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까. 나에게 시위라는 ‘행위’아닌 ‘행위’는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이다. 마찬가지로 ‘운동권’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나는 시위나 데모를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사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정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사상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바보처럼 듣기만 하는 존재이다. 그런 나에게 ‘운동’에 관한 책은 마지 빼곡한 한자로 가득한 책을 읽듯이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류의 책이다. 그런데 무라카미 류의 <69>는 달랐다. 류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가 무척이나 경쾌했고 내가 쉽게 따라가며 호흡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과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경쾌하다. <69>를 읽으면서 든 기분이다. 모든 면에서 이 <69>라는 텍스트는 경쾌하다. 발랄함도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말장난 비슷한 나열식의 문장도 그렇고, 주인공 인물인 ‘겐’,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마저도 경쾌하고 발랄하다. 의도한 게 분명하다, 고 생각할 정도로 텍스트 전반에는 경쾌함과 발랄함, 유머가 깃들어 있다. 나는 그런 것이 이 당시 사회상을 그리기에 오히려 더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위험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처럼 데모와 운동권이라는 말들과 거리가 있는 세대들은 매일같이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데모하는 소리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소리 등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보았자 오히려 눈살만 찌푸려질 뿐이다, 라고 나는 단순히 생각한다. 물론 사실적으로 그려내야 할 점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이 <69>는 그런 여타의 텍스트들과는 다르게 경쾌하고 밝게 가자, 하고 선언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사가 이루어진 점들이 더 좋게만 느껴졌다.


남자 고등학생이라는 주인공 인물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낱낱이 드러낸 점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허세부리기 좋아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돌진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눈에 띄게 하려고 튀는 행동을 하는 등의 일들은 요새 신조어인 ‘중2병’이라는 단어와 맞물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습게보지만 그것이 현재의 ‘풍속도’ 아닌 ‘풍속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무라카미 류는 ‘자전소설’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여 주인공 인물인 ‘겐’을 사실적이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전부를 끌어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이 지나치게 경쾌하고 발랄하면, 소설의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무라카미 류는 그런 인물을 등장시키면서도 적절하게 당시의 상황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한 점이 이 <69>의 텍스트가 더 돋보이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두 마리 토끼를 휘어잡은 채 이야기를 끌어가고 또 메시지를 전달해야할 부분과, 경쾌함과 즐거움을 전달해야할 부분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 <69>의 텍스트를 보면서 나는 완벽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한 부분에만 치우쳐 가는 소설이 아닌 말 그대로, 제목 그대로 1969년의 시대상을 정확히 텍스트 안에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유쾌하게 재미난 소설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소설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동안은 일본 소설들을 조금은 멀리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볍게 흐르거나, 또는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사소한 일로 이끌어 가면서 밋밋한 맛을 건네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 문학, 일본 소설이 가진 ‘맛’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내 일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사소설’이라는 일본문학 장르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당분간은 일본 소설을 멀리하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유쾌함과 발랄함, 경쾌함과도 같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그러한 점들이 그리워지게 되었고, 오랜만에 붙잡은 책이 가장 유쾌함을 선사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하고 발라함, 경쾌함과 유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는 소설을 찾기란 힘들다. 물론 방대하게 쏟아지는 책들을 내가 일일이 다 읽어보지 못했기에 그러한 소설들이 또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소설 중에서는 <69>가 유일무이하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