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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오에 겐자부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서는 두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시적 표현력으로 현대인의 아픔을 과감한 형태로 그려내어 현실과 신화가 응축된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라는 헌사와 함께 그해의 선정 이유를 밝히고 있다.

1935년생으로 3년 전인 2023년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겐자부로는 장편소설은 물론 중, 단편 및 각종 평론, 수필 등... 작품 수가 상당히 많은 편이고 우리나라에도 명성에 걸맞게 대부분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나와있는 상태다.

그동안 겐자부로의 작품을 한번도 읽어본 적 없다는 사실이 좀 부끄럽기도 한데, 어쨌든 늦었지만 이번에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품 중의 하나인 '만엔 원년의 풋볼'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 작품은 장편소설로서 원제 역시 '萬延元年のフットボ-ル'이며 놀랍게도 작가 나이 32살에 쓴 1967년작이다. '만엔'은 일본 연호 중의 하나이고 '만엔 원년'은 1860년을 뜻한다. 1860년의 일본은 마지막 막부인 에도 시대가 저물어가던 시기로 개항의 압박을 거쳐 서양의 문물이 밀려오면서 격동과 혼란을 겪던 시기이기도 하다.

제목만 보면 마치 막부 시절을 다룬 시대극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제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당시 작가가 글을 썼던 시기과 비슷한 1960년대 초반이며 만엔 원년과는 정확히 10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다. 1960년대의 일본 역시 2차대전 패배 이후 미국의 통제 속에 100년 전 조상들이 겪었던 격동과 혼란을 또다시 답습하던 시기라, 아마도 작가는 본인 스스로를 투영한 작중 주인공 세대와 만엔 원년 시절의 증조 할아버지 세대를 대비시키며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매몰되는 인간 군상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본문 속에서 만엔 원년의 '농민 봉기'와 1960년의 '안보 투쟁'이라는 두 역사적 사건이 시대를 초월해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언급되는데, 각각의 사건에 얽힌 가족사를 바라보는 두 주인공 형제의 시각이 마치 '라쇼몽'의 그것처럼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그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인간 본성에 대해 화두를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두 사건이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역사적 맥락에 대해 사전지식이나 이해도가 높았더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그런 핑계가 무색하게도 내게는 전반적으로 내용이 좀 난해한 편이었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와닿지 않아서 책을 다 읽고나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은 낭패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첫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작가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미학적으로 완벽함이 느껴질 정도로 정교하게 축조된 예술품을 보는 듯해서 내용과 상관없이 그냥 문장을 읽어나가는 모든 순간들이 경이롭고 짜릿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 첫문장만으로도 겐자부로의 스타일은 대충 다 파악이 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 흔히 나 같은 구세대들이 막연하게 글을 잘 쓴다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정할 때 무조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을... 어쩌면 궁극의 경지라 부를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설이 길면 질색하고 영상 조차도 1분 미만의 쇼츠만 찾는 요즘 시대에는 이런 만연체 스타일을 구사하는 작가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나는 여전히 이렇게 긴 문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수의 글을 만나게 되면 스토리의 재미와는 별개로 글 자체를 읽는 즐거움에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역시 초반에 나오는 문장으로 그냥 개를 안아 올렸다는 별 것 아닌 행동을 어둠을 안아 올리자 어둠 속에 개가 채워져 있다고 표현한 부분처럼 겐자부로의 글에는 순간순간 흘러가는 행동과 생각들을 묘사함에 있어 단 한군데도 대충 넘어가는 법 없이 철저한 계산과 고뇌를 거쳐 빚어낸 흔적들이 역력하다.
새벽에 친구의 자살 사건을 떠올리며 정화조 구덩이에 들어가 넋나간 행동을 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정밀하게 그리면서 캐릭터 소개까지 겸하고 있는 이 도입부 제1장은 나에게 있어 오에 겐자부로와의 첫대면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그 임팩트가 실로 대단했다. 레이어가 두세겹 입혀진 긴 문장 속에 은유와 직유를 물흐르듯 섞어넣는 테크닉은 물론 의미가 또렷하게 전달되는 적확한 어휘의 선택 등... 읽는 내내 줄곧 '무시무시하다'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언어와 글로 이루어진 어떤 거대한 기운에 압도당하는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지만 이렇게 글을 잘쓰는 작가를 만나게 되면 설령 내용이 어렵고 이해 안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글 자체를 읽는 즐거움이 그 모든 것을 상쇄시켜주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나 자신을 계속 설득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이 작품은 후반부에 충격적이면서도 거북한 내용의 반전도 있고 해서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본문 속에서 만엔 원년의 봉기를 상징한다고 해서 넣었을 책표지의 대나무 그림마저도 나중에는 오히려 죽창이 떠올라 섬뜩해질 정도인데, 책을 다 읽고나면 요즘 서른살과 60년대의 서른살이 과연 같은 서른살이 맞는가 싶기도 하고... 겐자부로는 그 나이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건가 싶기도 하다.


한편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시코쿠 지역이고 고치가 자주 언급되는 걸로 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고치 북쪽에 있는 어느 산골짜기 마을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도 시코쿠와 고치가 배경이라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데 나중에 정말로 고치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



https://blog.naver.com/joonjoo2/222926761125

끝으로 작가의 필력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훌륭한 번역은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였다고 말하고 싶고, 덕분에 오에 겐자부로라는 대문호를 제대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zp0b6MoS6Qc&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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