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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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천진난만한 십대가 있을까. 아무리 발랄하고 쾌활한 십대라 하더라도, 안으로 들어가면 제각기 어두운 사연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마치 가정사와 같다. 겉으로 보면 부족할 거 없이, 마냥 행복할 만한 가족인데, 그 창틀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고 바라보면, 곪을 대로 곪은. 그런 상황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십대들도 하나의 사회이다. 사회 안에서 갈등은 필수적인 존재이다. 십대들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견제하고, 멸시하고, 극단적으로까지는 ‘왕따’로 치닫게 되는 십대들의 상황. 이렇게 보면 마냥 십대들의 청춘의, 푸릇푸릇한 시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이렇듯 푸릇푸릇한 십대들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지 일그러지고 우중충한,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어두운 분위기로 이어진다. 마치 ‘진짜’ 십대들의 사회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내가 십대를 보내면서 느낀 것은, 온갖 색들이 다 있다는 것이었다. 푸릇한 색도 있었고, 어두운 색도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라들이 대개 그러하듯, 푸릇한 색보다는 어두운 색이 내 십대에 더 많았던 것 같았다. 언제나 좋은 일보다는 좋지 않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나는 법이니 말이다.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고, 좋은 일이 있을 때 앞에서는 웃으며 진심으로 축하해준 친구가 뒤에서는 나는 별로였는데, 라고 말하면서 나를 험담할 때, 나는 언제나 침울해지고 어두운 색 안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손톱이 자라날 때> 제일 앞에 수록된 <하얀 벽>에서 인물이 벽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대중매체와 일반인들의 시각에 비춰지는 십대들의 웃음, 우정, 환함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의 나는 조금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곧이어 수긍했다. 실제로는 그러니까 말이다.


요즘 들어 십대들의 어두운 면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 성폭행이라던가, 폭행, 집단 따돌림 같은 일들 말이다. 어찌 보면 그것들이 현실이다. 십대들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언제나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두려운 법이고, 인식을 바꾼다. 앞에서 말한 것과 조금은 어패가 있겠지만, 언젠가부터 십대들의 어두운 면이 자주 드러났고, 그럴 때마다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십대들의 발랄한 모습과 이질감이 생겨버렸다. 두 쪽도 십대들이었지만, 두 쪽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들임은 틀림없다. 표제작인 <손톱이 자라날 때>와 <하얀 벽>에서, 한 친구를 싫어 하지만, 그 친구와 같이 다니는 무리와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속으로 삭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십대들도 현실에서, 사회에서 자주 드러나는 ‘가면 쓰기’가 생겨났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호의를 표시하지만, 뒤돌아서는 순간, 악담을 퍼붓는 그런 현실이 말이다. 예전처럼 순박한 십대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들도 그렇다. 모두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아니다. 예쁘지만, 친구들에게 점점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나, 쌍둥이면서 한쪽 그늘에 늘 가려져 지내던 아이, 곰팡이가 스는 집으로 이사를 온 아이, 복제를 할 수 있는 아이 등등. 모두들 십대의 나이이긴 하지만, 더 이상 천진난만한, 마냥 동화 속 세상을 믿는 아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현실을 직시하는 그런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이야기들은 속도감 있게 펼쳐져 간다. 지체하지 않고 쭉쭉 뻗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주제의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점도 좋았다. 솔직히 공감 가는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이 더욱 많기도 하다. 사회 문제로 집단 따돌림이 흥행하긴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을 얻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십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들이 하나 같이 발랄했다는 점을 과감히 탈피했다는 점에서,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청소년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다. 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서 인 듯싶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읽으면서 조금 불편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내가 십대를 지나고 다른 세대로 접어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더 사회의 ‘가면 쓰기’가 일상처럼 이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 하는 일말의 생각을 가져볼 수 있었다. 지독하게 어두운 청소년 소설, 그 소설 안에서 다른 소설보다 조금 더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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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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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포함!!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있다. ‘나’이면서도 ‘나’가 아닌 자. 가끔은 내 자신도 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를 때가 있다. 하루 동안에도 무수히 많고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그 사건들에 대해 반응하는 내 자신이 꽤나 여러 가지다. 어떨 때에는 울기도 하고, 또 어떨 때에는 웃기도 하며, 또 어떨 때에는 화를 나거나 고함을 지르기도 하는 나 자신. 가끔은 내가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때도 있다. 이렇듯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나 자신이 있고, 나는 그런 또 다른 나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의아하게, 또는 신기하게 느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기억이란 것도 그렇다. 너무나 왜곡되기 쉬운 ‘기억’. 그런 기억을 과연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이 왜곡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의아한 나 자신으로 인해, 나는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그런 인물이 나온다. 결국은 ‘나’인 타자. 텍셀이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대체 텍셀이라는 인물이 왜 우리의 주인공인 앙귀스트를 괴롭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도 억지스러운 이유를 들 때에는 말이 되지 않다고 여겼으며, 이상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뒤로 갈수록, 이상하게 말이 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텍셀이 늘어놓는 궤변에 휘말린 것만 같았다. 비행기 연착이 된 상황에서 공항 한쪽에 앉아 책을 읽으려고 하던 우리의 주인공에게 다가와 느닷없이 말을 걸고, 궤변을 늘어놓는 이 간단한 상황에서, 나는 텍셀에 대응하기도 하고, 휘둘리기도 하면서 점점 더 빠져들게 되었다.


뒤에 역자가 이런 말을 했다. 황당함→역겨움→섬뜩함→충격. 나도 이와 비슷했다. 또 다시 역자가 말했듯이 일종의 철학 꽁트인 이 <적의 화장법>을 읽으면서, ‘텍셀’이라는 인물 때문에 내 감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이렇듯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을 여태까지 본적이 없었다. 결국은 또 다른 나였던 텍셀은, 계속해서 앙귀스트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을 하며, 그를 자극한다. 하지만 그는 앙귀스트에게만 보이는 존재였고, 다른 사람은 텍셀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텍셀이 앙귀스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는 텍셀이 앙귀스트 자신이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들 안에는 또 다른 우리가 살고 있어서 가끔씩 불리한 상황에 이르면 그때그때 맞는 자신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그랬던 기억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타인처럼 느껴지던 인물도 결국, 자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고 강간까지 한 인물이 결국은 자신이라는 상황을, 나라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 나라면 인정할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내 안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리고 그런 자신이 행한 일들을 말이다.


이 <적의 화장법>에서는 말 그대로, ‘적’인 텍셀이 매혹적인 구술로 우리들의 주인공을 끌어당긴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지 않았던, 엉뚱하게만 생각하던 독자들도 같이 끌어당긴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에 동조하게 만들고,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네?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적이라고 느끼게 하고, 자신을 죽여 달라는 허무맹랑한 부탁을 하지만, 그것도 결국 또 다른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면서 너희들 안에는 얼마나 다른, 또 얼마나 많은 너희들이 있냐, 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 인물에게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까.


텍스트의 절반은 대화로 서사가 이루어진다. 초반에는 텍셀의 황당무계한 궤변과 우리들의 주인공인 앙귀스트의 발언들로 이루어지고, 중반부에서는 두 사람과 연결된 ‘아내’의 이야기가, 후반부에는 두 사람의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읽는 사람의 기분도 같이 변형되어 간다. 조금씩 진실이 파헤쳐지면서 경악 감으로 말이다. 읽는 내내,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또 다른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들 나였는데, 때로 그 ‘나’에게 모멸감이나 실망감을 느끼던 나.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기 싫어 다른 나를 깎아내렸던 나. 아니, 그런데 원래의 ‘나’라는 존재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조차도 수많은 나 자신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적 또한 나 자신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제는 언제 드러날 줄 모를 ‘적’인 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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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라, 비둘기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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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대표적으로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선이냐 악이냐 하는 것은 가장 편하고, 또 가장 쉽게 나눌 수 있는, 이분법적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누어지면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예를 들어 선이더라도 어느 선이 더 선하냐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악도 마찬가지다. 어느 악이 더 악하냐고 따지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들은 가장 쉽게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고, 인물들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고 있다. 그런데 조금은 특별한 경우가 있다.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악인가? 선인가? 하는 인물들이 있다. <꺼져라, 비둘기>가 나에게 그랬다.


인물들은 분명히 선과 악으로 나누어진다. 김도언 작가도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선과 악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들을 쓰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악인으로 그려지기에는 인물들의 행동이 너무 궁상맞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선인도 마찬가지다. 악인들의 행동을 보며 저항하지 않고, 그저 고민하고 생각하는 정도의 선으로만 그쳐있다. 이러한 점들이 나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 겉으로만 보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 인물들이지만, 내밀하게 파고 들어가면 그렇지만은 않은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는 뭐랄까. 여타의 소설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이산은 씨름 선수였지만, 사고로 인해 운동을 그만두고 새엄마의 가게인 비둘기 해장국집 일을 돕고 있다. 그의 아버지인 순구도 거대한 체구로 인해 씨름선수였지만 매번 지기만 하는 씨름선수였고, 그의 처가 죽자, 곧바로 이산에게 새엄마를 들인다. 새엄마가 가게를 열어 끌어들이는 남자손님들에게 멸시를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남자다. 그리고 새엄마는 전형적인 악인으로 칭해진다. 재혼이긴 해도 버젓이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모텔을 드나들고, 이산에게 약을 먹이고, 일손인 실래를 쥐 잡듯 잡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 말이다. 이 가족을 중심으로 전반부가 이어지는데, 여기까지만 봐도 대체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분법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인물들에 한 가지 더 뻗어나가 시인인 영만과, 실래의 사랑이야기까지 이야기가 뻗어나가고, 그 과정에서도 새엄마와 마을에서 악의 축을 담당하는 남자 인물들, 그리고 비둘기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짜여 있다. 마치 호호 할머니가 비둘기들을 잡기 위해 뜨는 뜨개질처럼 이야기들도 그렇게 짜여 있다. 겉으로만 보면 정말 말 그대로 선과 악으로 대립되는 인물들이 각각의 축을 담당하고 나서는데, 텍스트를 읽다보면 특히 악인들이 너무도 악인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이산에게 약을 먹이고, 외간남자와 모텔을 드나드는 새엄마의 캐릭터조차도 말이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지만, 아직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것일까.


소설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분위기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오히려 이 <꺼져라, 비둘기>라는 내용에 더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야기가 너무 역동성을 가지고 굽이치듯 펼쳐졌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서사를 따라가느라 인물들의 생각과 인식들, 가치관 등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랬더라면 이 <꺼져라, 비둘기>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고, 인물들이 왜 이렇게 보이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만약 계산을 해 넣었다면, 김도언 작가가 정말 대단하도 생각된다. 소설을 쓰다보면 사소한 이야깃거리보다도 큰 서사나 이야기에 중점을 두기 마련인데, 이런 것들을 의도했다고 하면, 독자들이 말 그대로 이야기에 빠져들게, 인물들에 빠져들게 만든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마지막 결말부분이 조금은 황당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너무 급마무리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인물들이 자신들의 고민과 싸우면 읽는 입장에서 조금은 버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법도 했다. 이야기가 완전히 잘 여물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이 앞에서 말 한 것처럼 소설의 이야기를 극대화 시킨 것은 아니었나 싶다. 여백이 있으면서도 잘 짜인 소설을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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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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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 달 동안 여러 권의 책을 읽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일로 바쁜 일이 있어서였을까. 5월 달에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물론 그 중간 중간 다른 책들을 보기도 했지만,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중간까지 밖에 읽지 않거나 아니면 중간에 읽다 덮어놓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 편혜영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인 <아오이 가든>을 읽었다. 날씨가 제법 무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읽어나간 이 책은 읽는 내내 나에게 불편함과 모호함을 안겨주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책들 중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고 도대체 뭐지? 하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 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편혜영 작가와는 조금은 상반된, 아니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더 하드코어적인 면이 있었던 책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읽는 내내 너무 불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은 기분에 휩싸인 것 같았다. 도저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면서 눈이 그저 활자만을 쫒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인상에 박히는 부분들이 단편적으로나마 있었다. 예를 들어 개구리를 낳는다거나, 해부하는 모습을 바라본다거나, 시체가 떠오른다거나, 아니면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시체의 일부분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곳으로 찾아가는 사람이라던지 하는 각각의 요소들이 읽으면서 너무 섬뜩하면서도 모호한 인상들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완전하게 이어졌을 때, 그것들의 이미지들이 너무나 그로테스크하거나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영상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읽으면서 거부감도 사실 있었다. 때마침 이 책을 처음 펼쳤던 날이 습도로 무척이나 고생하던 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을 읽다보니 너무 답답하고 끈적거리는 무언가에 뒤덮인 기분이 들었다.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을 꼽자면,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분명 다른 이야기들이 진행되는데, 읽다보면 하나의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이미지와 비슷한 분위기, 그리고 비슷비슷한 소재, 이를 테면 죽음이라던가, 아니면 시체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한 작품 걸러 한 작품씩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 한 편의 단편을 꼽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그래도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았던 것은 맨 마지막에 수록된 <시체들>이었다. 아내가 죽고, 아내의 시체의 부분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곳으로 가 확인 하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맨 마지막에 실려 있다 보니, 앞에서 읽으면서 기운이 빠지고, 조금은 섬뜩한 기분에서 읽었는데 그래도 이 <아오이 가든>의 마지막을 잘 장식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 남자 또한 아내와 같은 결과를 맞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인상에 깊게 남았다. 그리고 <누가 올 아메리칸 걸을 죽였나>하는 단편도 흥미가 갔다. 조금은 빠른 결말이지 않았나, 싶은 생각과, 여자와의 갈등 상황이 너무나 다급하게 이루어졌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전반적인 이야기 틀을 놓고 봤을 때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단편이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만국 박람회>도 눈길이 갔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개와 싸우는 장면이 인상에 가장 깊게 남았다. 조금은 특별한 우편물을 배달하는 이야기의 <서쪽 숲>도 관심 있게 읽었다. 그런데 결말부분이 뭐랄까, 나에게는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졌다. 의외로 표제작인 <아오이 가든>이 나는 읽으면서 가장 모호했던 것 같다. 대개는 표제작이 인상에 깊게 남는 편인데, 이번은 조금 예외였던 듯싶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내가 가진 의문들을 해설을 읽으면서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해설에서조차도 명쾌한 답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더 모호하다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어둡고 칙칙한, 음침하고 불쾌한, 노골적이면서 은폐적인, 이라고 이 책을 정의내리라면 내릴 수 있겠다. 앞에서도 계속 말했듯이 정말 읽으면서 안개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편혜영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라면 정말 완벽히 적중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나온 단편들은 이 <아오이 가든>에 실린 단편들 보다는 조금은 뚜렷하고 정적이라고 하니, 그 작품들도 이어서 읽어보고 싶다. 첫 만남 치고는 조금은 불쾌함이 남아 있던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편혜영, 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대부분 그로테스크함을 뽑으면 <바늘>의 천운영 작가를 뽑는데, 내 생각에는 오히려 편혜영 작가가 그쪽에 맞지 않나 싶다. 이 작품들의 분위기처럼 조금은 불쾌했지만 다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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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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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쁜 오월이기에, 아무래도 진지하게 읽을 책보다는 조금은 쉽게 재미나게 읽을 책을 선택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일본 소설을 읽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문득 책장에서 정한아 작가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 작가가 단순히 재미나고 쉽게 쓴다는 말은 아니다. 언젠가 이 책에서 몇 편의 단편을 무슨 일로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스피드 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고, 주제의식도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당장에 이 책을 빼들어 읽었다.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또 일괄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물론 이야기가 다르지만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좋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이 다 거기서 거기 같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나를 위해 웃다>에서는 오히려 플러스적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괄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바로 스피드 있게 읽힌다는 점이었고, 그만큼 이야기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표제작인 <나를 위해 웃다>에서는 계속해서 키가 자라는 엄마가 나온다. 엄마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인데, 읽으면서 조금은 참담함을 느꼈다. 소설은 내가 읽었을 때에는 경쾌하게 전개되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새침 떼면서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안을 들여다보면 너무도 어두운 면들이 숨어들어 있어 보면서 불편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더 그런 점이 부각되어 나에게 다가왔던 듯싶다. 엄마를 성폭행한 남자 중학생들이 누군가에 아들이 되고, 또 누군가에 남편이 되고, 또 누군가의 아빠가 된다는 말을 보면서, 뭔지 모를 분노와 슬픔이 느껴졌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안 좋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마테의 맛>에서는 강도들에게 죽음을 당한 동생의 유골로 목걸이를 만든, 여자가 등장한다. 이야기가 참 단순하면서도 읽는 내내 여운을 남겼던 작품이었다.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전부인의 아이를 맡아 키우게 되는 여자가 있고, 주변에서 여자에게 그런 애는 애물단지라며 친척들에게 맡기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에 여자는 아이를 보내게 되지만, 다시 아이를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점들이 뭐랄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를 위해 웃다>에서는 다양한 공간과 인물들이 나온다. 어느 소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게는 유독 이 <나를 위해 웃다>에서 나오는 장치적인 것들이 새삼 좋게 느껴졌다. ‘키부츠’라는 공간이 나오는 <첼로 농장>과, 아르헨티나가 등장하는 <마테의 맛>, 할머니를 사랑해서 할머니가 혼수품으로 의자를 만들어준 남자, 매춘부 일을 하는 여자 <아프리카> 등등. 다양한 공간과 다양한 사연들을 가진 인물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각각의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점이 신선하면서도 놀라웠다. 그리고 이야기들이 하나 같이 완벽하게 짜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것도 모든 소설들이 그렇지만 말이다. 이야기들이 이렇게 짜야 있으면서도 읽는데 막히지 않고 물처럼 읽힌다는 점은 정한아 작가가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된다.


<나를 위해 웃다>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소설 안으로 들어와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물론 사회 이면이라지만, 이미 드러날 대로 다 들어나 이제는 너무도 비일비재해진 일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일들이 소설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한 인물의 성격을 이루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는 점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들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은 결국 우리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듯 소설에서도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인물들의 성격이 변하고, 다른 인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데,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은 또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소설이라고 다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은 또 하나의 세계이고, 세계라면 어디든지 갈등과 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그것들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소설이라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우리들을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현실이 아닐까 싶다. 정한아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좋았다. 그냥 좋은게 아니라 매우 좋았다.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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