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트 블랑슈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제프리 디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뿔(웅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어릴적 우연히 읽어보았던 한 권의 책은, 책표지나 심지어 정확한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세부적인 내용이 떠오를 만큼 그 느낌이 생생하다. 세명의 장님들이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으로 암살을 행하는 충격적인 도입부를 비롯하여 해변가, 섬, 아름다운 여인, 거대한 문어와의 사투, 그리고 불을 뿜는 용의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액션씬들의 연속... 그 당시 '애거서 크리스티'나 'S.S. 반다인' 등의 추리물에 익숙해있던 내겐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책이 007시리즈의 첫번째 영화 '살인번호(Dr. NO)'의 원작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링컨 라임'시리즈로 이미 커다란 영역을 확보하고있는 제프리 디버가 난데없이 007을 들고왔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와 어떤 인연이 있는 지는 잘 모르지만, 저작권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을터인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제임스 본드를 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카르트 블랑슈... 전권을 부여받은 백지위임장을 뜻하는 제목의 이 작품은 이안 플레밍의 원작보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와 가깝다. 곳곳에서 그가 가진 007시리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특히 '유어 아이즈 온리'와 같은 대사는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라 보아도 좋을 것 같은 재치가 엿보인다.

이안 플레밍의 007시리즈는 '영국'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영화에서도 이것을 중요하게 고수해 왔으며, (비록 95년 피어스 브로스넌과 BMW의 등장으로 그 정통성이 깨어지게 되었지만) 제임스 본드는 언제나 영국출신의 배우여야 하며 본드카 역시 영국산 애스턴 마틴이나 로터스사의 모델로 할 것 등을 원칙으로 여겨왔다. 본드걸과 본드카, 그리고 세계정복 수준의 배포 큰 스케일을 소유한 악당 등이 필수요소인 007시리즈는 적어도 서너곳 이상의 세계무대를 오가는 모험과 멋진 슈트, 비밀무기, 또는 젓지않고 흔든 마티니 한 잔 따위의 추가요소들이 거의 인장처럼 작용을 한다.

제프리 디버도 이러한 시리즈의 고유한 요소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살짝 비틀거나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려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디버의 이 작품에는 옷과 술, 음식, 자동차 등 수많은 소품들의 메이커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벤틀리를 본드카로 채택한 것은 개인적인 취양인듯 하다. 디버가 미국작가임을 고려하면 영국이라는 배경과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이 작품을 쓰기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자료조사가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작가의 시리즈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과는 별개로, 이 작품의 완성도는 살짝 아쉬움을 남긴다. 디버의 작품들을 비교적 많이 접해서인지 그가 구사하는 플롯과 패턴들에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남겨진 자들'에서도 보여졌던 반복되는 페이크씬은 여기서도 줄기차게 등장한다. 상대 무리들이 미행하던 본드를 교묘하게 따돌리는 장면이 나오면, 곧바로 다음씬에서 따돌렸던 사람이 본드가 아니고 이것을 미리 예측한 본드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속인 것이라는 식이다. 속고 속이는 예측불허의 두뇌게임임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런 패턴이 너무나 계속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결국 이것은 주인공에게 위기상황이 와도 또 페이크겠지 하게되는 긴장감 상실을 가져오고 만다. 물론 이 작품은 이안 플레밍의 007이 아닌 제프리 디버의 007인 관계로 디버스럽다고 미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 그의 소설에서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이러한 페이크씬들은 뻔히 다음 장면이 예측되다보니 식상한 느낌마저 안겨주는게 사실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까지 거쳐오면서 007시리즈의 색깔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의 본드시절은 적어도 낭만이란 것이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서, 그 시절의 여유와 유머감각은 사라지고 거친액션만 남은 지금은 한없이 옛 시절을 그립게 만든다.

<사족>
1. 그가 이 작품을 기획하면서 영화화를 심각하게 염두해 두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인지도를 고려하면 영화제작사 측에서도 분명 긍정적인 검토를 하고 있거나 이미 했으리라 생각된다.

2.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협력자 '르네 마티스'와 미국 CIA의 '펠릭스 라이터'라는 캐릭터는 모두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데뷔작 '카지노 로얄'에도 나오는 인물이어서 흥미롭다. 이들이 이안 플레밍의 소설에도 등장했던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영화 '카지노 로얄'에 등장했던 르네 마티스와 펠릭스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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