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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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해가는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학대’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가끔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어린아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를 가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비춰질 때가 있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학대’라는 행위를 통해, 어린아이의 정서적, 육체적 안정이 깨진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워낙에 수많은 매체에서 그러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아이들의 모습을 비춰냈으며, 사람들의 공감대와 경악 등의 감정들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읽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아이에게 학대를 가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아이가 아이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미 시선이 삐뚫어져 버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는, 삐뚫어진 만큼 어긋나 보일 것이다. 깨진 렌즈로 바라보았을 때, 세상이 깨져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표제작인 <저지대>에서 그려내는 생활상 자체가 어두운 것일 수도 있지만, 훗날, 이 아이가 자라났을 때, 바라보는 세계가 과연 제대로 된 유년기를 거쳐 성장한 어른들의 시선일지, 의문이 들었다.


어릴 적, 내가 부모님에게 맞았던 기억은 몇 번 되지 않는다. 게다가 크나큰 잘못이 아닌, 말 그대로 이유 없이 체벌을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는데도 나는 매번 부모님께 혼이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내게 이유 없이 체벌이나 폭력을 가하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폭력과는 그래도 조금은 거리가 먼 아이도 이 정도인데, 그런 폭력에 익숙해진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 유년기에 받은 폭력과 체벌 등을 <저지대>의 표제작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저 어른들에게 이유없이 뺨을 맞고, 머리를 맞고 할 뿐이다. 그저 그럴 뿐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우중충한 풍경묘사로, 할머니와 엄마, 아빠의 이야기로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무엇 때문일까. 중편 분량인 <저지대>와 꽤 여러 편의 짧은 콩트 식의 이야기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식을 갖춘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불쾌함을 느꼈다. 몇 번을 같은 문장을 되짚어서 읽어보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힘들다, 하고 느낀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집중을 하고 읽어나가려 해도 중간에 툭툭 끊기는 흐름들이 계속해서 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이 책을 접하기 전부터, 호불호가 극렬하게 갈린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너무 정형화된 형식만 읽다보니, 그런 것에만 길들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읽으면서 벅찼던 소설이다. 문장들이 시적이긴 하지만, 어딘지 걸리면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장면전환이나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도 모호하게만 받아들여졌다. 또한 여러 가지 이미지 들이 중첩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러모로 모호하다는 생각이, <저지대>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많이, 오랫동안 느꼈던 점이다.


시적인 문장이 가지는 힘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의 장르가 그러하듯, 함축성을 가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 <저지대>는 완벽하게 미(美)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런 시적인 문장에 익숙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일부의 독자들에게는 버겁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 시적인 문장이 가지는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에게는 특히나 그렇다. 구구절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완벽하게 풀어내진 형식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 함축성을 가지는 이야기들은 읽기에, 또 따라가기에 버겁기만 느껴진다.


<저지대>는 분명 그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표제작 <저지대>뿐만 아니라, 짧은 콩트 형식의 소설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것을 함축성,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함축성. 그것이 특별하게 작용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는 조금 맞지 않는, 너무 정형화된 나에게 너무도 벅차게만 느껴졌던 작품이다. 그렇지만 읽어 가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해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로 헤르타 뮐러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의, 작품들의 변천사를 기회가 된다면 한 번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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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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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라는 단어와 시기가 가리키는 것이 아직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아직 그 ‘유년기’를 지나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을 나누어본다면, 지금 나는 ‘유년기’의 후반부를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유년기가 비록 마냥 밝고 명랑하고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름의 희로애락을 느꼈고, 그러면서 새롭게 깨닫고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간이었다. 나에게 유년은 아직도 진행형이면서도 조금은 멀게 느껴진다.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나온 유년기로 흘러들어가는 구조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어수룩한 화자’와는 정반대로 진행이 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진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악하다고나 해야 할까.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이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진희는 모두 다 꿰차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분리할 줄도 안다. 바라보는 나와, 보여 지는 나로 분리하는 진희의 능력은 이제껏 어린 아이가 화자였던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조였다. 그래서일까. <새의 선물>을 읽으면서 그 어느 화자보다도 냉철하게 사건에 개입하여 서사가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시점인데도 섬세하고도 정확한 심리 묘사나,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온 버스를 타고 떠날까 말까 고민하던 광진테라 아줌마에 대한 묘사, 자신의 첫사랑인 허석에 대한 묘사 등등이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치밀하면서도 냉철했다.


내가 열 두 살이었을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 오학년에 재학했을 것이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친하게 지냈을 것이고, 또 때로는 싸우기도 했을 것이고, 또 어느 때는 말하길 좋아하는 친구들에 의해 처참히 뭉개졌을 수도 있다. 그 당시 나는 내 자신이 내 또래 보다 조금은 성숙하다고, 줄곧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행동을 하곤 했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때의 나는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았고, 큰일에도 상처를 받았지만, 어른이라면 그런 것들을 견뎌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시달리곤 했었다. 내가 상처받은 것을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써 나만의 방법을 구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런 나의 행동들이 친구들 눈에는 그대로 투과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고, 어른이 되고자 했으며, 왜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성숙하다고 생각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분명이 열 두 살이었을 때의 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아니었던 듯,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와 진희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나는 상처를 받았으며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포장했지만, 진희는 상처를 받으려고 할 때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자신을 분리시켰다.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새의 선물>의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했던 점이다. 나는 왜 진희처럼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뚜렷한 대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그때의 기억이 자세히 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때로 유년기에 대해 생각해볼 때면, 유년기란 잊혀지는 기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분명히 내가 지나온 길이지만, 너무 오래되어 발자국이 사라져버린, 그저 내가 지나왔다는 것만을 알려주듯, 현재의 지점과 연결되어 죽 나열된 길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처음 <새의 선물>을 집어 들었을 땐, 진도가 잘 나지 않았다. 언젠가 중반까지 읽고 덮어두었던 기억이 있었기에,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던 나는 분명 이번에도 쉽사리 책장이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책장은 보기보다 수월하게 넘어갔다. 그러면서 인물의 성격에 공감하면서도 때로는 반감을 표하곤 했다. 무엇보다 <새의 선물>텍스트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내 곁에도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인물들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친숙하면서도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얇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읽으면서 ‘캐릭터’가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느낌이 든 책이었다. 소설은 캐릭터가 끌어간다는 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막상 정말 그러한 경우는 찾기 매우 힘들다. 하지만 이 <새의 선물>은 말 그대로 인물들이 끌어간다는 점이 가장 부각된 텍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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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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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나에게 시위라는 ‘행위’아닌 ‘행위’는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운동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위나 데모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사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정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사상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바보처럼 듣기만 하는 존재이다. 그런 나에게 ‘운동’에 관한 책은 마지 빼곡한 한자로 가득한 책을 읽듯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류의 책이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의 <69>는 달랐다. 류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가 무척이나 경쾌했고 내가 쉽게 따라가며 호흡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과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경쾌하다. <69>를 읽으면서 든 기분이다. 모든 면에서 이 <69>라는 텍스트는 경쾌하다. 발랄함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말장난 비슷한 나열식의 문장도 그렇고, 주인공 인물인 ‘겐’,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마저도 경쾌하고 발랄하다. 의도한 게 분명하다, 고 생각할 정도로 텍스트 전반에는 경쾌함과 발랄함, 유머가 깃들어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이 당시 사회상을 그리기에 오히려 더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위험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처럼 데모와 운동권이라는 말들과 거리가 있는 세대들은 매일같이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데모하는 소리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소리 등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보았자 오히려 눈살만 찌푸려질 뿐이다, 라고 나는 단순히 생각한다. 물론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할 점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이 <69>는 그런 여타의 텍스트들과는 다르게 경쾌하고 밝게 가자, 하고 선언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사가 이루어진 점들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


남자 고등학생이라는 주인공 인물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드러낸 점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돌진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눈에 띄게 하려고 튀는 행동을 하는 등의 일들은 요새 신조어인 ‘중2병’이라는 단어와 맞물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습게보지만 그것이 현재의 ‘풍속도’ 아닌 ‘풍속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무라카미 류는 ‘자전소설’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주인공 인물인 ‘겐’을 사실적이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전부를 끌어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이 지나치게 경쾌하고 발랄하면, 소설의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는 그런 인물을 등장시키면서도 적절하게 당시의 상황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한 점이 이 <69>의 텍스트가 더 돋보이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두 마리 토끼를 휘어잡은 채 이야기를 끌어가고 또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부분과, 경쾌함과 즐거움을 전달해야할 부분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 <69>의 텍스트를 보면서 나는 완벽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한 부분에만 치우쳐 가는 소설이 아닌 말 그대로, 제목 그대로 1969년의 시대상을 정확히 텍스트 안에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유쾌하게 재미난 소설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소설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동안은 일본 소설들을 조금은 멀리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볍게 흐르거나, 또는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사소한 일로 이끌어 가면서 밋밋한 맛을 건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 문학, 일본 소설이 가진 ‘맛’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내 일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사소설’이라는 일본문학 장르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당분간은 일본 소설을 멀리하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유쾌함과 발랄함, 경쾌함과도 같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그러한 점들이 그리워지게 되었고, 오랜만에 붙잡은 책이 가장 유쾌함을 선사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하고 발라함, 경쾌함과 유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는 소설을 찾기란 힘들다. 물론 방대하게 쏟아지는 책들을 내가 일일이 다 읽어보지 못했기에 그러한 소설들이 또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소설 중에서는 <69>가 유일무이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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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들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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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 시간을 들여서 책을 읽는 경우가 있다. 이번 경우가 그랬다. 이 책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치이는 시간들이 많았던 시기였기에 아쉽게도 이 책이 매번 뒤로 밀려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든 일들을 해결 한 뒤에 다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읽었던 부분을 떠올리며 남은 부분들을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빨리 읽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장들이 무척이나 리드미컬했고, 빠르게 읽혔기 때문이다. 조금은 생소한 이름인 하재영 작가의 <달팽이들>이 그러했다.


<달팽이들>에 수록된 8편의 단편들은 모두 현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제일 먼저 수록된 <같이 밥 먹을래요?>같은 단편은 그 소재에 있어서부터 현대적이다. 같이 밥을 먹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 80년대 90년대 소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소재다. 뿐만 아니다. 8편의 단편을 하나로 이루는 하재영 작가의 문장은 말 그대로 단문이면서 스피드 있고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해 나가는 현대적 감각이 있다. 그래서인지 늘어지는 부분도 없이 빠르게 읽힌다. 하지만 중간중간 이것은 이러하다, 하는 식의 정의 내리는 문장들이 몇 보이기도 했다. 보여주기 보다는 말해주는 식이었다. 문장에 대해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하재영 작가가 마냥 현대적이지만은 또 않다. <씽크로나이즈드>에서는 열쇠수리공이, <타인들의 타인ㅡ17세>에서는 과거 무용을 전공했지만 이제는 먹기만 하는 십대의 아이가, <타인들의 타인ㅡ18세>에서는 학교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무리들의 대한 이야기, 그리고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가장 먼 길>에서는 우리 문학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방을 구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 안에 든 내용들은 다르지만 말이다. <달팽이들>은 현대적 감성과 과거, 우리들에게 향수를 일으키는 감성이 똬리를 틀듯 복잡하게 엮여 있다. 그래서 조금은 신파적이고 구세대 적인데?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현대적 감성이 등장하고, 너무 현대적인데? 하면 구세대 적, 조금은 식상해진 신파적인 감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부자연스럽지 않다. 너무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에 이야기들이 힘을 얻어 자연스럽게 이끌어지는 듯하다.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더욱이나 신인이나 가까운 신진작가들을 만나기란 무척이나 힘들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런 작가를 만났다. 바로 하재영 작가였다. 처음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이끌렸고, 수록된 작품들을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는 굳히기에 들어갔다. 발랄한 면이 있어 무척이나 좋았다. 마침 그 무렵 한 문장 한 문장 공을 들여 문장을 미학의 수준으로 이끌어내는 문학 텍스트를 몇 읽었다. 필요한 자료였기에 읽었던 텍스트들이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조금은 힘이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여 읽어나가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팽이들>을 읽을 때에는 힘이 들지 않았다. 좋지 않은 의미로 들릴 수도 있지만, 좋은 의미다. 한 문장씩 한 문장씩 집중을 요하기보다는 전체를 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들이 너무도 좋았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정의내리는 문장도 어느 부분에서는 좋게 작용한 점이 있다. 대부분 그런 식으로 정의 내리는 문장과 부분들은 텍스트에서 튀기 마련인데, <달팽이들>에 실린 단편들에서는 그런 점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문장이 가볍다는 말도 있었다.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다. 빠르게 읽힌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가볍게 보여진다는 말도 되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부정적인 면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야기들이 좀 더 와 닿는 면이 있었다. 묵직했다면, 문장들이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갔다면 지금의 이런 감정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감정들로 이 <달팽이들>을 접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좋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이 감정도 나쁘지 않은 나에게는 이런 점들이 더 좋게 느껴진다. 신진작가인 하재영 작가. 앞으로의 작품들이 기대되는 한편, 이미 출간된 <스캔들>이라는 장편소설도 기대된다. 빠른 시일 내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제목부터 남다른 <스캔들>에서는 어떠한 현대적 감성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 된다. 거기서도 이번 <달팽이들>에 수록된 것만큼이나 현대적 감성과 예전 감성들이 뒤얽힌,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가 드러났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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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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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중학교 때 한 친구에게 이끌려 내가 먼저 다가간 적이 있었다. 다른 반이였기에 쉬는 시간마다 찾아가 얘기를 나누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막상 같은 반이 되자, 그 친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친구가 되어 버렸다. 성격적으로 결국은 맞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그 친구와의 결별 이유이다. 물론 그 뒤로 그 친구는 끊임없이 내 속을 긁어놓았고, 그때마다 우리는 마찰을 일으켰다. 이제는 연락도 되지 않는다. 연락을 하려고 하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에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 와서 연락을 해서 무엇하리,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다시 만나도 똑같은 상황에 놓일 테고, 그러면 그 친구와 또다시 트러블을 일으킬 게 뻔하다. 어쩌면 그 친구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면으로 본다면 그것이 오히려 다행인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아멜리 노통브의 <앙테크리스타>에서도 블랑슈는 크리스타가 웃는 것을 보고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녀와 친해지게 되는 순간, 블랑슈에게는 지옥과 같은 일상이 펼쳐진다. 크리스타는 포플러처럼 블랑슈의 일상으로 들어와 눈 깜짝할 사이에 블랑슈를 둘러싼 모든 것을 점령해 나간다. 방을 시작해 가족들을, 그리고 책을 읽는 블랑슈의 시간마저도. 나는 <앙테크리스타>를 읽으면서 주인공 소녀인 블랑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당하고만 사는 블랑슈의 행동이 너무도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부모님조차도 크리스타에게 현혹되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크리스타와 둘이 있을 때에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반부에 블랑슈가 크리스타에게 한마디 하는 부분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블랑슈는 물론 그의 가족들 캐릭터들도 이해가가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딸보다 크리스타 라는 생면부지인 여자애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모든 게 들통 났을 때, 단지 남자친구가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크리스타를 싫어하게 되는 엄마의 캐릭터도 너무도 이해 불가능이었다. 만약 이 텍스트가 우리나라 작가가 썼다면, 분명히 많은 말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로 <앙테크리스타>가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프랑스 문학이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되지 않았나 싶었다.


아멜리 노통브 작가는 <적의 화장법>이후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아멜리 노통브 작가의 작품들이 주로 ‘적’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어진다는 점에서 볼 때 <앙테크리스타>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타라는 적을 통해 블랑슈가 겪는 일들을 보여준다. <적의 화장법>에서는 텍셀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다면, 이번에는 크리스타 라는 인물이 등장해, 앙테크리스타가 된다는 식이다.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나는 이 적이 무척이나 혐오스러웠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텍스트 내에서 크리스타를 완벽한 적으로 묘사해내기 때문도 있지만, 그저 혐오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독서는 뭔가를 대체하는 즐거움이 아니다.”(70p)


다른 많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만, 이 문장을 보면서 나의 독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블랑슈만큼이나 나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뭔가를 대체하는 즐거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독서라는 움직임, 활동 그 자체가 좋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블랑슈도 그렇지 않을까. 독서를 하면서 단 한 번도 무엇을 대신하여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의 한 가지 취미생활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앙테크리스타>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었다. 읽으면서 그 친구가 추천할 만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말 그 친구의 취향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앙테크리스타>를 보면서 내심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어쩌면 나는 블랑슈가 아닌 크리스타가 아닐까. 나는 블랑슈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친구가 생각할 때에는 크리스타로 비춰지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는 않았더라도, 심리적인 무언가로 어떤 친구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친구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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