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시간 관리와 돈 관리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 실패의 결과가 다르다. 시간을 잘못 관리하면 당혹스러운 일을 마주하거나 목표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반면 돈을 잘못 관리하면 연체료를 물거나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모든 결핍에서 공통적인 논리를 찾아내는 데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결핍은 이런 개인적인 일화 차원을 훌쩍 넘어서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결핍scarcity을 무언가를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가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겠다.

결핍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의 어떤 공통적인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문제들은 제각기 다른 문화, 경제 조건 그리고 정치 제도에서 일어나지만, 모두 결핍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결핍은 정신을 사로잡는다. 배고픈 사람들이 오로지 음식만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결핍을 경험할 때마다 그 결핍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때 정신은 충족되지 않은 그 필요를 자동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추구한다.

결핍은 어떤 것을 매우 적게 가질 때의 불쾌함 그 이상이다. 결핍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결핍은 사람의 정신을 그 자신의 무게로 무겁게 짓누른다.

부족하게 가진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또 이는 가령 건강이나 안전 혹은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결핍은 불만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기존의 이론들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집단의 문화나 개인의 개성, 취향, 선호 그리고 사회 제도 등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결핍의 덫들을 하나로 묶어 분석한다고 해서, 모든 형태의 결핍이 같은 크기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은 아니다. 결핍의 사고방식은 결핍의 내용에 따라 더욱 중요하게 작동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은 해묵은 문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할 뿐이다. 새로운 접근법이 제시될 때마다 추론해야 할 새로운 함의, 해석해야 할 새로운 의의 그리고 이해해야 할 새로운 결과는 늘 있게 마련이다.

결핍이 정신을 사로잡으면 사람은 보다 더 엄격해지고 능률적이 된다. 집중을 유지하는 일이 힘들어 보이는 상황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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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싶은 욕망에 걸맞은 논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부스러진 논리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씩씩대고만 있을 때, ‘어이없다’는 쪼그라든 나를 한마디로 대변해 준다. 누군가에게 내 억울함을 털어놓을 때도 그렇다. "어이없었겠다"라는 상대의 짤막한 맞장구가 들려오면 나는 묘한 승리감과 더불어 위안을 얻는다.

‘애쓰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달그락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무엇엔가 애쓰기 시작하는 순간, 기대와 불안은 옥신각신 요란하게 소란을 피운다. 바지런히 노력하면 뭐든 잘 되겠지, 싶다가도 어느새 애쓴 만큼 커져 버린 두려움과 맞닥뜨리면 쿨렁, 마음이 떨어진다. 순수하게 공만 들이기엔 잡념은 쉼 없이 나를 휘젓고 다니고, 잡념들 앞에 선 나의 노력은 한없이 무력하다.

우리는 종일 힘들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지낼까. ‘힘들다’는 내 무의식의 저변 가장 앞자리에 진열되어 있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오는 통로가 이보다 더 짧은 단어가 있을까.

조용함은 소외되었던 소리의 조연들이 반짝일 수 있게 도와준다. 이들이 주연이 되는 순간, 그제야 우리는 눈으로 다 담을 수 없었던 순간을 오롯하게 완성할 수 있다.

내 감정의 낙차는 ‘초췌하다’라는 단어가 불러들인 결과였다. 고생하거나 병에 걸려서 살이 빠지고 얼굴에 핏기가 없다는 뜻의 ‘초췌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기운을 쏙 빼놓는, 달갑지 않은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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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고도 별것 없었던 그 시절이 찬란하다 기억되는 것은 햇빛이 전해 준 따뜻한 생명력 덕분이다.

사사건건 따지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묘한 양가감정이 인다. 이악스럽게 발산하는 에너지에 피로감을 느꼈다가도, 옳고 그름을 한 올 한 올 가려내며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내는 모양새에 나도 모르게 탄복하게 된다.

대부분 나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면 괜한 안도감이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신들도 그렇다는 것에서 오는 묘한 소속감이랄까. 나만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다가도 결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 본 덕에 안전장치가 깔려 있을 것만 같은 길로 돌아가게 된다. ‘대부분’이라는 말에서 얻는 동질감이 나에게 안락함을 주는 것이다.

어디선가 옅은 신문지 냄새가 나면 그날의 아버지와 나는 조각난 곳 하나 없이 옹글게 되살아나 덮어 두었던 기억을 들썩인다. 살아남는 기억은 많고 많은 날의 어느 하루였고, 그 흔하디흔한 하루가 결국 단 하나의 특별한 하루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무슨 일에서건, 나는 나만의 마감 기한을 세우는 버릇이 있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기한에서 대체로 한두 주쯤 앞선 시기를 자체 마감 기한으로 정하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두 주 앞당겨 일을 모두 다 하려다 보니 촉박해진 시간에 마음은 조급해지고 종일 나를 다그치게 된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버릇인가. 그럼에도 나만의 마감 기한에 맞춰 마지막 마침표를 찍게 되는 순간의 쾌감을 느낄 때면 이 몹쓸 버릇의 재등장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영화를 좋아한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면 좋겠고, 상처받은 연인들의 사랑이 종국에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처절하게 실패한 주인공이 당당히 일어서는 모습도 보고 싶다. 현실을 복사해서 붙여 놓은 듯한 매정한 결말 속에 주인공을 홀로 남겨 두고 나와야 하는 서느런 마무리는 영 마뜩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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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특정 인물이나 직업을 지칭할 때 점점 더 격조 높아 보이게 호칭이 달라지는 것 같다.

결국 호칭이란 가까운 가족이나 친인척 간의 호칭은 별 문제가 아니고, 사회에서 객관적으로 불릴 때는 그 사람의 외형과 풍기는 인상이 중요하다 하겠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이게 맞나?’ 자신의 상식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늙는다는 것은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 점점 약해진다는 뜻이다.

모든 불편함은 제때 해소해야 살 것 같다.

그래, 난 지금 이걸 꼭 해결해야겠어. 불편한 건 못 참아! 나도 젊었을 땐 이런 것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는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하며 외국에서 살기도 하고 세계를 내 집처럼 휩쓸고 다니는 사람도 많단 말이지. 그러니 이런 젊은 사람들은 우주적 사고를 하면서, 좁은 나라 안에 갇혀 사는 우리하고는 영 다른 사고를 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젊은이들의 여러 삶의 형태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형편이 못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싶다. 그러니 나는 이제 반성하고 다른 세대의 형태나 사고방식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서 다시는 간섭할 마음을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살면서 내가 저질러온 멍청했던 짓들을 생각하면 이불킥을 하게 되지만, 그때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아마도 나이가 많아서 잊었거나 어쩌면 죽고 없는지도 모르고, 나 외에는 나에 대해 관심 가지는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요새 사람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분부분 신경써서 관리하고, 온몸의 부위별로 근육도 키워야 하고, 어떤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해줘야 한다는 여러 상식에다 간과 콩팥, 장과 심장, 위장, 폐까지 뭘 먹으면 좋고 혈행 개선을 위해서는 어떤 음식을 먹는 게 좋다는 것까지 다 알고 실천하려고 하니 사실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만도 하루해가 다 갈 판이니 어찌 바쁘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날씨를 좀 예견할 줄만 알아도 도사 대접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한 분야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많이 알고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 대단한 사람으로 봐줬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손 안의 폰 하나로 해결된다. 실시간으로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보를 너무 많이 알아도 이것이 더 많은 혼란을 일으키는지, 요새 사람들은 더 많이 불안해하고 아는 만큼 더 많은 질병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제 모든 것은 변했고 다음 세대는 어떤 형태로 살아갈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운좋게도 그냥저냥 평탄하게 살아온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겪었을 여러 인생살이와 이런저런 사건사고와 경제적 결핍과 허약 체질과 남편과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익명으로 살 수 있었던 자유로움과 처치 곤란한 재물 때문에 머리를 썩여야 할 일이 없음에도 감사한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자유롭다. 관습과 도덕으로부터, 또 종교와 신념으로부터, 이런저런 인간관계로부터도 거의 자유롭다. 다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으며 지금까지 먼 길을 온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여행을 가면 첫째로 집에서도 잘 못 자는 내가 잠자리가 바뀌니 더 못 자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위장이 좋지 않으니 낯선 음식에 소화도 잘 안 된다.

사람이 어쭙잖은 일로 이렇게 크게 영향을 받는구나 싶었다.

심란하거나 난감하거나 왕짜증이 나는 정도는 어쨌든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는 좀 불편한 일들에 불과한 것이다. 전 지구적 대책 없는 큰일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이 정도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싶다. 제발 기후위기나 자연재해, 대형 산불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이어지길 기원한다.

세월이 오래 가고 보면 한때 친했던 사람도 이름이나 얼굴조차 가물가물하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인간관계가 상당히 허망하다. 그러니 한때의 관계에 목매지 마라.

이젠 거의 다 정리가 되고 다들 모임 자체를 안 한다. 모두 다 챙겨입고 걸치고 어디 장소로 찾아가고 이런 것들이 귀찮단다. 그러니 아직 원기 충천하고 바쁘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친목모임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게 젊은 시절일 게다.

예전에는 밥을 밖에서 먹더라도 가까운 집에 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아무도 자기 집을 제공하고 싶지 않은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러니 친지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극히 줄어들었는데, 집의 인테리어에 들이는 관심은 또 왜 그렇게 요란한지 알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쓸 무렵 자신의 주인공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로 유머, 친절함, 자기 억제를 들었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라는 거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모순, 자아, 공포 따위는 쓰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구태여 쓸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한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부정적인 요소는 잠시 접어두고, 유머와 친절함, 자기 억제라는 덕목으로 가볍게 날아올라보는 건 어떨까? 심각한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 곰곰 생각해보니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거나 지나갈 것들이다. 그러니 인간끼리의 관계를 너무 심각해하지 말고 가뿐하게 생각하고 유연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좋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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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모든 결혼 생활에 해피엔딩은 없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우리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 자체가 해피엔딩일 수 없을 테니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결혼 생활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많은 동화책이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로 끝나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하면 행복하게 사는 결말만 있는 줄 알았겠지. 하지만 부부가 마지막까지 같이 살다가 같이 죽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더 큰 불행을 원하는 것과 같다.

사실은 남자 종족과 여자 종족은 전혀 다른 종이라고 본다. 그런데 외형이 같은 인간 형태라고 이 둘을 한집에 몰아넣고 같이 살아라 하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를 인식 하고 상호 간에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미리미리 교육을 받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무도 이런 인식이 없다. 학교 교육 커리큘럼에 부부간의 예의나 남녀 간 생각의 차이 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정황을 묘사하느냐 하면 누군가 이 지구상에서 소멸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한 죽음에 따른 수많은 일들이 있고, 그것을 부부 중 남은 쪽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러니 결혼 생활에 해피엔딩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게 인생이다. 끝에 별게 없다. 심오한 깨달음이 오거나 50년 가까이 같이 살았던 사람과 마지막 인사라도 살갑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허망하게 끝이 나버린다.

그러면 사는 것이 헛되기만 했는가? 어차피 태어났으니 삶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 남자가 내게로 와서 같이 살면서 진객珍客인 아이들도 낳고, 살아가는 터전도 만들고, 사회의 일원으로 주눅들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필요 부분도 남편 덕분에 마련되어 있다.

결혼 생활에는 해피엔딩이 없지만, 인생의 끝이라고 해서 그것이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노쇠하고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왔을 때 인생의 끝지점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우리 어머니 세대는 우리가 보기에 지나치게 아끼고 절약하는 게 몸에 배어서 답답하게 느껴지는데, 우리를 보면 아이들은 또 답답한 부분들이 있겠지. 그래도 어머니가 그렇게 아껴 모아서 목돈을 만들었다가 자식들이 필요한 때 쓰라고 주면 답답해한 건 잊어버리고 좋아하기만 한다.

비싼 거라도 지금 나에게 많이 쌓여 있으면 자연히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살아갈 날과 모아둔 재산을 가늠해서 재산이 너무 많은 사람은 각티슈처럼 쓰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볼 만하다.

침대 옆에 둘 협탁을 살 때는 비싸고 번듯한 것을 살 뻔하다가 이제부터 사는 살림살이는 내가 죽고 난 후 아이들이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싸고 가벼운 것을 선택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자개장롱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때 마음이 오래 안 좋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노인이 되면 구매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살다보면 아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에 내는 세금(어머니는 친구분이 국가에서 주는 노령생계비를 지원받는 걸 시샘하더니 나중에는 세금을 내는 처지가 훨씬 떳떳하다고 말씀하셨다)과 병원비라고. 그러니 아낄 수 있는 곳에서는 아껴야 한다 하셨다.

사우나나 온탕에서 몸을 데우고 냉탕에 들어가면 어디서도 대체할 수가 없는 상쾌한 기분이 든다. 반신욕을 하면서 목을 돌리고, 남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스트레칭도 하고, 냉탕에서는 짧지만 수영도 한다. 어쨌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기대로 매일 목욕탕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러다보니 목욕탕에서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고, 세상의 민심이 변하는 것도 목욕탕 사우나에서 더 잘 느낀다.

외모를 가꾸고 살기도 참 힘들구나. 대책이 없던 시대에는 늙으면 늙는 대로 사는 줄 알았는데, 늙어도 대책을 잘 세우고 돈을 들이면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시대가 되고 보니 선택하기도 간단치가 않다.

세태라는 게 어찌나 빨리 변하는지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서울서 직장생활하는 아들 부부가 다가오는 명절에 못 올 일이 생겼다고 연락하면 못 보게 돼서 섭섭하다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 잘됐다 싶단다. 가족이어도 항상 같이 살지 않는 이상 완벽한 손님이고, 손님 접대에는 부담이 많이 생긴다.

얼마 전만 해도 며느리들의 명절증후군이 어쩌고 하는 말들이 많았는데, 한해 한해 가면서 양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한편 60대쯤 되어 보이는 어떤 엄마는 자기는 남편에게 음식물쓰레기는 절대 버리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직접 한다며,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아주 현모양처 같아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기는 딸과 며느리에게도 음식물쓰레기는 남자들에게 맡기지 말라고 했다는 거다. 내가 그러면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것은 지저분하고 천한 일이라 귀한 남자들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러니 지금은 모든 가치가 혼재되어 있고 오히려 여자들이 더 살기 어려워져가고 있는 것 같다.

목욕의 마지막 코스로 어떤 사람들은 얼굴에다 팩을 하는데, 오이, 들깻가루, 우유, 요구르트, 녹차 가루, 레몬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이 자신의 피부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전국 목욕탕에서 흘러나가는 물에 먹어도 좋을 음식물 성분으로 범벅된 오수가 얼마나 될지 심히 우려스럽다.

목욕탕에 가서 씻고 약간의 운동도 하고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개운해진다.

두세 시간 동안 핸드폰이나 다른 매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게 해준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다.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고 사람들 안에서 사는 이 시간이 내겐 소중하다. 다양한 세대를 관찰할 기회를 준다. 무엇보다 건강에 좋다.

생각해보면 운동은 고통이고 목욕은 일종의 쾌락이었다. 온탕이나 사우나에서 몸을 데우고 찬물탕에 들어가는 시원함을 어디다 비하겠는가. 이후에 이곳의 헬스장이 폐쇄됐는데도 나는 목욕탕을 계속 다녔다. 기초대사량이 떨어지는 시기에는 목욕탕을 이용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본다.

어느 의사가 말하기를 자세를 항상 긴장 상태로 오래 유지하다보니까 기혈 순환이 원활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했단다. 그러니 지나치게 유난을 떨 필요는 없겠다. 다만 우리는 자세에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편한 자세로 돌아가고 싶어지니까 마음속에서 한 번씩 ‘자세를 꼿꼿하게 한다’라는 주문을 외워두는 게 좋다. 나이는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자세에서 드러난다.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으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살이 찌고 싶어도 잘 안 찌고, 물론 할머니도 살이 찌고 싶은데도 안 찌는 경우가 있어서 너무 왜소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신경을 안 쓰면 살이 찐다. 조물주가 생애주기를 잘못 짰다고 불평해봐야 소용없고 적게 먹든지 더 많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나고 아무도 널을 뛰지 않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대문을 허물고, 그곳에 새 이층 양옥집을 지어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그 집에서 70세 무렵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84세가 될 때까지 지내시다가 자식들이 많은 서울로 옮기셨는데, 우리가 새집이라고 인식하던 그 집도 거의 50년 구옥이 되어갔던 것이다.

그런 날들이 있었다,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좋았던 날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지만, 그런 날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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