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네 할머니의 말 때문이었는지 다시 안 볼 것처럼 차갑게 말하던 할머니가 어제는 나물 반찬을 만들어서 주희를 앞세워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회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먹으라고 건네주고 파란 지붕 집 할머니에게도 한 그릇 나눠 주었다. "살아 있을 때 잘해야지. 목숨도 다 자기 하기 나름이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했다. 무슨 말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파란 지붕 집 할머니는 급성신부전으로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들끼리 모여 평소 지병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지만 주희는 왠지 그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희는 알고 있었다. 나물 반찬을 만들어 여러 통에 담았지만 파란 지붕 집 할머니에게 건네준 나물 반찬은 할머니가 따로 만든 것이었다. 주희는 며칠 동안 경찰이 찾아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엄마와 아버지를 따라 다시 서울로 오기 전까지 그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 그때마다 주희는 집 뒤 창고에서 나물을 들고 오는 할머니를 유심히 지켜봤다. 뭐든 알뜰히 모아 두면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정말 이렇게 죽는다고? 남자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억울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할 때 못 들은 척할걸, 이상한 낌새가 보일 때 바로 내려 주고 집에 가서 라면에 소주나 한잔할걸.
남자는 구덩이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도끼에 찢긴 다리와 반쯤 절단된 팔의 고통만 커질 뿐이었다. 여자가 던지는 흙덩이가 얼굴을 때리고 가슴을 덮쳤다. 입 안으로 흙이 들어왔다. 이대로 죽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입으로 들어온 흙의 맛을 느끼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문득 남자가 끊임없이 외치던 말이 생각났다. 나한테 왜 이러는데, 왜? 주희가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굳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하필 그가 그 거리에 차를 정차하고 있었고, 주희가 건네는 유혹에 넘어갔던 것뿐이다. 아니다. 만약 주희가 서준이라는 놈을 죽였다면 그는 살았을지도 모른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욕구가 주희를 택시로 이끈 것이다.
주희는 돌무덤 주변에 있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도끼를 휘두르던 순간의 짜릿한 전율이 다시 손으로 전해졌다. 언제부터 이런 순간을 즐기게 되었지? 그런 생각을 하자 바로 강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강 선생이 처음이었지. 기억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첫 살인의 순간이 하나씩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그날의 흥분이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강 선생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영어 선생이었다. 고3이 되면서 주희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 선생이 아무 학생에게나 친한 척 다가가 긴장을 풀어 준다며 어깨를 주무르고, 힘내라고 하면서 친구들의 등을 슬쩍슬쩍 만지는 것도 신경에 거슬렸다.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올라왔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돌멩이를 집어 들었을 뿐이다. 며칠 동안 그날 밤의 일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받아들인 주희는 가장 먼저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버섯을 따고, 독이 든 뿌리를 캤다. 주희는 할머니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준비하는 건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온몸에 피가 돌고 아드레날린이 머릿속에서 폭발하고 손에 땀이 맺히는 짜릿함이 더 좋았다. 가끔 필요할 때는 할머니의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면 늘 미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전에 다니던 헬스클럽에서 그 스토커를 죽였을 때가 그랬다.
택시에 올라탄 주희는 잠시 이 차의 주인이 묻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 진심이었다. 택시에 탔을 때만 해도 그와 이렇게 엮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용히 가자고 할 때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는 너무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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