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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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유정의 신작을 예약구매하려고 둘러보던 차에 마침 이 책도 예약구매 이벤트와 함께 화제가 되고있는 듯 해서 겸사겸사 같이 구매를 했는데 사실 김애란 작가는 내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이나 청소년 성장소설류는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표지디자인과 제목만으로도 대충 감이 오는 책들은 대부분 거르는 경향이 있다보니 이 작가 역시 일찌감치 나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영화계와 마찬가지로 출판계에도 과장광고와 선동적인 호들갑으로 초반끗발을 노리는 마케팅이 만연한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젊은 거장의 13년만의 신작'이라는 떠들썩한 홍보문구를 앞세운 이 책 역시 빛좋은 개살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작가의 화려한 수상이력이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와 많은 독자들의 애정어린 기대감에서 어느 정도의 신뢰가 생겼고 거기에 개인적으로 늦은 나이에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 독서의 스펙트럼을 넓혀보려는 나름의 유연함이 더해져서 결과적으로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작가 김애란은 1980생으로 현재 40대 중반이니 작가로서는 가장 원숙미를 발휘할 시기로 보인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작가도 주로 단편소설들을 많이 써왔는데 그중에 무려 10편 이상의 작품들이 메이저 문학상 수상은 물론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바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작가가 이렇게 화려한 스펙을 자랑할 동안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동안 나의 독서취향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또한번 깨닫게 되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쨌든 장편소설은 이번이 두번째이고 2011년에 발표된 첫번째 장편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강동원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었는데 역시나 지레짐작으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이번 예약구매 특전은 작가의 친필사인본에 감사인사를 담은 엽서 정도이고 그마저도 인쇄형식이라 그다지 가치가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열혈팬들에겐 나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책을 받아보니 약간 변형된 4x6판 정도의 작은 사이즈에 약 230페이지 분량으로 예상에 비해 훨씬 더 소박한 느낌이다. 



활자 크기나 페이지의 여백을 고려하면 사실상 중편소설에 가까워서 16,000원이라는 책값이 무척이나 불편해지는데 어차피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닌지라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만약 예전 책들의 표준 판형이었던 신국판 사이즈로 찍었다면 150페이지도 넘기기 힘들 분량을 온갖 꼼수를 써서 억지로 늘리고 늘려서 그것도 고작 200페이지를 넘겨놓고 장편소설이라 우기고있는 꼴이니 이제는 단편, 중편, 장편의 기준조차 잘 모르겠다. 


본작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이렇듯 단편이 주종목으로 보이는 작가의 장편 흉내를 내는 중편소설에 딱 봐도 청소년 성장소설처럼 보이는 분위기 등 내가 별로 선호하지 않는 요소들이 허들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애초에 기대를 접고 그냥 정유정의 신작을 기다리는 동안 워밍업 삼아 가볍게 접근하자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단 이 책도 다 읽고 난 느낌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쓰고 요즘에는 막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 만큼은 나도 모르게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그냥 미쳤다...


어떻게 오직 글만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단번에 홀리게 하는 재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난번 최은영의 '밝은 밤' 리뷰 때 지적했던 것처럼 이 작품도 단편을 주로 썼던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장편답지 않은 호흡이 느껴지기는 한다. 단편처럼 각각의 시퀀스에 여백이 많다는 특징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 김애란의 글에서는 이것들이 전혀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전혀... 


이 작품도 역시나 이렇다할 중심서사 없이 자잘한 상황들이 단편적으로 이어져있는 형태라 기승전결이 불분명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다 읽고나서도 메인 줄거리나 주제가 무엇인지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묘한 리듬감이 기승전결을 대체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서사에 대한 아쉬움이 딱히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보면 작품 곳곳에 설사 미흡한 부분이 있다 치더라도 작가가 압도적인 필력으로 무지막지하게 찍어눌러서 그냥 닥치고 읽게 만드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리뷰했던 콜린 후버처럼 이 작가도 본인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국어 선생님이 자유롭게 단어를 연결해서 지어보라고 한 뒤 어떤 건 왜 시가 되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은지 나중에 얘기해보자고 하는 장면이라든지 폭력이니 상처니 하는 얘기 너무 뻔하다는 부분 등 뭔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읽다보면 은연 중에 그런 자신감에서 스며나오는 기운들이 얼핏얼핏 감지가 된다.  



내가 국내 현역 중견작가들 중에서 탑클래스 필력으로 꼽는 정유정의 경우 지난번 '완전한 행복' 리뷰 때는 경이롭다고까지 표현했을 정도였는데, 이 김애란도 감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수준이라 생각되고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부분도 보일 정도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특히 이 작가의 문장들은 너무나 정교해서 구석구석 모든 부분 하나하나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이 작품은 3명의 주인공들이 모두 고등학생이라 크게 보면 청소년 성장드라마의 테두리에 들어가는 건 맞다. 하지만 작가의 내공이 비범한 만큼 단 한 부분도 성장과 치유에 관한 식상한 코드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고 여류작가 특유의 페미니즘적 시각이 보이지 않는 점도 좋았다. 세 주인공 이름이 지우, 소리, 채운인데 나는 초반부가 넘어갈 때까지 지우의 경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려서 답답했을 정도였다. 작가가 남녀의 갈등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이들의 성별이 무엇이든 작품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도 하다.


한편 김애란 작가는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며, 아니 어떤 식으로든 끝나지 않기를 원하며', '시작되는 동시에 끝나는 기분',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돈을 미워하는지 좋아하는지',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누군가를 잡은 손과 놓친 손이 같을 수 있다' 등등 문장에서 단어의 대구를 이루는 형식을 즐겨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는 '시작과 끝'에 관한 메세지가 상당히 두드러지고 특히 이야기의 끝이 있어서 좋다는 지우와 반대로 시작이 있어 좋다는 소리의 대화는 각자 다른 결말로 대구를 장식하게 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제목으로도 쓰여진 '거짓말과 진실'에 관한 문답 역시 수미쌍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김래원 주연의 '해바라기' 같은 영화만 봐도 초반부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울지 않겠다, 싸우지 않겠다는 3가지 약속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모두 깨어지는 서사구조로 이루어져 있듯이 이러한 수미쌍관식 서사는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성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교묘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져있어 차원이 다른 작가의 내공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시작과 끝'이나 '거짓과 진실'이라는 화두에 너무 집착해서 해석하려 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하고싶은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특정 장면이 하나라도 의미있게 와닿았다면 그냥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본다. 나같은 경우는 올해 암으로 어머니를 여의었고 마침 큰딸이 웹툰을 공부하고 있으면서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이 깊은 상황이라 마치 내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구태의연한 말을 의기양양하게 하고 삶에서 진부한 교훈을 추출해 남들에게 설파하기를 즐기지만 본인은 그 교훈대로 살지 않는 사람',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하지만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도 그럴게'... 



때로는 송곳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읽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파도처럼 계속해서 밀려든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그안에 꽉 들어찬 내용들이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농축되어있는 느낌이라 나는 천천히 음미하다보니까 다 읽는데 5시간도 더 넘게 걸렸던 것 같다. 후반부에는 눈물도 제법 흘렸고...


나는 감히 이 작품을 지금 이 시대 한국문학의 정점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보물같은 작가를 알게되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또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J4KVGhXGpYQ&t=4s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2235604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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