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곧 경기가 풀릴 것이고 한파도 따듯한 봄기운에 밀려날 것이다. 그렇게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막연하게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막연한 시간에 기대는 순간 반전의 때는 오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심각한 때가 시시각각으로 출몰할 뿐이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래도 온몸에서 위기의 촉수가 자라기 시작한다. 마치 김주대 시인이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바람이 위로 불어주어서 올라갈 때는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이제 올라가는 데도 역풍이 불어서 힘들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내려가는 길목에서 부는 역풍을 딛고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풍의 위기가 새로운 감각적 깨달음을 몸에 아로새긴다. 이렇게 내려가다가 죽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과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방향도 바꿔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바꿔야 한다는 신호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절망에 좌절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제 내려가야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세를 갖는 일이?중요하다.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보다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삶의 자세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을 선택하는?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적지에 가급적 빨리 도착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살아왔다.
이제 위로 올라가는 목적지를 찾기보다 어디로 내려가야 할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중요한 때다. 방향 설정이 잘못된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을 거듭할수록 설상가상으로 위기는 더 심각한 난국으로 빠져들 뿐이다.
방향이 바뀌면 오늘의 나를 전혀 다른 삶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도 목표를 달성하는 ‘오름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존을 확보하는 ‘내려감 패러다임’이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지금과 다른 방향 설정은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내려가려는 사람만이 추락을 면할 수 있다는 믿음, 이런?때일수록 희망의 연대감으로 손잡고 함께 난국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신념을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경제 빙하기 문제는 완벽히 해결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경제 빙하기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다 보면 심각한 난국도 돌파하고, 문제로 생긴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왜 내려가야 하는지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닥으로 내려가는 방향을?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끈기로 버티다가 끊을 수 있는 시기를 놓치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에 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작했다는 이유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 포기는 마치 모든 걸 그만두고 인생의 낙오자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해온 탓이다.
하지만 이제 ‘버티는 끈기’보다 적확한 판단으로 ‘버리는 끊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선택과 집중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전략적 선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끈기’가 용기로 해석되었다면, 지금부터는 ‘끊기’가 진정한 용기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먼저 하던 일을 선제적으로 끊지 않으면 영원히 끊어진다. 마치 쉬지 않으면 영원히 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끈기로 버티는 용기보다 끊기로 그만두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이제 ‘끈기’로 이어지는 성장은 여기서 멈추고, ‘끊기’로 이어가는 행복한 성숙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과거와 다르게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제 빙하기에 오랫동안 습관처럼 해오던 삶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희망찬가를 울리면서 기쁨의 탄성을 내기 위해서는 끈기를 버리고 끊기로 다시 시작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거기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고 배움이 있고 다시 일어설 방법과 용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넘어졌다 일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내공이 생긴다. 바닥을 치면서 생긴 힘이 축적될 때 더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차원이 다른 힘도 생기는 법이다.
내려가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오름’이 ‘옳음’을 동반하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고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지금은 내려가야 다시 비상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내려가기’는 또 다른 ‘올라가기’다. ‘내려감’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도약의 서곡이다. ‘내려가기’는 스스로 바닥으로 향하는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내려가기’는 근본(根本)과 기본(基本)을 다지기 위해 밑바닥에서 용틀임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내려가는 연습’은 ‘물리적 위치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 위치이동’도 포함한다. 내려가는 연습은 올라가본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누구나 스스로를?어딘가에 비추어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도적 노력이다.
나력은?지금껏?자신을 수식하는, 또는 수식했던 모든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지금 오롯이?자기 이름 석 자로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이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바닥’은 ‘신념’이다. ‘신념’을 흔들어야 사람이 바뀐다. 관념은 머리에서 자라지만 신념은 삶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교훈을 토대로 자란다. 그 신념도 자주 흔들어봐야 그것이 허공에 매달린 관념인지?아닌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
낮추면 기회가 보인다. 지금은 성장이 아닌?성숙을?지향할 때다. 성장은 완성된 목표를 향한 일사분란한 행진곡을 지향하지만, 성숙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오늘과 다른 내일의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미완성의 교향곡이나 변주곡을 지향한다.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내 몸에 남겨진?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 다중체다. 다중체는 인생의 시기별로 그 색깔과 모습이 다양하다. 내리막길을 많이 걸었던 인생 시기가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에서 성공했던 즐거운 체험이 많은 시기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사람에겐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통해 생기는 다중체가 정체성의 씨앗으로 자리 잡는다.
살아간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모든 게?‘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삶은 ‘우두커니’와 ‘멍하니’가 만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와락’ 눈물을 쏟는 과정이다
문득 찾아온 경제 빙하기를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멍하니 바라만 보지 말고,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바닥으로 내려가 지나온 시절을 잠시라도 물끄러미 생각하며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따듯한 희망의 체온을 나누면서 혹한기를 극복해내는 펭귄의 연대처럼, 우리도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와락 눈물을 쏟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건 어떨까.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 모든 눈은 반드시 녹고 모든 비는 반드시 그친다는 믿음, 그리고 누군가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믿음, 그것이 우리의 힘든 오늘을 살게 만드는 희망의 파수꾼들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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