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레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오래전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존 그리샴', 또는 '토머스 해리스'의 신작들이 나오면, 득달같이 서점으로 달려가 설레는 마음으로 사서 읽곤 했더랬다. 활기찬 젊은 시절이었던만큼 소위 필이 꽂히는 작가를 만났을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는 이런 기분을 즐기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한때 우상이었던 작가들은 작고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진 쇠락한 필력으로 실망감만 더해주고, 새롭게 접하는 작가들도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저그런 범작들만 쏟아내고 있으니, 특정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열혈팬의 마음도 그저 추억거리의 한자락이 되고만 것이다.

그러던차에 우연찮게 '늑대의 제국'이라는 작품을 접하면서, 그 참신하고 특이한 매력에 반해 한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는데... 다음으로 읽게된 '검은 선'이 그야말로 꺼져가던 팬심에 새롭고 강력한 불을 지핀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누구인가... 그것이 궁금하여 데뷔작 '황새'부터 '크림슨 리버', '돌의 집회'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은 몽땅 사들여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황새'는 번역의 차이점을 느껴보고자 오래전에 절판된 책을 기어이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중복구매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중학생때 '애거서 크리스티'의 거의 전작품을 섭렵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추리, 스릴러소설들을 접해온 나에게 그랑제는 현재 유일하게 100% 신뢰하는 작가가 되었다. 거기에는 '늑대의 제국'과 '검은 선'의 번역을 맡은 '이세욱'씨의 역할도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최고의 작가에 최고의 번역가... 팬에게 더 이상의 축복은 없다.

'검은 선' 이후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 혹시나 번역가가 바뀌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는데, 역시 지성이면 감천인 모양이다. 난생처음 예약구매라는 법석까지 떨어가며 드디어 따끈따끈한 신작을 받아들었다. 본작 '미세레레'는 2008년작이다. 시기적으로 2007년작인 '림보의 서약'이 먼저 나와야 순서가 맞는데, 아무래도 출판사의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오래 기다린만큼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려고 한 탓에, 첫페이지를 펼친지 거의 닷새만에 완독을 했다. 책을 덮고 한동안 묵직한 여운에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라는 말 밖에 안나온다. 소재의 독창성, 전체를 아우르는 구성, 절묘한 컷전환, 방대한 자료조사, 캐릭터, 디테일... 어느 하나 헛점이 없다. 가랑비에 옷젖듯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누적되던 서스펜스는 후반부에 가서 거의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정말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을 정도다.

'크림슨 리버'와 '늑대의 제국'에서 선보였던 두 주인공의 교차진행 방식은 그랑제의 장기라 할 만한데, 본작 '미세레레'에서는 보다 자유롭고 세련된 형태로 변주되어 있다. 초중반부 칠레의 정치역사와 아르메니아, 카메룬 내전 등, 다양하고 심도있는 내용들이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펼쳐질 때는 살짝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역시 노련하고 교묘한 번역이 적절하게 보완을 해주고 있다. 이세욱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낯선 순우리말과 한자어들이 본작에서는 거의 맥시멈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까지 추리, 스릴러라는 장르소설을 읽으며 '문학적'이라고 느낀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거의 유일한데, 이번에 이 '미세레레'를 새롭게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원숙미를 풍기는 그랑제의 디테일한 표현력이 이세욱의 세공을 거쳐 미려한 문장으로 거듭나는 모습이다.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의 한 구절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멀리, 아주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그 선이 너무나 뚜렷하고 단단해서,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부싯돌이 맞붙어서 불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클래식음악이라면 그런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서 주제로 택하고있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세레레'라는 음악은 이번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15분이 채 안되는 짧은 곡이라, 책을 읽는 중간중간 한번씩 감상하기도 했다.

아... 이제 또 다음 작품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사족>
1. 책의 말미에 있는 '저자와의 만남'은 무척 흥미롭다. 특히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이세욱 번역가의 남다른 노력은 감동스러울 정도이며, 앞으로도 그랑제의 차기작들을 계속 전담할 것이 예상되어 든든하고 감사하다.

2. 영화화된 '크림슨 리버'와 '늑대의 제국'은 모두 '장 르노'가 주연을 맡은바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도 나이와 외모로 보아 혹시 그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저자의 얘기를 들으니 그건 아닌듯... 

3. 정확한 발음이 '미세레레'인지 '미제레레'인지 알 길이 없는 알레그리의 이 곡은 '킹스 컬리지 합창단(King's College Choir)'의 1963년판이 유서깊은 명반으로 알려져있으며, 그랑제도 이 음반을 들으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탈리스 스콜라스(Tallis Scholars)'의 1980년판이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명반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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