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유적•유물/성균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초입에 위치했고 근처에는 유학자들의 총본산인 유림회관이 있다.
관료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유학이 발전한 곳에서는 반드시 교육 기관이 만들어졌다. 중국 한나라 때는 태학, 당송 때는 국자감 등 여러 이름으로 존재했는데 주변 국가들도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고구려 때는 태학, 발해 때는 주자감, 고려 때는 국자감이라는 교육 기관이 만들어졌고, 고려 후기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개칭된 후 공민왕은 성균관을 유학교육 기관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전통은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 때 더욱 강화됐다. 성균관은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명륜당 그리고 기숙 시설로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존경각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성전은 평소에 문이 닫혀 있고 제사를 지내는 특별한 날에만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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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목소리는 냉철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이해 못 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게 태현의 신경을 더욱 긁었다.

태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형사의 표정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태현은 답답함을 넘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을 씨근덕거리는데 계단에서 누군가 올라오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멈칫했다.

태현은 소파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쯤 되니 자신이 뭐에 홀린 것 같았다. 형사의 말처럼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괜히 예민해져 모든 것을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현은 피곤한 듯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형사님도 제 말을 안 믿으시죠?"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말에서 진실성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팀장님, 빌라 입구CCTV 확보했습니다."
"그래?"
그 말에 태현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여기에1년 넘게 살았으면서도CCTV가 달려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여자가 오늘 여기에 왔다면 분명CCTV에 찍혔을 것이다. 공동 현관 말고는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드디어 증명할 길이 열렸다.
"같이 내려가시겠습니까?"
김 형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현은 일어나1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CCTV 확보 소식을 알렸던 형사를 따라 지하로 한 층 더 내려갔다. 작은 사무실이 있었는데, 빌라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태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노크하고 들어가자 낡은 모니터 앞에70대로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태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사랑을 열렬히 고백할 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다들 그렇다. 보통 호감으로 연인이 되지만 처음엔 알아 가는 단계다. 그 시기에 말하는 사랑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을 내포한 것이지 진실한 사랑은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태현은 수연을 떠올렸다. 목숨도 걸 수 있었던 사랑. 그것이 태현이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사랑의 기준이 같진 않다. 게다가 사랑과 함께 시계를 받은 이상 자신의 생각을 말할 타이밍은 오늘이 아니었다.

지영은 태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태현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도로로 나왔다. 깊은 한숨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뭔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태현은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는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긴 하지만 좀 더 목소리가 낮았다. 게다가 태현이 들어서자 흘깃거리는 시선들이 바로 느껴졌다. 태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지만 대부분 사무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쪽에 모여 있었다. 회의는 보통 회의실에서 하는 데다 태현이 알기로는 오늘 아침엔 회의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모여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앉아 있지 않고 하나같이 서 있는데 뭔가를 중심에 두고 둘러싼 느낌이었다. 그 사이에 있던 김 대리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태현을 발견했다.

태현은 머쓱하게 인사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김 대리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일까 싶은 마음에 회의 테이블 앞까지 간 순간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회의 테이블에 지영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엄청난 크기의 찌개 냄비와 반찬들, 그리고 일회용 플라스틱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영은 야유회라도 나온 것처럼 사람들에게 찌개와 밥을 덜어 주는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안에 김치찌개 냄새가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지영과, 잔뜩 굳은 인상으로 간신히 웃고 있는 부장님뿐이었다.
이건 영업사원들에게 상당한 실례다. 바쁜 아침 시간을 빼앗는 것도 그렇지만 온몸에 김치찌개 냄새가 배고 만다. 다른 회사에 가서 미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곤욕일 것이다.

태현의 목소리에 지영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태현을 반겼다. 태현은 그녀만큼 웃어 줄 수가 없었다.

태현은 지영을 이끌고 회사 앞에 있는 카페 ‘돌체’로 들어갔다. 아침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손님이 없었다. 태현은 지영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는 자리를 잡았다. 어떤 식으로 얘기를 꺼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이마를 짚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지영이 눈치 없이 말했다.

태현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지영의 손가락이 움찔하는 것을 분명 보았다. 하지만 진동벨이 울리는 바람에 더 묻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지영은 이미 태연한 표정을 되찾고 있었다. 태현은 테이블로 가 지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영이 쟁반 위에 있던 커피 잔을 들어 태현의 앞에 먼저 놓아주고 나머지 한 잔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지영의 과도한 분노가 태현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 순간 지영이 말없이 회사에 왔다는 것도, 회사에 어떻게 왔는지에 관한 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지영이 저러는 걸 보면 정말로 자신이 회사 이야기를 무심결에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명함이라도 한 장 건네준 건지도 모른다. 이전에 만났던 수연이나 다른 여자들에게도 몇 번쯤 그랬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지영의 화를 풀어야 했다.

그 정도로만 끝났다면 헤어지자는 말은 안 했을지도 모른다. 급작스럽게 회사에 나타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고, 그 답을 보내는 속도를 사랑의 척도로 재는 일 따위는 참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중차대한 순간에 받은 전화이기 때문에 더욱 화가 나 헤어지자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태현은 그 전화 한 통으로 지영에 대한 모든 호감이 떨어져 나가 버리고 말았다.

잘 벼린 칼날이 와서 심장에 박히듯 날카롭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헤어지던 그날 수연의 표정이 머릿속에 떠올라 태현은 심장께가 아파 왔다.

만약 경멸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태현은 잠깐의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수연이 질투라도 하는 건가 하는. 그러나 수연의 목소리는 그런 찰나의 오해조차 못 하게 만들었다.
[그 미친 여자 대체 뭐야? 내 휴대폰 번호 네가 알려 줬어?]
"무슨 소린지…. 천천히 설명해 줘."
태현이 부탁한 대로 ‘천천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수연의 말은 바로 이해가 되었다.

태현은 눈을 꾹 감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굴욕과 분노가 뒤섞이는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리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지영은 수연이 태현의 옛 여자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직 태현의 휴대폰에 사진과 전화번호가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왜 아직 여지를 두냐고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부었다는 것이었다. 전화번호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이 지우지 않은 것이고, 수연이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남긴 적도 없는데 왜 자신이 아닌 수연에게 전화를 건 것인지, 태현은 그 인과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급한 것은 전화기 너머에서 펄펄 뛰고 있는 수연을 달래는 것이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태현은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전화기를 든 손이 부들거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태현은 휴대폰에서 지영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안하지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전화기 너머 속 통화 연결음이 겹쳐 들렸다. 태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말을 걸어온 남자를 응시했다.K그룹 담당자였다. 그는 마치 밥을 못 얻어먹은 시어머니 같은 얼굴을 하고 태현을 보았다.
"오늘은 바빠 보이니 이만 가겠습니다. 바쁜 일 먼저 처리하시죠."
태현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급히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로 설명을…."
"아뇨!"
그는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팔을 붙잡고 있는 태현의 손을 밀어냈다.
"급한 일부터 처리하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K그룹의 부장이 턱짓으로 태현의 손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보고 말 것도 없이 지영이었다. 수신 거절을 눌렀지만, 또다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장은 낮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페에서 나갔다.
태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노로 커다래진 눈두덩이 위로 힘줄이 불룩 튀어 올랐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야!"
태현의 고함이 너무 커서 카페 안의 손님들이 쳐다볼 정도였다.

"당장 헤어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로 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예쁘던 얼굴이 이제는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태현이 왜 화가 났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표정에 태현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다시 설명하려던 태현은 지쳐, 더 이상 말할 힘을 잃어버렸다. 왜 지금 자신이 지영에게 매달려 가며 설명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사과해야 하는 건 저쪽이다. 생각해 보면 얼마 만나지 않은 짧은 기간 중에도 지영은 자주 저랬다.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도 모든 것을 태현의 잘못으로 돌렸다. 자신이 지영을 덜 사랑해서, 자신이 지영을 배려하지 않아서 화가 날 만한 모든 일들을 만들었다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 분노가 너무 격렬해서 사정하다 보면 어느새 전부 태현의 잘못이 되어 있었고, 태현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 말고 그 사실을 깨닫곤 했다.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절대 끌려가지 않으리라.
지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커피 잔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침묵을 지키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 불안했다. 그녀는 곧 고개를 들었다. 태현은 그 얼굴을 보고 온몸이 굳을 듯 소름이 돋았다.
지영은 웃고 있었다. 아주 비굴한 웃음이었다. 풍선 하나 받아 달라며 히죽 웃는 이벤트 아르바이트생 같은 작위적인 웃음이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지영의 표정이 싹 굳었다.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크게 뜬 눈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흰자 안을 작고 검은 구슬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그 구슬이 닿은 곳은 커피 잔이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영의 커피 잔이 박살 나 있었다. 커피는 강화유리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고, 바닥에는 사기로 된 커피 잔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지영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커피 잔의 손잡이뿐이었다. 깨진 손잡이의 날카로운 끝을 지영은 자신의 목에 가까이 댔다.
"헤어지느니 차라리 죽을게."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주목되었다. 몇몇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금세 도망갈 태세였다. 소란을 주의시키러 오던 점원도 멈칫한 채 경계하고 있었다. 태현은 사람들을 일일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 전에, 지영을 말려야만 했다.

발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지영은 몸을 괴롭게 뒤틀어 댔다. 태현은 기회를 살피다 단숨에 일어나 지영의 손을 제압했다. 그렇지만 벗어나려는 지영의 힘은 대단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놓친다면 곧바로 제 목에 구멍을 내 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지영의 문제는 일단락되었지만 그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K그룹은 계약 기간 만료를 끝으로 재계약은 하지 않겠다고 최종 통보해 왔다.

그 일로 회사에서 태현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순히 재계약을 놓친 것뿐이었다면 어느 정도 질타를 받는 선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장이K그룹 측으로부터 그날 미팅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결국 태현은 시말서까지 써야 했고, 직원들은 태현을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부장은 그를 보며 수시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치는 기분으로 집 앞에 도착해 힘겹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다행인 것은 이제 지영과는 볼일이 없다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웬 음식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들자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집 안이 빛으로 가득했다. 태현은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천천히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과 통해 있는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태현 씨 이제 와요?"
에이프런을 두른 지영이 태현을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으며, 인덕션 위에서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태현은 지금 경찰서에 와 있었다.
이별을 통고한 사흘 전 밤, 자신의 집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지영을 보고는 기겁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소리를 질러도 지영은 뻔뻔한 얼굴로 "어서 와서 저녁 먹어요" 하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태현이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팔로 쓸어 버린 뒤에야 지영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닥은 쏟아진 반찬들로 엉망이었다. 그건 마치 자신의 기분과도 같았다.
지영은 그걸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식칼을 들고.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당장에라도 지영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이건 분명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아예 없던 일처럼 구는 지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영이 두려웠다. 태현은 정신없이 휴대폰을 들었고, 그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의2인조였다.

자신들은 지구대원들이라 더 처리해 줄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태현은 고소하겠으니 경찰서로 이관해 달라고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지영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이런 일일수록 더욱 단호하게 대해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이 당장 지영을 조사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흘 동안 태현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결국 경찰서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수사 담당자의 이름도 출동했던 지구대를 찾아가 한참 싸운 끝에 얻어 냈다. 수사관은 피곤에 찌든 공무원 특유의 얼굴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경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태현도 이상했다. 무단 침입으로 신고한 이후 사흘간 그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문자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공중전화 번호로 두 차례쯤 밤에 전화가 걸려 온 적은 있지만, 말없이 끊었기에 전화를 건 상대가 지영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불법 침입으로까지 신고당하자 자존심이 상해 완전히 돌아선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오히려 이 고요가 태현은 불안했다.

경찰서를 나와 지친 몸으로 회사를 갔다. 회사를 가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언제 어느 때에 지영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문이 열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일에도 집중하지 못한 탓에 거래처에서도 항의 전화가 종종 걸려 왔다. 계약 미팅 날짜를 잊는다든가 납품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사고가 많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회사에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경찰서에 들른 탓에 출근이 늦었으니 분위기가 더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경찰서, 라고 대답하자 부장은 몹시 궁금해했다. 무슨 일인지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부장도 지영을 본 적이 있으니 얼마나 막무가내의 여자인지는 알 거라고 생각했다. 스토킹이라는 말에 부장은 크게 놀라며 ‘그런 미인이 따라다녀 준다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허튼소리를 지껄였다.
당해 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의식이라곤 없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설명하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웠다. 대충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 직원들 반응이 이런지 알 수 없었다.
"자네, 진짜 스토킹 사건 때문에 경찰서 다녀오는 것 맞나?"
부장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향한 혐오가 그의 가느다란 눈 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현은 상대가 부장이라는 것도 잊은 채 언성을 높이며 따져 물었다. 그때 태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지영이다. 그녀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었다.

이 소문의 근간을, 태현은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하면 분명 거짓 소문을 퍼트린 범인이 지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향한 지속적인 괴롭힘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장은 태현이 바라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경찰들이 모두 사라진 뒤 태현은 힘 빠진 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맥없이 걸터앉았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태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협탁에 놓으려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전기 요금 고지서와 교회 전단 같은 우편물들이 협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태현이 갖다 놓은 것은 아니었다.
"하…."
기가 막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일을 풀어 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현은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이 자신을 향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흘렀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발작하듯 온몸을 뒤틀었다. 그러고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듯 비명이 섞인 고함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악!"

태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의 바로 옆 오피스텔 건물 앞에 지영이 서 있었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소문 이후로 회사에서는 아직 태현을 경계하는 직원이 많았다. 특히나 여직원들의 가시 돋친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다. 거짓의 파급력은 컸고 진실의 무게는 가벼웠다. 가벼운 진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했다. 어쩌면 회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태현은 생각했다. 이 모든 게 지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지영을 발견했으니 자신의 원망이 깊어 헛것을 보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왜냐면 지영은 여기 있어서는 안 됐다. 이미 접근 금지 신청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지영에게 통보가 간 걸로 알고 있었다.

목적은 위협이 분명하다.100m 접근 금지 따위를 누가 무서워할 줄 아느냐는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많은 스토커는 접근 금지 명령서를 받음과 동시에 광분한다. 상대를 더 괴롭힐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태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지영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휴대폰을 들어 곧장112를 눌렀다. 상담 경찰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인근 지구대에서 곧장 출동할 수 있게 처리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순간, 그사이 지영이 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은 태현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진정하라는 제스처였다. 경찰이 다시 물었다.
"아까 이분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했는데요.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물으나 마나 다 거짓말이야!"
"고객님 말씀이 맞아요. 다른 동네 찾으셨는데 오늘 이 매물이 나와서 한번 보시라고 제가 모시고 온 거예요. 이 동네라고 말씀 안 드리고 왔어요."
"하! 말도 안 돼."
태현은 기가 막혀 가슴을 씨근덕거렸다. 지영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몇 걸음 떨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찰 중 한 명이 그녀에게로 가 상황을 설명하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피해자를 위로하는 모양새였다. 가슴이 갑갑해서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경찰이 태현에게 말했다.
"접근 금지는 위반했지만 본인이 오려고 온 게 아니라서요. 지금 경찰이 조치할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를 떠나시라고 하는 것 말고는요."
태현 역시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날 밤, 태현은 악몽을 꾸었다. 밤의 어둠이 내린 산중 어딘가였다. 나무와 풀숲을 헤치며 태현은 도망치고 있었다. 무거운 공포가 그를 잔뜩 억눌렀다. 도망을 치려고 해도 다리가 너무 무거워 잘 움직이지 않았고, 비명은 목이 꽉 멘 듯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태현은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하지만 다리가 완전히 땅에 붙박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태현은 한쪽 다리를 붙잡고 움직이기 위해 힘을 쏟았다.
다리가 뜯겨 나갈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 태현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헉헉."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가득했다. 양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이런 꿈을 꾼 것은 다 지영 때문이다.
입이 썼다. 태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가 타는 듯이 아팠다. 꿈속에서 얼마나 힘을 썼으면 이럴까 싶었다. 주방으로 가 컵을 하나 들고 정수기 앞에 섰다. 컵을 대고 버튼을 눌렀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수인가 싶었다.1년에 한두 번쯤 이 빌라는 물탱크를 청소한다고 단수를 시켰다. 하지만 이번엔 어떤 공지도 없었다.

휴대폰에서 관리인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 몇 번 만에 전화를 받은 관리인은 단수는 없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태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침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출근하려면 씻는 일이 급하다.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수도 계량기가 잠겨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순간 반 층 위 계단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영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영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광기에 태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을 전혀 쉬지 못한 채 뭔가에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났다.

태현은 모든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기뻐하며 안길 듯 달려드는 지영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날이 좁고 긴 칼이었다. 그리고 칼은 배에 닿자마자 쑥 빨려 들어갔다. 비명 대신 꺽, 하는 이상한 소리가 목에서 새어 나왔다.
"킥킥킥."
지영이 웃었다. 아무 고통도 없는 것을 깨닫자 태현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찢어질 듯 커다랗게 뜬 눈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지영이 붙잡고 있는 칼의 손잡이가 배에 바싹 붙어 있었다. 칼날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칼날은 태현의 배를 뚫지 않았다. 그랬다면 곧장 주저앉았을 것이었다. 칼은 가짜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영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칼을 태현의 배에서 떼었다.

"100m 접근 금지?"
지영은 큭,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태현의 귓가에 붉고 매력적인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신고받고 출동하는 경찰이랑 나랑, 누가 더 빠를까? 그리고 이다음에도 계속 장난감 칼일까?"
태현은 얼어붙었다. 하지만 뇌 속에서 어떤 생각 하나가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못 걸렸다는 것.
법의 심판 전에는 반드시 ‘피해’가 있다는 것.
태현은 그날 즉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에도 사직서만 우송하고 사라져 버릴 작정이었다.

스토킹하던 태현을 피해 도망치듯 새벽 이사를 해야 했던 수연이 억울함과 답답함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선예였다. 처음엔 그런 회사가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해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속는 셈 치고 가 보지 싶어 명함을 들고 찾아왔다가 구원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회사의 규모는 물론이고, 의뢰인의 사연에 따라 체계적으로 담당 팀이 배정되는 시스템에 놀랐다.

"그놈 이사 간 곳은 저희가 가진 라인을 통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지 저희가 지켜볼 거고요. 혹여나 수연 씨에게 연락이 오거나 하면 바로 저희에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저희 수복 주식회사만의A/S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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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장소/한강

한강은 규모가 크고 거친 강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마철이 되면 한강 일대가 범람하기 일쑤였다. 따라서 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1960년대 이래 각종 노력이 진행됐다. 한강 상류에 소양강댐, 충주댐을 비롯한 각종 제어 시설을 만들었고 서울 일대에도 잠실보, 신곡보 같은 수중보를 제작하여 수위와 유량을 조절하고자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한강은 서울을 관통하는 강이 돼버렸고, 현재는 서울 일대의 한강 전체가 시멘트 블록으로 감싸여 있어서 생태적 복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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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인물/김유신

김유신(595년~673년)은 통일신라를 일구어낸 명장으로, 진골귀족이지만 출신이 금관가야 왕족이다. 법흥왕 당시 금관가야가 멸망하면서 편입된 것으로, 진골귀족내에서는 결코 중요한 위치라고 할 수 없었다.
의지를 돋우기 위해 말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명문 가문과의 혼맥을 도모하기 위해 누이를 화형에 처하려는 등 그의 야심을 드러내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김유신은 일찍부터 김춘추와의 관계를 도모했고 결국 김춘추는 이후 무열왕이 된다. 또 김유신의 누이는 김춘추와 결혼했고 이들의 자녀가 이후 문무왕이 된다.
김유신은 화랑 출신이다. 용화향도라는 무리를 이끌었고 고구려와의 낭비성전투를 시작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642년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인 압량주의 군주가 되면서 군권을 확보했고 이후 백제 원정 최고 사령관이 돼 승리를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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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한 팔을 길게 뻗고 엎드려 있던 김윤주가 몸을 일으켰다. 둔하게 게으른 몸집에 게으른 눈빛이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찐 얼굴이 하얗다. 생긴 거 상관없이 앳된 피부만으로도 충분히 예뻐 보이는 나이였다. 그러나 오로지 본인만 그걸 모르는 나이.

피해자 가족의 고통이 생생히 전해져 이규영도 눈시울을 붉혔다. 서민수 님 잘못이 아니에요, 라고 이규영은 말했지만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규영은 김윤주의 퇴로를 최대한 차단하기 위한 대화를 이어 갔다. 김윤주가 치치라는 존재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라라는 치치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알지도 못했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할 셈이었다.

김윤주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규영은 그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과 속으로 격렬하게 싸웠다.

@juNa-2-JunA

김윤주는 쪽지를 보고 머리를 득득 긁었다.
"네 트위터 계정 맞지? 닉은 쥬나."
김윤주가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계정은 삭제됐다. 비슷한 시각 김윤주는 텔레그램 계정도 삭제했다. 해외 기업이 운영하며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트위터나 텔레그램은 계정이 삭제되면 모든 활동 기록이 지워진다. 복구는 거의 불가능했다. 범죄 수사관에게 이 시대 사회 관계망 서비스는 양날의 검과 같았다.

"네 정신과 기록 다 뒤져 봤어. 넌 해리성 정체감 장애 진단을 받은 적이 없어. 넌 네 기분과 필요에 따라 다른 인격이 되는 흉내를 냈을 뿐이야. 스릴러 영화나 웹소설에서 많이 봤겠지. 어릴 적 상상의 친구가 아직 떠나지 않았거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이버수사팀은 ‘B시 초등생 살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인터넷 글을 저인망식으로 뒤졌다. 소속 연예인 악플러를 고발하기 위해 증거를 찾는 연예기획사 직원 못지않게 수사팀은 열성으로 찾았다.

소문은 트위터 공간에 가장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쥬나는 트위터를 기반으로 하는 자기 캐릭터 커뮤니티에서 주로 활동한 소위 네임드였다. 쏟아지는 정보 가운데 검토할 가치가 있는 걸 찾아 갈무리하고 계정주 인터뷰까지 마친 참고인 중에 ‘Pa­ci­fi­c Ki­ll’이 있었다. 퍼시픽킬은 쥬나가 ‘자캐와 오너가 일치’되어 ‘현실과 현피를 떴다’고 평했다.

특정한 세계관에 따라 개설된 커뮤니티에 각자 자기를 대변하는 아바타라 할 수 있는 ‘자기 캐릭터’들이 참여하면서 자캐 커뮤는 시작된다. 커뮤니티의 세계관과 규칙에 따라 자기 캐릭터들이 서로 소통하며 역할극을 즐긴다. 자기 캐릭터를 줄여 자캐라고 하고 자캐를 만든 본체인 사람은 오너라고 부른다. 오너는 참여하고 싶은 커뮤니티의 세계관에 걸맞은 자캐를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오너는 그럴듯한 서사를 부여하여 그림으로 자캐를 구현한다. 김윤주는 그림을 썩 잘 그렸다. 중학교 때 애니메이션 학원과 제빵 학원을 제법 열성으로 다녔다고 했다.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배운 그림 실력으로 훼손된 신체를 미화한 모습의 자캐를 종종 그렸다. 뇌가 반쯤 파손되었거나 한쪽 눈이 없거나 한쪽 팔이 없는 미소년.

김윤주가 뻐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존나 금지된 게 나에겐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거지. 간지 나잖아. 보통 사람들은 듣기만 해도 지랄, 펄쩍 놀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거지."
이규영은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어떤 심리인 건지 알 만은 했다.

"범죄자들이랑 똑같다고. 사람 죽이고 패고, 속이고 빼앗고. 하지 말라는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다가 잡혀서 여기 끌려오는 범죄자들. 물어보면 다들 쎄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더라. 사람들이 자길 무시해서. 자길 우습게 봐서 그랬다고."
자존감은 낮고 자기애는 높은 에고들.

김윤주의 말투와 태도가 조금은 협조적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라라가 된 건가? 라라와 치치는 이런 식으로 서로 경험을 공유하며 자캐 커뮤 활동을 이어 간 것일까? 가상 세계의 동업자? 아니, 역시 이건 다 김윤주의 연기인 거겠지. 다중인격 연기가 몸에 배어 필요할 때마다 자동으로 인격이 바뀌는 거겠지. 어쩌면 정말 자신이 다중인격이라고 믿고 있는 걸 수도.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규영은 김윤주가 관심을 잃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가도록 유도하는 데 집중했다.

이규영도 자신의 추론을 믿고 싶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자신의 야릇한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끔찍한 범죄의 형태로 상상을 현실로 옮겨 버린 소녀가 눈앞에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래 도덕관념이 희박한 애라고 치자. 현실에서 살인과 사체유기라는 범죄의 대가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몰랐을 리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김윤주는 촉법소년 연령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할 수 없고 보호처분에만 처할 수 있는 촉법소년의 한계는 만14세인데 김윤주는 미성년자가 곧 촉법소년인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었다.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테니까.

누군가가 있다.
이규영은 직감했다. 그날 낮에 김윤주는 누군가를 만났고 정우의 손목을 처분했다. 이 일을 조력하거나 방관한 누군가가 한 명 이상 있다. 텔레그램 메시지와 트위터 멘션, 디엠을 삭제한 것은 그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감추려는 것이다. 아무렴 이런 범죄를 오로지10대 소녀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하고 혼자만 알고 있을 리 없다.
안타깝게도 삭제된 텔레그램 메시지와 트위터 멘션, 디엠을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났다. 딱 하나만 빼고.

서정우와 김윤주가 그날 처음 만난 사이라고 한다면 가장 크게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었다. 정우는 삼촌이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처음 보는 여자가 말을 걸자 순순히 따라나섰을 뿐 아니라 여자와 마을버스를 타고 낯선 동네로 가서 여자가 사는 집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

서수경의 퀭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날 그 장면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언니와 엄마의 옷을 훔쳐 입고 나이 든 어른 여자인 양 꾸미고 나와 정우에게 말을 거는 김윤주. 무릎을 세우고 앉아 정우에게 눈을 맞추고 무슨 말인가 속삭이는 김윤주.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듯 선뜻 김윤주를 따라가는 정우의 모습. 이제 와 상상 속에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말릴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그날의 그 순간.

김윤주는 진짜로 서정우를 몰랐을까. 이규영은 사건을 접했을 때부터 일관적으로 가졌던 의심을 다시 꺼내 들었다. 김윤주는 그날 정우의 상황을 알고 정우를 노려 일을 저지른 것 아닐까.

이규영은 열심히 말을 늘어놓았다. 범죄 피해자 가족들이 범죄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원망하다 관계의 파탄을 맞는 상황을 진심으로 막고 싶었다. 어떤 말이 더 확실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이규영은 문득 입을 닫았다.
서수경이 의아한 눈으로 이규영을 보고 있었다.
"저… 왜 그러시죠?"
조재완 팀장이 긴장하며 두 사람 사이를 살폈다.
"오빠가… 정우 수업 끝나는 시간을 착각했다고요? 누가 그래요?"

"무슨 소리예요? 제가 그날 오전에 오빠에게 문자를 몇 번이나 보내서 일렀는데요. 오빠가12시 조금 전에 이제 출발한다고 전화도 했었는데? 사고가 나서 대로가 엄청 막히고 우회로로 간다고 했다가 길을 잘못 들고 그래서 늦은 거라고. 저에겐 그렇게 말했는데. 형사님이 오빠에게 직접 들은 말이에요?"
"네. 일전에 결혼하실 분이랑 같이 경찰서에 오셔서 제게…."

"그 여자가 왔어요? 윤다해 그 여자가 오빠랑 같이 왔다고요?"
"아, 네… 그게…."
"그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가 어디라고 오빠랑 같이, 네? 그것도 결혼할 사이라며 나타나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지가 뭐라고. 새빨간 거짓말쟁이 주제에.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치는 서수경을 올려다보며 이규영은 생각했다.
약혼녀 이름이 윤다해인가 보구나.
생각해 보니 이규영은 서민수와 불쑥 동행하여 나타난 약혼녀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었다.

"그거 알아요, 형사님? 아무리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정말 별짓을 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 돼요."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럼 내가 좀 행복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그래서 정우를 죽였니?"
오싹한 기분에 이규영은 화도 나지 않았다.
김윤주는 어깨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놀랍도록 빠르게 슬픈 표정이 되어 시무룩하게 말했다.
"정말 미안한데요. 그 아이는 이미 죽었잖아요. 진짜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돼 버렸잖아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자신을 그만 좀 괴롭히라는 말이었다.

김윤주는 더 이상 인격이 바뀌는 시늉은 하지 않았지만 정우의 손목을 찾을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진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연락했느냐는 질문에는 극구 부인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했다. 진짜 사람의 손목을 가지고 싶었다. 가상 세계의 역할극에 빠져 있다 보니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어느 순간 희미해졌다. 그날의 일도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것 같고 아직까지 현실이라는 실감이 안 난다며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어떤 부분은 모호하게 선택적으로 자백했다.

이규영은 결전의 마음을 다졌다. 이규영의 생각이 옳았다. 김윤주의 뒤에는 누군가 있었고 이규영은 그 사람을 찾았다. 진실게임의 대상이 이제 두 명으로 늘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이규영의 전략이었다.

김윤주는 알렉산드리아의 겨울 커뮤 활동이 끝나고도 윤다해와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 갔다고 했다. 윤다해에게 호감을 느낀 김윤주가 먼저 연락했다. 둘은 세실리아 황제와 올가 근위대장이라는 서로의 역할에 심취해 있었다. 김윤주에게 윤다해는 여전히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이었다. 어떤 가학적인 명령이 떨어져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절대군주였다.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언제든 커뮤 세계관으로 돌아가 역할극을 하며 놀았다. 나중에는 어떤 것이 일상적인 대화이고 어떤 것이 역할극 대화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절대 황권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의 군주, 탐욕스러운 세실리아 황제는 계속하여 인육을 원했다. 김윤주에게 언제까지 인육을 구해 오지 못하면 벌을 내리겠다고 했다. 명령의 강도는 점점 강해졌으며 김윤주는 압박을 느꼈다. 말미가 연기될수록 황제의 꾸지람은 혹독해졌다. 황제는 이달 말일이 최종적인 말미이고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거라고 했다. 김윤주는 인육을 바치지 못하면 세실리아 황제가 자신을 떠날 것 같아 초조해졌다.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 나의 주인, 나의 모든 것. 세실리아 황제가 나를 떠난다면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모두 끝나 버릴 것만 같았다고 김윤주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라라가 고통스러워하자 치치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라라는 말릴 수 없었다. 고통이 강해질수록, 현실과 가상 세계와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잔혹하고 냉정한 치치의 힘은 커져만 갔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왜 서정우였냐고?"
이규영의 차가운 말투에 김윤주는 입술을 한번 씰룩이더니 답했다.
"세실리아 님이 남자 친구랑 함께 걔 학예회에 간 적 있었는데요, 걔 손이 이쁘다고 했어요. 조그만 손으로 바이올린 켜는 게."
"정우 손이 예쁘다고 했다고?"
"네. 갖고 싶은 손이라고… 먹고 싶다고… 아주 탐난다고 하셨어요."
이규영은 울컥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참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요. 이왕 선물 드릴 거 걔를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김윤주는 거친 숨을 씩씩거리며 내쉬었다. 이규영은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윤주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불안을 더 키워 줄 때였다.
"안타깝다. 너는 세실리아 황제에게 이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세실리아 황제에게 인육을 바치기 위해. 오직 그것을 위해8살짜리 아이도 죽이고 이렇게 범죄자가 되었는데 말이야. 온 국민이 지탄하는 범죄자. 앞으로20년간 감옥에서 청춘을 바치며 썩어 갈."
이규영은 몸을 숙여 김윤주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속삭였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봐. 세실리아 황제가 너에게 원한 건, 정말 인간의 손목이었을까? 너희들 사이에만 통한다는 그 세계관인가 뭔가 그것대로?"
"…네?"
"세실리아 황제는 사람의 신체 일부나 인육에 관심이 없어. 너와 달라. 그 망할 놈의 잔혹한 세계관 따위. 너희들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종족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세계관 따위 너와 공유하고 있지 않아. 그 여자에게 너는 알렉산드리아의 올가 근위대장이 아니야. 그냥 시키면 살인까지 해 주고 혼자 뒤집어써 주는 호구일 뿐이지."
"뭐라고요?"
"그럼 네 꼴은 지금 어떻게 되는 걸까?"
이규영은 그 순간 김윤주의 내면에서 뭔가 폭삭 주저앉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윤다해는 움찔하지도 않고 이규영의 시선을 맞받았다. 거짓말을 들켜도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병적인 거짓말쟁이의 눈빛이었다. 이규영은 이런 눈빛을 한 범죄자를 몇 알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윤다해 옆 너무 가까운 곳에 김윤주가 있었던 것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참극을 낳았다. 가상 세계의 역할극에 심취해서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정신이 불안한10대 소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윤다해도 시도해 봤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윤다해의 악의가 감경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윤다해가 이 범행에 계획적으로 깊게 관여했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하고 말겠다고 이규영은 다짐했다.

물러서야 할 마지막 지점을 찾아 물러선 윤다해는 여유를 찾았다. 입에 기름을 칠한 듯 말이 술술 나왔고 그 이상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공범 둘 사이에 오간 연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윤주조차 윤다해의 살인 교사를 인정하는 진술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규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탄식했다.
김윤주는 순진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간식으로 넣어 준 초콜릿 음료에 빨대를 꽂아 빨았다. 그 모습을 보니 이규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규영은 목 안으로 쓴 물이 올라오는 걸 겨우 삼켰다.
"윤주야. 김윤주."
알렉산드리아라는 세계의 역대 가장 잔혹한 군주의 오른팔, 올가 근위대장은 굼뜨고 게으른 눈빛으로 이규영을 보았다. 어떤 명령이 떨어지든 맹목적으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어쩌면 그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
"너는 금방 잊힐 거야."
이규영은 맞은편 벽을 바라보며 슬프게 단언했다.
"앞으로 너보다 더 악한 아이가 나타나겠지."
믿기 싫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었다. 눈앞의 괴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잊힐 거고, 시간이 갈수록 악인의 명단에서 점차 낮은 순위로 내려올 것이다. 그가 숭배하는 세실리아 황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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