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학문•철학/정경유착

기업이 불법적으로 정치 자금을 대고 정치인이 각종 특혜를 제공하는 관행으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국가에서 저리의 융자로 기업 자금을 주면 그에 상응하여 정치 자금을 대는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박정희 때는 10%, 전두환때는 20%까지 올라갔다‘라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경유착 사건은 1952년 중석불 사건이다. 정부는 농사철을앞두고 비료와 식량을 도입하기 위해 중석불, 즉 텅스텐 수출로 벌어들인 470만달러를 사용하여 밀가루 9,940톤과 비료 11,368톤을 들여온다. 문제는 이 물품 수입을 주도한 대한중석 ·고려흥업 · 남선무역 등 14개 회사가 밀가루와 비료를 자유롭게 판매하여 200억 원에서 500억 원 정도의 부당이득을 취한 것이다. 뒤늦게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회에서 특별조사단이 꾸려지지만 진상 조사는 쉽지 않았다. 달러 남용을 주도한 부서는 재무부였고 대통령 이승만이 이에 대한 처벌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사건은 박정희 정권기에 가속된다. 정부가 주도하여 차관을 들여오고 값싼 이자로 자금을 기업에 빌려주는 관행이 정착됐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앞다투어 정부에 로비했고 정부 역시 기업인들과 유착 관계를 강화하면서 각종 부정부패가 발생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난의 성격에 대해 우리는 빨리 정의를 내려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 우리는 속히 백기를 올려야 한다.

사람들은 위만 바라보고, 위를 향해 오르는 데 익숙해져 있다. 빨리 오르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는다. 어쩔 수 없이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기 싫어한다.

오랫동안 성공을 지속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언제나 꼭대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르는 데도 익숙했지만, 내려가는 데도 탁월했다. 내려가야 할 시기가 오면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남들보다 일찍 내려갔기 때문에 충분히 쉬고 다시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올라 정상에 도달했다.

맞설 수 없을 때는 빨리 포기해야 한다.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포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잘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한계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다.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체험적 깨달음의 언어가 몸의 언어다. 몸의 언어로 무장한 사람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관념적 지식으로 현실을 재단하고 평가하기 전에 몸으로 겪으면서 생긴 신념과 체험적 지혜를 믿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아니 더 심각한 경제 빙하기로 돌입할 가까운 앞날도, 기존 지식으로 평가하고 예측해서 미리 조치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살아가거나 사업을 해서는 우리 모두가 망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옛날에’ 타령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자랑스러웠다. 옛날에는 우리 집이 그렇게 대단했다고 하니 어깨에 힘을 줘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자꾸 듣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좋았던 옛날이야기가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비탄으로 끝맺음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추억은 마취제일 뿐이다. ‘왕년에’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왜곡시킨다. 마음속에 이상화시킨 과거를 현실과 비교한다. 현실이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과거는 선이고, 현실은 악이다. 하지만 과거를 찬양하며 현실에 불만을 토로해봐야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더욱 멀어질 뿐이다.

정상을 향해 희망의 발걸음을 옮기던 기억을 놓아둔 채 내려가야 한다. 과거의 희망은, 지금의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목표가 바뀌었다. 과거에는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전하고 빠르게 산 밑에 도착하는 것이다.

꿈도 책상에서 머리로 꾸는 게 아니다. 희망도 멀리 있을 때 밤하늘의 별처럼 더 빛나 보인다. 이제 행복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우선 생존 자체를 확보해야 한다. 생존 없는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절망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노력이 지금 여기서 바로 이루어질 때다.

새는 뼈의 안쪽이 비어 있다. 뼛속까지 비워냈기 때문에 높이 날 수 있다. 나무는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한정된 에너지를 집중시켜 더 풍성한 꽃을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는다. 강물도 자신을 버려야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
물리적인 짐만이 아니다. 마음속 짐까지 버리고 비워야 다른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다른 패러다임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갖고 있는 것, 익숙하고 습관적인 것,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들을 다른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옛날을 예찬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이 시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는 되풀이되는 일이 없다. 설혹 일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날지라도, 과거를 복제하듯 재현하는 일이란 없다.
현재와 같은 양극화 사회에서 고도성장이 재현된다고 해보자. 과연 그 결실이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고도성장 시절의 추억은 역사에 넘겨주고, 우리는 눈앞에 닥친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경제 빙하기에 접어든 지금, 고도성장 시절의 영광에 젖는 것은 히말라야 산등성이에서 선 채로 잠이 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꿈속에서 옛 기억을 더듬는 사이, 저체온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우리들을 위험으로 내몬다.?그러니?미련을 버리고 깨어 있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1. 문화/이중섭

이중섭(1916년~1956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 화가다. 이중섭 하면 <소>가 떠오를 정도로 오랫동안 소 그림을그렸고 소를 통해 자신의 예술혼을 형상화했다. <황소>, <흰 소>, <싸우는 소〉, <떠받으려는 소> 등 각양의 소를 그렸다. 말년에는 <소•비둘기•게>라는 작품을 남기는데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말라비틀어진 소를 그리기도 했다. 예술혼을 넘어 자아가 소에게 투영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기업이라고 해서 더 이상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일 수는 없다.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BPO)의 파도는 곧 우리나라 대기업들에도 몰아칠 것이다. 비용 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한다. 더 이상 안전지대는 없다고.
직장이 튼튼한 요새라고 생각해왔다면, 그래서 그동안 다소 안일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 바로 스스로에게 사과하자. 그것이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위대한 첫걸음이니까.

빙하기는 위기와 난국이 상존하고, 시련과 역경이 앞을 가리는 시기다.
빙하기를 건너는 가장 기본적인 지혜는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두 눈을 들어 볼 수만 있다면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변수와 복병을 즐거운 여행 동반자로 만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보면서, 물 위에 떠 있는 부분으로만 전체를 가늠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배를 움직이는 주요 부분은 물속에 잠겨 있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면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생각은 언어라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생각이 말을 만들고, 말이 행동을 만든다. 그리고 행동이 인생을 바꾼다. 사람이 그만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모든 성취 결과는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이루어낸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가 놓친 기회를 뒤늦게 깨달아도, 그것을 호의를 보였던 상대방 잘못으로 돌린다.
세상에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긍정적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다. 그래서 누군가를 칭찬하는 이야기에 비해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 몇 배, 몇 십 배는 많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0.유적•유물/명동성당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통상을 맺을 당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수교 조건으로 내걸었고 조선 조정은 이를 수용한다. 이듬해 블랑 주교는 명례방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시작했고 12년 만에 완공했다.

명동성당은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했다. 1976년 유신 체제에 항거하며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던 장소이기도 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규탄 범국민대회가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권리 투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6월 항쟁 당시에는 명동성당에서만 127차례 연 인원 6만 명이 참여하여 집회를 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