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그렇다.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건너편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다. 소방차가 도착해 진화에 나서지만 불길은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불구경’을 하면서 감탄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방관들의 위험천만한 인명 구조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집주인은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표정. 그러나 불구경하는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가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이, 불행의 불이 우리 쪽으로 옮겨 붙기 시작한다. 소방관들이 진화에 실패하자, 불은 옆집으로 옮겨 붙은 데 이어 그다음 집을 성난 파도처럼 차례로 덮친다. 그리고 그 옆의 우리 집. 뒤늦게 세간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부리나케 움직이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는 남의 집 불구경을 즐기다가 피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일 따름이다. 잘못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우리도 코너로 몰린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지금의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남의 위기가 곧 나의 위기다.
지금의 공포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변화의 시작’이다. 아니, 그것은 진즉에 시작되었다. 더욱 더 두려운 것은 앞으로 계속 닥쳐올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언제 어떤 형태로 귀결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이다.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과연 이 추위가 물러갈 것인지, 그래서 우리가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위기의 ‘현상’만이 아니다. 그 위기 이면에 있는 본질적 변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른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빙하기는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곁에 슬금슬금 와 있었다. 몇 차례의 거품과 간빙기를 겪으며 우리가 착각했을 뿐이다.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그것도 남들보다 앞서 빠르게 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경쟁의식 때문이다.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장구까지 팽개치면서 무게를 줄인다. 맨손 암벽 오르기에 도전한다. 무모할 정도의 ‘오름 경쟁 중독’이다. 빠르게 오르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으니 속도가 조금만 느려져도 조급증에 빠진다. 기대 수준이 워낙 높아서 차근차근 오르는 것을 굼뜨다고 여긴다.
우리가 틀렸다. 성공에는 오르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 이면에는 무수한 내리막길과 교훈이 깔려 있었다.
어쩌면 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따뜻했던 추억들을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차라리 봄을 포기하자.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지나면 좋아질 것’이란 헛된 기대부터 버리자. 그리고 길을 찾아 나서자. 빙하기에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지구상 생물의?90퍼센트 이상이 멸종하는 와중에도 의연하게 살아남아 오늘의 문명을 일구어냈다. 우리는 살아남는 데서만큼은 지구상 최고의 생명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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