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에 살게 된 뒤 나의 냉랭한 태도를 느낀 엄마는 몇 번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나를 달랬다. 그럴수록 나는 화가 났다. 다시 어려운 상황이 되면 나는 또 짐짝처럼 어딘가로 던져질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할머니도 없다면 나를 어디에 버리려나? 본질적으로 엄마는 내가 왜 그렇게 냉담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어느새 쪼르르 달려가 창고 문에 매달려 할머니가 나물이나 뿌리를 손질하고 선반에 올려 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만져 볼래?’ 하고 물어도 그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죽는 게 뭔지도 잘 몰랐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독’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매달려 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도 호기심은 있었다.
"할머니, 먹지도 못하는데 왜 술을 담가요?"
"먹기에 따라서 약도 되고 독도 되니까. 벌침 알지? 그것도 잘못 찔리면 상처가 붓고 아프잖니? 하지만 아픈 곳에 벌침을 놓으면 병이 낫는단다."
약이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독초를 따로 보관하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따 온 나물이나 뿌리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진짜 아끼는 독은 따로 있었다.

너무 긴 내용은 대충 건너뛰고 할머니에게 말하고 싶은 부분을 찾아서 읽었다. 디기탈리스나 천사의 나팔, 협죽도에 대해서도 읽어 주었다.
"협죽도. 쌍떡잎식물속 용담목 협죽도과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 자생한다. 장미나 복숭아꽃을 닮은 꽃이 피어 가로수로 심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독성 때문에 철거되었다. 화분에 심어 실내 관상수로 두기도 하지만 올레안드린은 강한 강심 작용을 해서 다량 섭취할 경우 대상자는 심장이 수축된 채 회복되지 않아 사망한다. 꽃말은 위험, 방심은 금물."
나는 할머니에게 읽어 주기 위해 접어 둔 부분을 다 읽고 난 뒤 현장검증에서 결정적 증거라도 잡은 듯한 눈초리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꽃말이 ‘위험, 방심은 금물’이라니, 학교에서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할머니 앞에서 다시 읽어 내려가면서 또 팔에 소름이 돋았다.
할머니는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협죽도의 붉은 꽃을 손으로 건드렸다.
"…그랬지. 독성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협죽도를 심은 거란다."
"…?"
독성이 있어서 심었다고요? 초등학교4학년인 나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험물은 해골 표시를 해서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보관하거나, 불태워 없애거나, 묻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할머니는 나의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해 주었다.
"독성이 있어서 방충 효과가 있단다. 벌레가 무서워서 이 근처에는 오지 않지. 독버섯이 왜 화려한 색인지 알아? 나 건드리지 마시오, 라는 뜻이야. 눈에 띄어서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는 거지."

택시 운전기사는 주희가 뒷좌석에 타자마자 말을 걸었다.
"운동하고 오는 길인가 봐요."
‘오늘도 짐’이라는 글자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남녀의 실루엣이 새겨진 가방을 봤는지 택시 기사가 고개를 돌려 주희를 힐끗거렸다. 그때부터 식도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아, 말 많은 인간 딱 질색인데.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도 기사는 예상대로 말을 걸었다.
"그…, 너무 꽉 끼어서 안 불편해요?"
뭔 얘긴가 싶었다. 뭐가 꽉 끼었다고?
"나는 처음에 스타킹만 입은 줄 알았다니까요?"
레깅스를 입은 게 문제였군. 주희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밀려왔다. 말만 많은 게 아니라 오지랖도 넓었다. 쓸데없는 말을 얼마나 해 댈지 한눈에 그려진다.
"레깅스? 아니 그게 스타킹이랑 뭐가 달라? 요즘 그거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어디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아, 손님에게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레깅스를 입은 승객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당신에게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니, 주희는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테러는 너다. 주희는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주희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용히 가죠."
"…."

그는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도 다른 자동차와 충돌해 의식을 잃어 가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오늘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희는 택시 기사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불쑥 말을 걸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하고 싶어요?"
택시 기사는 주희의 질문이 당혹스러운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아… 그러네요. 저 사람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는 몰랐겠네. 가만있자, 오늘이 마지막이라… 갑자기 물으니까 떠오르는 게 없네."
생각 없이 살면 이렇게 된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며 살아간다. 그저 내일 아니, 더 많은 시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 있다고 믿으며 어영부영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 뭘 하고 싶은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니. 떠들기 좋아하는 것 같아 말할 기회를 주었더니 이런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택시 안이 조용해졌다.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몇 분 동안 예열을 한 뒤 속도를 올리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음악이 꺼진 실내에서 주희는 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자신의 호흡에 집중했다. 날카롭던 신경들이 차츰 가라앉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피곤하다. 오늘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무겁고 신경이 날카로운 날은 더하다.

주희는 굳이 자신의 해결 방법을 얘기해 줄 마음은 없었다. 완전한 이별은 사람마다 다르다. 각자의 성향과 관계의 밀도에 따라, 남자의 반응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은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우선 내 눈에 거슬리는 건 봐줄 수가 없지.

‘놈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라고, 사냥감이 되지 말고. 이제부턴 내가 널 사냥할 거니까. 겁을 먹을 사람은 바로 너라고 얘기를 하라고.’
주희는 계속 은서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마음으로 건네면 은서가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내 눈에 띄면 그땐… 뭐라고 해요?"
은서의 눈에는 걱정과 망설임, 겁을 집어먹은 초식동물의 연약한 눈물이 가득했다. 주희는 은서를 안아 주고 싶었다. 겁먹지 마 제발 겁먹지 말고 싸워.

골목을 걸어 나오며 주희는 놈을 협박하며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한동안은 은서 주변에 나타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내일 은서를 만나면 만약을 위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알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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