야마이로부터 받은 한 통의 편지가 내 마음까지 적셨다.




  “나에게는 형제가 없지만 당신이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만 하는 말입니다.”




  조금은 극적이기도 하고, 조금은 무시무시하기도 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차분하고 차분하게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더 음산하고 우울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다 괴물처럼만 여겨졌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아야 할 목적이 있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착한 사람도, 처음부터 나쁜 사람도 없다.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이고 모두에게는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들을 이 책은 너무나 우울하게 소리치는 것 같아서 정말 우울한 마음으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래도 너하고 나는, 뭐랄까.

       언제나 한 편이 되어주기로 하는 건 어때?

       그 때 화가 나 있더라도. 전혀 만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둘 중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용서할 수 없어도 끝까지 한 편이 되어주기로 한다면...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가기가 쉽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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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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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조용하고 고요한 이야기 하나를 읽은 기분이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이 <조용한 폭탄>이라는 것을 알고서 <사랑을 말해줘>보다 훨씬 더 이 이야기와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말해줘>만으로는 왠지 단순한 연애소설을 그렸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조용한 폭탄>만으로는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기가 부족해 보인다. 아무튼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런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그만큼 이 책은 내용을 되새기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사랑을 말해줘>는 슌페이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소리를 듣지 못하는 교코. 우연히 만난 둘은 조심스럽게 사랑에 빠져들었고, 혼자 사는 슌페이의 집에 주말이면 교코가 와서 머물다 가곤 했다. 슌페이도 책 속에서 언급했다시피 처음 슌페이가 교코에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어떤 호기심에 가까웠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동안은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조용함 속에서 메모를 주고받는다든지 입모양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둘을 순식간에 연결시켜주었고, 그런 점은 슌페이에게 불편함은커녕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슌페이는 항상 시끄러운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직업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도시라는 장소 자체가 소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슌페이에게 있어서 교코는 안식처이자 의지할 수 있는 따스함이 있는 곳이었다. 때로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벽에 부딪혀 답답한 마음도 생기지만, 그런 것들 역시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나 점점 둘이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슌페이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종종 시끄러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소란스러움이 있는 세상 속에서, 그 바로 옆에 있는 교코는 언제나 조용한 세상에 있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기도 하고 심지어 두렵기도 하다.




  새로운 이야기다. 소리가 있는 세상과 그렇지 않은 세상을 연결하는 슌페이와 교코의 이야기. 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결말이 없어 상상에 그쳐야 하지만, 고요함과 시끌벅적함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언가를 무작정 찾아 헤맬 때 그러다보면 문득 내가 찾으려던 게 뭔지 잊게 되는 때가 있다. 이 이야기 속의 슌페이 역시 그랬다. 슌페이와 교코 사이에 위기가 닥쳤을 때이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만큼 균열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로도 표현할 수 있다. 그만큼 둘 사이에 아주 얇은 유리가 있어 깨질듯 말듯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부터 뭔가가 위태롭게 여겨졌다. 둘 사이에 높다란 벽이 생겼을 때, 슌페이가 정신없이 교코를 찾아다닐 때 그러다 문득 슌페이도 느낀다. 진정으로 찾던 게 무언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보고 싶다.”는 한 마디.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하고 사고 저편에 묻힌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안정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보고 싶다.




  요시다 슈이치 덕분에 “보고 싶다”는 말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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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릿 - 한동원 장편소설 담쟁이 문고
한동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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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띠지의 위력이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글귀에 당장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 책이었다. 그리고 제목도 참 특이했고. 몇 번을 속으로 읊어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어 도대체 뭔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삐릿’의 의미? 책을 펼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배경은 좀 오래 전이다. 1980년대 정도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삐릿>의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 때만 해도 밴드를 ‘딴따라’라고 불렀었나보다. 표지에서 조금은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고등학생들의 음악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거기에 아이들의 우정과 배신, 사랑과 정열, 의지 등이 더해져 있었다.




  주인공 백동광.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배정받는 데에서부터 험난함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정도고등학교에 배정받고만 동광은 비행청소년은 아니었지만, 다소 불량스러운 머리스타일과 약간은 껄렁한 옷차림으로 입학하자마자 선도부의 타깃이 된다. 빡빡머리를 80년 전통으로 지켜오고 있던 정도고등학교에서 동광은 용납 받지 못함 그 자체였다. 결국 몰매를 맞고서야 정도고등학교에 맞는 고등학생으로 머리카락도 자르고 옷차림도 단정히 한다. 앞으로 어떡하나 막막한 동광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긴다. 장발을 자존심만큼이나 중히 여기는 전자악기부 아이들이다. 동광도 꼭 밴드부에 들어가 베이스를 치고 싶었다.




   한편 학교 내에서는 권력다툼 아닌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용히. 교감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선생님들과 음악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변화를 일으키는 이들로 나누어져 그들은 조용히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선생님들끼리의 갈등, 선도부와 학생들과의 갈등, 딴따라라면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갈등. 수많은 갈등의 파도 속에서 동광은 친구 양수은과 함께 열심히 기타 치는 것을 연습한다. 첫 번째 이유라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좋아하는 친구 아연이가 될 것이고, 두 번째 이유라면 그저 음악이 좋아서. 그런 동광에게 수은은 동갑이면서도 기타 선생님이자 인생 선배 같은, 어른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어려서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수은은 음악의 길이라는 게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얼마나 위험 요소가 많은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 기타에 대한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미련 없이 살아간다. 어느 날 전자악기부 친구의 추천으로 고등학교 ‘딴따라’ 페스티벌에서 동광과 수은은 ‘소리나 밴드’라는 이름으로 참가하게 된다. 수면 아래에 깔린 약간은 무서운 음모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엘피판, 카세트 라디오, 쉴 틈 없는 체벌, 막나가는 선도부 등 정말 아주 오래전이나 있었음직한 일들과 물건들이 마구 등장한다. 그리고 지금 어른들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수은과 동광에 대한 약간은 열린 결말 덕분에 앞으로의 그들이 어디로 나아갈지 정말 궁금해진다.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아련한 추억 속으로 잠기기에 안성맞춤인 책이고, 그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는 음악이 딴따라로 인식되던 시절의 이야기를 읽는 데 흥미를 두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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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라이크 헤븐
마르크 레비 지음, 김운비 옮김, 권신아 그림 / 열림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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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영화로 <저스트 라이크 헤븐>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배우들의 연기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은데, 특히 리즈 위더스푼이 귀엽다는 생각을 처음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책으로 다시 만나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로맨틱한 로렌과 아더의 사랑. 표지에서 느껴지는 것만큼이나 정말 아름다운 동화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잘나가는 한 건축가의 집 옷장 속에 ‘존재하고’ 있던 한 여인. 아더는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정말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고 만다. 그런데다가 무단으로 남의 집에 침입해 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신이 보이냐니. 그러고는 나갈 생각은커녕 얼토당토 않는 말로 남자를 설득시키려고만 한다. 자신은 영혼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진짜 몸은 병원에 안락사 되기 직전의 상태로 눕혀 있다고. 당신 눈에 내가 보인다는 사실이 나도 신기하다고. 정신이상자 아냐? 이따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을 한껏 놀란 상태의 남자에게 설명하려니 그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운명이란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까? 아더는 몇 차례의 의심과 자기 자신과의 짧은 싸움 끝에 로렌의 말을 믿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둔 채 로렌의 안락사를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둘도 없는 ‘절친’의 도움을 받아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범죄 아닌 범죄를 저질러가며 그녀의 육체를 빼돌리고 둘은 그렇게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누어간다. 인적도 드문 한적한 곳에 둘만이 항상 함께하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마치 환상 같은 시간들이 그렇게 흘러간다. 인간과 영혼의 사랑이란 게 이렇게 로맨틱하게 그려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한편 아더는 로렌을 만나면서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어머니의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을 두고 홀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던 어머니를 그리며 닫아두었던 상자를 열고 접어두었던 편지들을 펼쳐본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를 어머니 자체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듯이 아더에게도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비워내고 나니 아더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를 눈앞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창 행복이라는 감정을 만낄할 때, 그러나 로렌은 마음이 무겁다. 아더의 헌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를 사랑했기에 더는 그를 붙잡아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더와 로렌의 꿈같았던 시간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간다. 아더는 로렌을 잃고 예전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로렌이 아더의 인생에 등장했을 때보다도 더 아더는 망가져간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져가는 아더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로렌이다. 아마도 둘은 천생연분인 것 같다.




  로렌이 아더와의 사랑을, 추억을,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아더가 로렌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 영원토록 둘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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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머의 루머의 루머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5
제이 아셰르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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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것들을 남겨준 책이었다.




  ‘루머’하면 일단 연예인이 떠오른다. 그만큼 연예인들은 루머에 민감하고,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도 아닌데, 루머는 그 당사자를 끈질기게 쫓아다닌다. 요즘엔 ‘아니 뗀 굴뚝에서도 연기가’ 심하게 피어오른다. 생명력이 짧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해서는 포기할 줄 모르는 것도 있고, 별일 아닌 듯 넘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끔찍이도 충격적이어서 큰 타격을 입히고 마는 것도 있다. 어찌되었든 모든 루머가 당사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루머만의 또 다른 특징.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사실이다. 점점 겉잡기 힘들어지고 이제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면 선택은 가히 절망적이다. 이 책의 주인공 해나 베이커가 결국 루머를 못 이기고 자살을 선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 클레이 집으로 택배가 배송된다. 이제 시작이다. 뭔가 하고 열어보니 카세트테이프 7개. 호기심에 재생 버튼을 누른다. 거기에서 2주 전에 자살한 해나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클레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한밤중에 거기에다가 혼자 있을 때 이 테이프를 듣는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본질은 그게 아니니까. 클레이는 점점 해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 루머 속에 감추어진 ‘진짜의 모습’을 알기 위해 말이다. 해나는 자신을 자살로 내몬, 혹은 자신의 자살과 관계있는 열세 명을 리스트로 만들고 그들을 하나하나 테이프 속에 담아 놓는다. 만약 해나가 테이프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 모든 것이 진실을 가장한 뜬소문으로만 남았을 것이고, 모두가 그렇게만 기억했을 것이다. 아니, 기억에서 일찌감치 지워져 버릴지도. 그리고 그녀의 죽음마저 무성한 루머만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나는 모든 것의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그것만이 죽음의 목적이라고 생각한 듯이.




  테이프에 녹음된 해나의 음성은 과거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클레이가 워크맨을 통해 그것을 듣고 있다. 해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클레이는 반응을 보이며 대화한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해나가 죽기 전에 녹음 된 테이프와 현재의 클레이가 서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마치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혹시라도 자신이 해나의 죽음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쳤을까봐 조마조마해 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리스트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데서 나도 무언가 복받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물론 해나만큼은 클레이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러니까 이 학교에 다닌 뒤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었어... 진심으로 믿었던 두 사람은 등을 돌렸지.”라고 말했던 해나의 목소리에서 정말 절실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이 책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우리 현실과 닿아 있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해나의 리스트’들에 우리 각각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머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루머의 의도가 그러하지 않더라도 당사자에게는 무엇보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는 것이다. 루머의 유포자나 유통자들이 기억조차 잘하지 못함에도 당사자는 끝까지 그 기억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루머다. 우리는 항상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그게 아니면 누군가 진정으로 절실하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는 않는지. 누군가 열심히 도움을 요청하는 표지를 남기고 있지는 않는지. 당분간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이런, 시험기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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