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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존 르 카레'는 오래전 '러시아 하우스'라는 책으로 첫인연을 맺었는데, 돌이켜보니 벌써 20년전 일이다. 1989년도에 발표된 책이 곧바로 다음해인 90년에 국내에 번역소개되었으니, 생소한 작가의 작품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물론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숀 코네리'와 '미쉘 파이퍼'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로 제작중이었고, 당연히 국내에도 개봉될 예정이라는 엄청난 프리미엄 때문이었다. 당시 '김영사'라는 출판사는 거물작가 '시드니 셀던'의 초히트작들과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 등, 막강한 대박아이템들을 줄줄이 쏟아내며 발빠른 행보를 자랑했고, 그러한 분위기이다보니 작가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도 믿고 구매를 했던 것 같다.
1990년 초판발행된 책이 나오자마자 샀던 걸로 기억하니까, 대학 다닐때였던 모양이다. 머리가 한참 총명할 때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부푼 기대감에 읽기 시작한 책은 이상하게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초반부를 읽고있음에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추상화를 보는듯 종잡을 수 없는 대사들과 상황의 지루함은, 제아무리 좋아하는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았다해도 도저히 극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 책 '러시아 하우스'는 3분의 1도 읽지못한채 책장으로 들어간뒤, 언젠가 다시한번 읽어야지 하다가 이렇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이 봉인되었던 셈이다. 물론 영화도 보는 것을 포기했다.
최근 '게리 올드만' 주연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개봉되었다. 영화감독 박찬욱씨도 르 카레의 소설들 중에서는 특별히 이 작품을 추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요즘 출판계는 고전과 최신작을 막론하고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 같다. 르 카레와의 그 끔찍한 첫만남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를 통해 재회를 해볼까 생각했던 것도 다름아닌 영화때문이니...
하지만 '프레드릭 포사이드'하면 '자칼의 날'이듯, '존 르 카레'하면 역시 '추운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오직 이 한작품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을 빼놓고 다른 작품을 먼저 읽는 것은 아무래도 순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책 역시 꽤 오래전에 사놓고도 차일피일하다 책장속에 잠자고 있던 차에, 뒤늦게나마 잘못된 인연을 바로잡는다는 묘한 기분과 함께 르 카레와 20년만의 재회를 시작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60년을 전후하고 있는데, 1963년도에 책이 발표되었으니 작품 속의 시대상이 실제와 거의 비슷한 모습이라 보면 될 듯하다. 2차대전후 동서로 나뉜 독일과, 소련을 위시한 주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그리고 끝없는 냉전... 당시의 이런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기는 힘들것 같다.
스파이... 도대체 스파이란 어떤 존재일까... 스파이소설의 대가라 칭송되는 르 카레가 펼쳐보이는 그들의 세계는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제임스 본드처럼 폼나는 마티니 한잔의 여유도 없었고, 스릴넘치는 자동차 추격전도 없었으며, 격렬한 액션과 총격전도 없었다. 그저 우리 일반 소시민과 다를바 없는 한낱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
정부와 조직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스파이의 삶은 결코 드라마틱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를 속이고, 정보를 팔아먹고, 색출하고, 숨고, 도망다니는 재미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국가와 이념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속에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소모될 뿐인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착찹하고 복잡한 뒷맛을 안겨준다. 오늘날 이렇게 평화롭게 잘사는 독일이 왜 그때는 분단되어 서로를 죽이고 감시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던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왜 수많은 사람들이 히틀러 한명의 의지를 꺽지 못했을까...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인간들은 도대체 왜 전쟁을 하려했던가... 이 작품에는 이러한 근원적인 의문을 품게만드는 힘이 있다. 르 카레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책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20년전의 '러시아 하우스'가 왜 그렇게 지루하고 어려웠는지 이해를 하게되었다. 이 책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이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드는 르 카레만의 독특한 서술방식이 데자뷰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연륜이란걸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천천히 곱씹으며 읽을 정도의 인내심은 쌓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속에 들어있는 내용의 정보량이 엄청나게 압축되어 있어서, 정신차리고 읽지않으면 금새 갈팡질팡 하게된다. 그렇지만 중반부로 넘어가면 흩어져있던 조각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후반부에 무서운 속도로 몰아치는 극적 긴장감을 만끽할 수가 있다. 책을 덮고나서야 앞부분의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자잘한 일상사와 장황한 대화들이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장치였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라는 원제에서 'the Cold'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과연 한글제명처럼 '추운나라'라면 과연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지... 베를린장벽 너머의 동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의 소련까지 아우르는 것인가... 혹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버린 사람들의 '한없이 춥고 쓸쓸한 마음'은 아닐런지...
<사족>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시리즈로 유명한 인문, 문학문야의 스타번역가 '김석희'씨가 번역을 맡고있어, 읽는 내내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번역가가 달라서 살짝 고민이 된다.
2. 이 작품도 곧바로 영화화되었고, 영국의 명배우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리처드 버튼'이야 워낙 잘 아는 배우라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얼굴을 오버랩시켜보기도 했다. 원작에서 묘사한 주인공에 비해 너무 잘 생긴게 흠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