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한 팔을 길게 뻗고 엎드려 있던 김윤주가 몸을 일으켰다. 둔하게 게으른 몸집에 게으른 눈빛이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찐 얼굴이 하얗다. 생긴 거 상관없이 앳된 피부만으로도 충분히 예뻐 보이는 나이였다. 그러나 오로지 본인만 그걸 모르는 나이.

피해자 가족의 고통이 생생히 전해져 이규영도 눈시울을 붉혔다. 서민수 님 잘못이 아니에요, 라고 이규영은 말했지만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규영은 김윤주의 퇴로를 최대한 차단하기 위한 대화를 이어 갔다. 김윤주가 치치라는 존재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라라는 치치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했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김윤주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규영은 그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과 속으로 격렬하게 싸웠다.

@juNa-2-JunA

김윤주는 쪽지를 보고 머리를 득득 긁었다.
"네 트위터 계정 맞지? 닉은 쥬나."
김윤주가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계정은 삭제됐다. 비슷한 시각 김윤주는 텔레그램 계정도 삭제했다. 해외 기업이 운영하며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트위터나 텔레그램은 계정이 삭제되면 모든 활동 기록이 지워진다. 복구는 거의 불가능했다. 범죄 수사관에게 이 시대 사회 관계망 서비스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네 정신과 기록 다 뒤져 봤어. 넌 해리성 정체감 장애 진단을 받은 적이 없어. 넌 네 기분과 필요에 따라 다른 인격이 되는 흉내를 냈을 뿐이야. 스릴러 영화나 웹소설에서 많이 봤겠지. 어릴 적 상상의 친구가 아직 떠나지 않았거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이버수사팀은 ‘B시 초등생 살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인터넷 글을 저인망식으로 뒤졌다. 소속 연예인 악플러를 고발하기 위해 증거를 찾는 연예기획사 직원 못지않게 수사팀은 열성으로 찾았다.

소문은 트위터 공간에 가장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쥬나는 트위터를 기반으로 하는 자기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주로 활동한 소위 네임드였다. 쏟아지는 정보 가운데 검토할 가치가 있는 걸 찾아 갈무리하고 계정주 인터뷰까지 마친 참고인 중에 ‘Pa­ci­fi­c Ki­ll’이 있었다. 퍼시픽킬은 쥬나가 ‘자캐와 오너가 일치’되어 ‘현실과 현피를 떴다’고 평했다.

특정한 세계관에 따라 개설된 커뮤니티에 각자 자기를 대변하는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자기 캐릭터’들이 참여하면서 자캐 커뮤는 시작된다. 커뮤니티의 세계관과 규칙에 따라 자기 캐릭터들이 서로 소통하며 역할극을 즐긴다. 자기 캐릭터를 줄여 자캐라고 하고 자캐를 만든 본체인 사람은 오너라고 부른다. 오너는 참여하고 싶은 커뮤니티의 세계관에 걸맞은 자캐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오너는 그럴듯한 서사를 부여하여 그림으로 자캐를 구현한다. 김윤주는 그림을 썩 잘 그렸다. 중학교 때 애니메이션 학원과 제빵 학원을 제법 열성으로 다녔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배운 그림 실력으로 훼손된 신체를 미화한 모습의 자캐를 종종 그렸다. 뇌가 반쯤 파손되었거나 한쪽 눈이 없거나 한쪽 팔이 없는 미소년.

김윤주가 뻐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존나 금지된 게 나에겐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거지. 간지 나잖아.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지랄, 펄쩍 놀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거지."
이규영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어떤 심리인 건지 알 만은 했다.

"범죄자들이랑 똑같다고. 사람 죽이고 패고, 속이고 빼앗고. 하지 말라는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다가 잡혀서 여기 끌려오는 범죄자들. 물어보면 다들 쎄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더라. 사람들이 자길 무시해서. 자길 우습게 봐서 그랬다고."
자존감은 낮고 자기애는 높은 에고들.

김윤주의 말투와 태도가 조금은 협조적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라라가 된 건가? 라라와 치치는 이런 식으로 서로 경험을 공유하며 자캐 커뮤 활동을 이어 간 것일까? 가상 세계의 동업자? 아니, 역시 이건 다 김윤주의 연기인 거겠지. 다중인격 연기가 몸에 배어 필요할 때마다 자동으로 인격이 바뀌는 거겠지. 어쩌면 정말 자신이 다중인격이라고 믿고 있는 걸 수도.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규영은 김윤주가 관심을 잃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가도록 유도하는 데 집중했다.

이규영도 자신의 추론을 믿고 싶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자신의 야릇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끔찍한 범죄의 형태로 상상을 현실로 옮겨 버린 소녀가 눈앞에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래 도덕관념이 희박한 애라고 치자. 현실에서 살인과 사체유기라는 범죄의 대가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몰랐을 리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김윤주는 촉법소년 연령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보호처분에만 처할 수 있는 촉법소년의 한계는 만14세인데 김윤주는 미성년자가 곧 촉법소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

누군가가 있다.
이규영은 직감했다. 그날 낮에 김윤주는 누군가를 만났고 정우의 손목을 처분했다. 이 일을 조력하거나 방관한 누군가가 한 명 이상 있다. 텔레그램 메시지와 트위터 멘션, 디엠을 삭제한 것은 그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감추려는 것이다. 아무렴 이런 범죄를 오로지10대 소녀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하고 혼자만 알고 있을 리 없다.
안타깝게도 삭제된 텔레그램 메시지와 트위터 멘션, 디엠을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났다. 딱 하나만 빼고.

서정우와 김윤주가 그날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한다면 가장 크게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었다. 정우는 삼촌이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걸자 순순히 따라나섰을 뿐 아니라 여자와 마을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로 가서 여자가 사는 집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서수경의 퀭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날 그 장면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언니와 엄마의 옷을 훔쳐 입고 나이 든 어른 여자인 양 꾸미고 나와 정우에게 말을 거는 김윤주. 무릎을 세우고 앉아 정우에게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인가 속삭이는 김윤주.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듯 선뜻 김윤주를 따라가는 정우의 모습. 이제 와 상상 속에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말릴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그날의 그 순간.

김윤주는 진짜로 서정우를 몰랐을까. 이규영은 사건을 접했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가졌던 의심을 다시 꺼내 들었다. 김윤주는 그날 정우의 상황을 알고 정우를 노려 일을 저지른 것 아닐까.

이규영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범죄 피해자 가족들이 범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원망하다 관계의 파탄을 맞는 상황을 진심으로 막고 싶었다. 어떤 말이 더 확실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이규영은 문득 입을 닫았다.
서수경이 의아한 눈으로 이규영을 보고 있었다.
"저… 왜 그러시죠?"
조재완 팀장이 긴장하며 두 사람 사이를 살폈다.
"오빠가… 정우 수업 끝나는 시간을 착각했다고요? 누가 그래요?"

"무슨 소리예요? 제가 그날 오전에 오빠에게 문자를 몇 번이나 보내서 일렀는데요. 오빠가12시 조금 전에 이제 출발한다고 전화도 했었는데? 사고가 나서 대로가 엄청 막히고 우회로로 간다고 했다가 길을 잘못 들고 그래서 늦은 거라고. 저에겐 그렇게 말했는데. 형사님이 오빠에게 직접 들은 말이에요?"
"네. 일전에 결혼하실 분이랑 같이 경찰서에 오셔서 제게…."

"그 여자가 왔어요? 윤다해 그 여자가 오빠랑 같이 왔다고요?"
"아, 네… 그게…."
"그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가 어디라고 오빠랑 같이, 네? 그것도 결혼할 사이라며 나타나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지가 뭐라고. 새빨간 거짓말쟁이 주제에.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치는 서수경을 올려다보며 이규영은 생각했다.
약혼녀 이름이 윤다해인가 보구나.
생각해 보니 이규영은 서민수와 불쑥 동행하여 나타난 약혼녀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었다.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서 정우를 죽였니?"
오싹한 기분에 이규영은 화도 나지 않았다.
김윤주는 어깨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놀랍도록 빠르게 슬픈 표정이 되어 시무룩하게 말했다.
"정말 미안한데요. 그 아이는 이미 죽었잖아요. 진짜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돼 버렸잖아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자신을 그만 좀 괴롭히라는 말이었다.

김윤주는 더 이상 인격이 바뀌는 시늉은 하지 않았지만 정우의 손목을 찾을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진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연락했느냐는 질문에는 극구 부인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했다. 진짜 사람의 손목을 가지고 싶었다. 가상 세계의 역할극에 빠져 있다 보니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어느 순간 희미해졌다. 그날의 일도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것 같고 아직까지 현실이라는 실감이 안 난다며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어떤 부분은 모호하게 선택적으로 자백했다.

이규영은 결전의 마음을 다졌다. 이규영의 생각이 옳았다. 김윤주의 뒤에는 누군가 있었고 이규영은 그 사람을 찾았다. 진실게임의 대상이 이제 두 명으로 늘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이규영의 전략이었다.

김윤주는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커뮤 활동이 끝나고도 윤다해와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 갔다고 했다. 윤다해에게 호감을 느낀 김윤주가 먼저 연락했다. 둘은 세실리아 황제와 올가 근위대장이라는 서로의 역할에 심취해 있었다. 김윤주에게 윤다해는 여전히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다. 어떤 가학적인 명령이 떨어져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절대군주였다.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언제든 커뮤 세계관으로 돌아가 역할극을 하며 놀았다. 나중에는 어떤 것이 일상적인 대화이고 어떤 것이 역할극 대화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절대 황권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의 군주, 탐욕스러운 세실리아 황제는 계속하여 인육을 원했다. 김윤주에게 언제까지 인육을 구해 오지 못하면 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명령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으며 김윤주는 압박을 느꼈다. 말미가 연기될수록 황제의 꾸지람은 혹독해졌다. 황제는 이달 말일이 최종적인 말미이고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라고 했다. 김윤주는 인육을 바치지 못하면 세실리아 황제가 자신을 떠날 것 같아 초조해졌다.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 나의 주인, 나의 모든 것. 세실리아 황제가 나를 떠난다면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모두 끝나 버릴 것만 같았다고 김윤주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라라가 고통스러워하자 치치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라라는 말릴 수 없었다. 고통이 강해질수록, 현실과 가상 세계와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잔혹하고 냉정한 치치의 힘은 커져만 갔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왜 서정우였냐고?"
이규영의 차가운 말투에 김윤주는 입술을 한번 씰룩이더니 답했다.
"세실리아 님이 남자 친구랑 함께 걔 학예회에 간 적 있었는데요, 걔 손이 이쁘다고 했어요. 조그만 손으로 바이올린 켜는 게."
"정우 손이 예쁘다고 했다고?"
"네. 갖고 싶은 손이라고… 먹고 싶다고… 아주 탐난다고 하셨어요."
이규영은 울컥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참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요. 이왕 선물 드릴 거 걔를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김윤주는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내쉬었다. 이규영은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윤주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불안을 더 키워 줄 때였다.
"안타깝다. 너는 세실리아 황제에게 이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세실리아 황제에게 인육을 바치기 위해. 오직 그것을 위해8살짜리 아이도 죽이고 이렇게 범죄자가 되었는데 말이야. 온 국민이 지탄하는 범죄자. 앞으로20년간 감옥에서 청춘을 바치며 썩어 갈."
이규영은 몸을 숙여 김윤주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봐. 세실리아 황제가 너에게 원한 건, 정말 인간의 손목이었을까? 너희들 사이에만 통한다는 그 세계관인가 뭔가 그것대로?"
"…네?"
"세실리아 황제는 사람의 신체 일부나 인육에 관심이 없어. 너와 달라. 그 망할 놈의 잔혹한 세계관 따위. 너희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종족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세계관 따위 너와 공유하고 있지 않아. 그 여자에게 너는 알렉산드리아의 올가 근위대장이 아니야. 그냥 시키면 살인까지 해 주고 혼자 뒤집어써 주는 호구일 뿐이지."
"뭐라고요?"
"그럼 네 꼴은 지금 어떻게 되는 걸까?"
이규영은 그 순간 김윤주의 내면에서 뭔가 폭삭 주저앉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윤다해는 움찔하지도 않고 이규영의 시선을 맞받았다. 거짓말을 들켜도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병적인 거짓말쟁이의 눈빛이었다. 이규영은 이런 눈빛을 한 범죄자를 몇 알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윤다해 옆 너무 가까운 곳에 김윤주가 있었던 것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참극을 낳았다. 가상 세계의 역할극에 심취해서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신이 불안한10대 소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윤다해도 시도해 봤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윤다해의 악의가 감경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윤다해가 이 범행에 계획적으로 깊게 관여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고 말겠다고 이규영은 다짐했다.

물러서야 할 마지막 지점을 찾아 물러선 윤다해는 여유를 찾았다. 입에 기름을 칠한 듯 말이 술술 나왔고 그 이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공범 둘 사이에 오간 연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윤주조차 윤다해의 살인 교사를 인정하는 진술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규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탄식했다.
김윤주는 순진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간식으로 넣어 준 초콜릿 음료에 빨대를 꽂아 빨았다. 그 모습을 보니 이규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규영은 목 안으로 쓴 물이 올라오는 걸 겨우 삼켰다.
"윤주야. 김윤주."
알렉산드리아라는 세계의 역대 가장 잔혹한 군주의 오른팔, 올가 근위대장은 굼뜨고 게으른 눈빛으로 이규영을 보았다. 어떤 명령이 떨어지든 맹목적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어쩌면 그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
"너는 금방 잊힐 거야."
이규영은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슬프게 단언했다.
"앞으로 너보다 더 악한 아이가 나타나겠지."
믿기 싫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눈앞의 괴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잊힐 거고, 시간이 갈수록 악인의 명단에서 점차 낮은 순위로 내려올 것이다. 그가 숭배하는 세실리아 황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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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네 할머니의 말 때문이었는지 다시 안 볼 것처럼 차갑게 말하던 할머니가 어제는 나물 반찬을 만들어서 주희를 앞세워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회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먹으라고 건네주고 파란 지붕 집 할머니에게도 한 그릇 나눠 주었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목숨도 다 자기 하기 나름이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했다. 무슨 말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파란 지붕 집 할머니는 급성신부전으로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들끼리 모여 평소 지병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지만 주희는 왠지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희는 알고 있었다. 나물 반찬을 만들어 여러 통에 담았지만 파란 지붕 집 할머니에게 건네준 나물 반찬은 할머니가 따로 만든 것이었다.
주희는 며칠 동안 경찰이 찾아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엄마와 아버지를 따라 다시 서울로 오기 전까지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때마다 주희는 집 뒤 창고에서 나물을 들고 오는 할머니를 유심히 지켜봤다.
뭐든 알뜰히 모아 두면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정말 이렇게 죽는다고? 남자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할 때 못 들은 척할걸, 이상한 낌새가 보일 때 바로 내려 주고 집에 가서 라면에 소주나 한잔할걸.

남자는 구덩이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도끼에 찢긴 다리와 반쯤 절단된 팔의 고통만 커질 뿐이었다. 여자가 던지는 흙덩이가 얼굴을 때리고 가슴을 덮쳤다. 입 안으로 흙이 들어왔다. 이대로 죽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입으로 들어온 흙의 맛을 느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문득 남자가 끊임없이 외치던 말이 생각났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왜?
주희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굳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하필 그가 그 거리에 차를 정차하고 있었고, 주희가 건네는 유혹에 넘어갔던 것뿐이다. 아니다. 만약 주희가 서준이라는 놈을 죽였다면 그는 살았을지도 모른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욕구가 주희를 택시로 이끈 것이다.

주희는 돌무덤 주변에 있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도끼를 휘두르던 순간의 짜릿한 전율이 다시 손으로 전해졌다. 언제부터 이런 순간을 즐기게 되었지? 그런 생각을 하자 바로 강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강 선생이 처음이었지. 기억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첫 살인의 순간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그날의 흥분이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강 선생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영어 선생이었다. 고3이 되면서 주희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 선생이 아무 학생에게나 친한 척 다가가 긴장을 풀어 준다며 어깨를 주무르고, 힘내라고 하면서 친구들의 등을 슬쩍슬쩍 만지는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올라왔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돌멩이를 집어 들었을 뿐이다. 며칠 동안 그날 밤의 일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받아들인 주희는 가장 먼저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버섯을 따고, 독이 든 뿌리를 캤다. 주희는 할머니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준비하는 건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온몸에 피가 돌고 아드레날린이 머릿속에서 폭발하고 손에 땀이 맺히는 짜릿함이 더 좋았다. 가끔 필요할 때는 할머니의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늘 미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전에 다니던 헬스클럽에서 그 스토커를 죽였을 때가 그랬다.

택시에 올라탄 주희는 잠시 이 차의 주인이 묻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
진심이었다. 택시에 탔을 때만 해도 그와 이렇게 엮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히 가자고 할 때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너무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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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사건/고조선

청동기 국가이자 요동 일대부터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있었던 일대 최초의 나라로, 한민족의 기원이 된 국가로 여겨진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앞에 ‘고(古)‘ 자를 붙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지명으로 쓰이다가 나라 이름이 됐다. 동이족, 예족, 맥족, 예맥족 등 중국의 산둥반도부터 만주 일대까지 한족과는 다른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다. 이들 대부분은 한족과 충돌하면서 중화 문명에 흡수되거나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이 일대에서 최초로 등장한 나라가 고조선인데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고학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추론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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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명문장/악제도의 철폐

남자 이상으로 노동을 해서 기껏 받는 임금은 남자 노동자의 절반. 그 위에 압제와 착취! 우리는 여기에 절대로 반대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일관한 불합리한 사회 제도를 합리적으로 고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젊은 여성들 양어깨에 꽉 메워진 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여성 해방의 열의를 증명하는 한 조건이다.

1. 노동 부인 또는 직업 부인에게 완전한 보호법을 제정(중요한 것은 남녀 동일한 임금 8시간 노동제의 확립, 출산 전후에는 특별한 휴일).
2. 부인 참정권, 부인 결사의 확립.
3. 부인에 대한 교육 기회의 균등(부인 대중의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부인에대한 교육의 문호개방을 실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
4. 인신매매에 의한 창부제의 금지(공창이고 사창이고 간에 인신매매에 기인된 창부제의 존재는 여성의 치욕이며 고통인 까닭에 끝까지 싸울 것).
5. 부인을 모욕하는 봉건적 제 법률의 폐지(지금 실행되고 있는 상속법, 혼인법, 이혼법 등 봉건적 제 법률은 부인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니 이러한 봉건적 제 법률이 속히 폐지되도록 싸울 것).

위의 제 조건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날까지 우리의 기염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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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집에 살게 된 뒤 나의 냉랭한 태도를 느낀 엄마는 몇 번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나를 달랬다. 그럴수록 나는 화가 났다. 다시 어려운 상황이 되면 나는 또 짐짝처럼 어딘가로 던져질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할머니도 없다면 나를 어디에 버리려나? 본질적으로 엄마는 내가 왜 그렇게 냉담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쪼르르 달려가 창고 문에 매달려 할머니가 나물이나 뿌리를 손질하고 선반에 올려 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만져 볼래?’ 하고 물어도 그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죽는 게 뭔지도 잘 몰랐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독’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매달려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호기심은 있었다.
"할머니, 먹지도 못하는데 왜 술을 담가요?"
"먹기에 따라서 약도 되고 독도 되니까. 벌침 알지? 그것도 잘못 찔리면 상처가 붓고 아프잖니? 하지만 아픈 곳에 벌침을 놓으면 병이 낫는단다."
약이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독초를 따로 보관하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따 온 나물이나 뿌리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진짜 아끼는 독은 따로 있었다.

너무 긴 내용은 대충 건너뛰고 할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부분을 찾아서 읽었다. 디기탈리스나 천사의 나팔, 협죽도에 대해서도 읽어 주었다.
"협죽도. 쌍떡잎식물속 용담목 협죽도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 자생한다. 장미나 복숭아꽃을 닮은 꽃이 피어 가로수로 심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독성 때문에 철거되었다. 화분에 심어 실내 관상수로 두기도 하지만 올레안드린은 강한 강심 작용을 해서 다량 섭취할 경우 대상자는 심장이 수축된 채 회복되지 않아 사망한다. 꽃말은 위험, 방심은 금물."
나는 할머니에게 읽어 주기 위해 접어 둔 부분을 다 읽고 난 뒤 현장검증에서 결정적 증거라도 잡은 듯한 눈초리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꽃말이 ‘위험, 방심은 금물’이라니, 학교에서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할머니 앞에서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또 팔에 소름이 돋았다.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협죽도의 붉은 꽃을 손으로 건드렸다.
"…그랬지. 독성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협죽도를 심은 거란다."
"…?"
독성이 있어서 심었다고요? 초등학교4학년인 나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험물은 해골 표시를 해서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보관하거나, 불태워 없애거나, 묻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할머니는 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해 주었다.
"독성이 있어서 방충 효과가 있단다. 벌레가 무서워서 이 근처에는 오지 않지. 독버섯이 왜 화려한 색인지 알아? 나 건드리지 마시오, 라는 뜻이야. 눈에 띄어서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는 거지."

택시 운전기사는 주희가 뒷좌석에 타자마자 말을 걸었다.
"운동하고 오는 길인가 봐요."
‘오늘도 짐’이라는 글자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남녀의 실루엣이 새겨진 가방을 봤는지 택시 기사가 고개를 돌려 주희를 힐끗거렸다. 그때부터 식도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아, 말 많은 인간 딱 질색인데.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도 기사는 예상대로 말을 걸었다.
"그…, 너무 꽉 끼어서 안 불편해요?"
뭔 얘긴가 싶었다. 뭐가 꽉 끼었다고?
"나는 처음에 스타킹만 입은 줄 알았다니까요?"
레깅스를 입은 게 문제였군. 주희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밀려왔다.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오지랖도 넓었다. 쓸데없는 말을 얼마나 해 댈지 한눈에 그려진다.
"레깅스? 아니 그게 스타킹이랑 뭐가 달라? 요즘 그거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어디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아, 손님에게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레깅스를 입은 승객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니, 주희는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테러는 너다. 주희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주희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용히 가죠."
"…."

그는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도 다른 자동차와 충돌해 의식을 잃어 가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오늘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희는 택시 기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하고 싶어요?"
택시 기사는 주희의 질문이 당혹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아… 그러네요. 저 사람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는 몰랐겠네. 가만있자, 오늘이 마지막이라… 갑자기 물으니까 떠오르는 게 없네."
생각 없이 살면 이렇게 된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며 살아간다. 그저 내일 아니, 더 많은 시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 있다고 믿으며 어영부영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 뭘 하고 싶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니. 떠들기 좋아하는 것 같아 말할 기회를 주었더니 이런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택시 안이 조용해졌다.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몇 분 동안 예열을 한 뒤 속도를 올리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꺼진 실내에서 주희는 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자신의 호흡에 집중했다. 날카롭던 신경들이 차츰 가라앉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피곤하다. 오늘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무겁고 신경이 날카로운 날은 더하다.

주희는 굳이 자신의 해결 방법을 얘기해 줄 마음은 없었다. 완전한 이별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성향과 관계의 밀도에 따라, 남자의 반응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은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선 내 눈에 거슬리는 건 봐줄 수가 없지.

‘놈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라고, 사냥감이 되지 말고. 이제부턴 내가 널 사냥할 거니까. 겁을 먹을 사람은 바로 너라고 얘기를 하라고.’
주희는 계속 은서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마음으로 건네면 은서가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내 눈에 띄면 그땐… 뭐라고 해요?"
은서의 눈에는 걱정과 망설임, 겁을 집어먹은 초식동물의 연약한 눈물이 가득했다. 주희는 은서를 안아 주고 싶었다. 겁먹지 마 제발 겁먹지 말고 싸워.

골목을 걸어 나오며 주희는 놈을 협박하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은서 주변에 나타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내일 은서를 만나면 만약을 위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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