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앞에 놓인 오르막길을 오르기만 할 뿐, 나중에 내려갈 생각을 미리 해놓지 않는다. 오르막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남들과 경쟁하는 데 정신이 팔려 길의 이모저모를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할 때에야 뒤바뀐 풍경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기세 좋게 오르던 오르막이 가파르고 위험한 내리막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이제 엉거주춤 우물쭈물 내려가기 시작한다. 미끄러지고 자빠진다. 내려가는 것을 염두에 둬본 적이 없으니 내려가는 연습을 해본 적도 없다.
등산도 그렇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행한 사고는 오르는 길이 아니라 내려가는 길에서 발생한다. 급성장으로 이루어낸 성공이 추락과 폭락이라는 실패로 끝을 맺는다.

사실상 상식이란 것도 내 안경으로 바라본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편견은 집단적일 때 커다란 문제를 유발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 더 이상은 ‘그렇지 않을 때’ 심각한 문제가 된다.

통념을 깨지 않으면 눈앞에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변화한 현실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일방적인 게임으로 결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세상에는 온갖 분야에서 활약한?다양한 영웅들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과 맞서 싸워 이긴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격동기의 승리자들은 둘 중 하나다. 세상의 흐름을 만들었거나 그 흐름을 자기편으로 이용했거나.

지금은?하루하루 견디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도 틈이 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의 판단들은 혹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깨어야 할 통념은 아닌지.

통념을 깨고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봐야만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본질에 대한 각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준비에 나서도록 한다. 편견과 선입견도 내가 그동안 키워온 개 이름이라고 한다.?30년 이상 세상을 나의 주관적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편견과 선입견이야말로 내 생각을 옭아매서 타성에 젖도록 유도하는 장본인이 아닐 수 없다.

핵심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
결국 모든 성공과 실패는 사람의 문제다. ‘무엇을 해서’ 성공 또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일 뿐이다. ‘무엇을 해서 성공했다’는 해석은 ‘무엇을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낳을 수 있다. 위험한 관점이다.
본질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서 성공 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어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남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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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장소/DMZ

DMZ는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의 약자로, 남북한의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위해 만든 공간이다. 최근에는 그 생태적 가치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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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그렇다.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남의 위기는, 나의 위기다

건너편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다. 소방차가 도착해 진화에 나서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면서 감탄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방관들의 위험천만한 인명 구조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집주인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표정. 그러나 불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이, 불행의 불이 우리 쪽으로 옮겨 붙기 시작한다. 소방관들이 진화에 실패하자, 불은 옆집으로 옮겨 붙은 데 이어 그다음 집을 성난 파도처럼 차례로 덮친다. 그리고 그 옆의 우리 집. 뒤늦게 세간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부리나케 움직이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는 남의 집 불구경을 즐기다가 피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일 따름이다. 잘못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도 코너로 몰린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지금의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남의 위기가 곧 나의 위기다.

지금의 공포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변화의 시작’이다. 아니, 그것은 진즉에 시작되었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앞으로 계속 닥쳐올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언제 어떤 형태로 귀결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과연 이 추위가 물러갈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봄을 포기해야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의 ‘현상’만이 아니다. 그 위기 이면에 있는 본질적 변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빙하기는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슬금슬금 와 있었다. 몇 차례의 거품과 간빙기를 겪으며 우리가 착각했을 뿐이다.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것도 남들보다 앞서 빠르게 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경쟁의식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장구까지 팽개치면서 무게를 줄인다. 맨손 암벽 오르기에 도전한다. 무모할 정도의 ‘오름 경쟁 중독’이다.
빠르게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으니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조급증에 빠진다. 기대 수준이 워낙 높아서 차근차근 오르는 것을 굼뜨다고 여긴다.

우리가 틀렸다. 성공에는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이면에는 무수한 내리막길과 교훈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따뜻했던 추억들을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차라리 봄을 포기하자.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지나면 좋아질 것’이란 헛된 기대부터 버리자. 그리고 길을 찾아 나서자. 빙하기에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구상 생물의?90퍼센트 이상이 멸종하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문명을 일구어냈다. 우리는 살아남는 데서만큼은 지구상 최고의 생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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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인물/연산군

연산군(1476년~1506년)은 조선 10대 왕으로,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재위했다. 여전히 폭군의 대명사다. 그도 그럴 것이 집권 기간 내내 온갖 폭정을 일삼았다. 사람을 함부로 죽였고 사치와 향락이 끝도 없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은 연산군 때문에 생겨났다. ‘흥청‘과 ‘운평‘으로 불리는 기녀를 천 명 넘게 모았고 마음에 드는 흥청에게는 엄청난 재물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신하들의 처자를 건드리는 등 폐륜적인 행위를 일삼았고 궁궐에 인공 동산과호수를 파서 노는 등 각종 기행을 벌였다. 이를 비판하는 신하들을 탄압했고 백성들이 한글로 벽서를 붙여 비판하자 한글 사용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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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다르게 살아야겠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때가 되면 곧 경기가 풀릴 것이고 한파도 따듯한 봄기운에 밀려날 것이다. 그렇게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막연하게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막연한 시간에 기대는 순간 반전의 때는 오지 않는다. 오늘보다 더 심각한 때가 시시각각으로 출몰할 뿐이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래도 온몸에서 위기의 촉수가 자라기 시작한다. 마치 김주대 시인이 ‘진화론’에서 말한 것처럼.

바람이 위로 불어주어서 올라갈 때는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이제 올라가는 데도 역풍이 불어서 힘들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내려가는 길목에서 부는 역풍을 딛고 안전하게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풍의 위기가 새로운 감각적 깨달음을 몸에 아로새긴다. 이렇게 내려가다가 죽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삶이 완전히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과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방향도 바꿔야 하고 살아가는 방법도 바꿔야 한다는 신호다. 올라가는 길이 막혔다는 절망에 좌절하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이제 내려가야 살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세를 갖는 일이?중요하다.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보다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삶의 자세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을 선택하는?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적지에 가급적 빨리 도착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살아왔다.

이제 위로 올라가는 목적지를 찾기보다 어디로 내려가야 할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 중요한 때다. 방향 설정이 잘못된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을 거듭할수록 설상가상으로 위기는 더 심각한 난국으로 빠져들 뿐이다.

방향이 바뀌면 오늘의 나를 전혀 다른 삶의 패러다임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도 목표를 달성하는 ‘오름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존을 확보하는 ‘내려감 패러다임’이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지금과 다른 방향 설정은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세를 낮추고 내려가려는 사람만이 추락을 면할 수 있다는 믿음, 이런?때일수록 희망의 연대감으로 손잡고 함께 난국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신념을 함께 공유할 필요가 있다.

경제 빙하기 문제는 완벽히 해결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경제 빙하기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다 보면 심각한 난국도 돌파하고, 문제로 생긴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왜 내려가야 하는지 이유를 묻지 말고, 내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닥으로 내려가는 방향을?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

끈기로 버티다가 끊을 수 있는 시기를 놓치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에 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시작했다는 이유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 포기는 마치 모든 걸 그만두고 인생의 낙오자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암묵적으로 강요해온 탓이다.

하지만 이제 ‘버티는 끈기’보다 적확한 판단으로 ‘버리는 끊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선택과 집중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전략적 선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끈기’가 용기로 해석되었다면, 지금부터는 ‘끊기’가 진정한 용기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먼저 하던 일을 선제적으로 끊지 않으면 영원히 끊어진다. 마치 쉬지 않으면 영원히 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끈기로 버티는 용기보다 끊기로 그만두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이제 ‘끈기’로 이어지는 성장은 여기서 멈추고, ‘끊기’로 이어가는 행복한 성숙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과거와 다르게 생각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제 빙하기에 오랫동안 습관처럼 해오던 삶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희망찬가를 울리면서 기쁨의 탄성을 내기 위해서는 끈기를 버리고 끊기로 다시 시작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거기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고 배움이 있고 다시 일어설 방법과 용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넘어졌다 일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내공이 생긴다. 바닥을 치면서 생긴 힘이 축적될 때 더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차원이 다른 힘도 생기는 법이다.

내려가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오름’이 ‘옳음’을 동반하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생기고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지금은 내려가야 다시 비상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내려가기’는 또 다른 ‘올라가기’다. ‘내려감’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도약의 서곡이다. ‘내려가기’는 스스로 바닥으로 향하는 ‘겸손한 마음’이자 ‘초보자의 마음’이다. ‘내려가기’는 근본(根本)과 기본(基本)을 다지기 위해 밑바닥에서 용틀임을 준비하는 활동이다. ‘내려가는 연습’은 ‘물리적 위치이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심리적 위치이동’도 포함한다. 내려가는 연습은 올라가본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누구나 스스로를?어딘가에 비추어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도적 노력이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나력은?지금껏?자신을 수식하는, 또는 수식했던 모든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지금 오롯이?자기 이름 석 자로 버틸 수 있는 경쟁력이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바닥’은 ‘신념’이다. ‘신념’을 흔들어야 사람이 바뀐다. 관념은 머리에서 자라지만 신념은 삶의 밑바닥에서 경험한 교훈을 토대로 자란다. 그 신념도 자주 흔들어봐야 그것이 허공에 매달린 관념인지?아닌지를 구분해낼 수 있다.

낮추면 기회가 보인다. 지금은 성장이 아닌?성숙을?지향할 때다. 성장은 완성된 목표를 향한 일사분란한 행진곡을 지향하지만, 성숙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오늘과 다른 내일의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미완성의 교향곡이나 변주곡을 지향한다.

세월의 주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내 몸에 남겨진?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 다중체다. 다중체는 인생의 시기별로 그 색깔과 모습이 다양하다. 내리막길을 많이 걸었던 인생 시기가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에서 성공했던 즐거운 체험이 많은 시기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사람에겐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통해 생기는 다중체가 정체성의 씨앗으로 자리 잡는다.

살아간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모든 게?‘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삶은 ‘우두커니’와 ‘멍하니’가 만나
‘물끄러미’ 바라보다 ‘와락’ 눈물을 쏟는 과정이다

문득 찾아온 경제 빙하기를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멍하니 바라만 보지 말고,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바닥으로 내려가 지나온 시절을 잠시라도 물끄러미 생각하며 주어진 삶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따듯한 희망의 체온을 나누면서 혹한기를 극복해내는 펭귄의 연대처럼, 우리도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와락 눈물을 쏟으면서, 그래도 다행이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건 어떨까.
모든 터널에는 끝이 있다는 믿음, 모든 눈은 반드시 녹고 모든 비는 반드시 그친다는 믿음, 그리고 누군가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믿음, 그것이 우리의 힘든 오늘을 살게 만드는 희망의 파수꾼들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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