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다 봤죠들? ―그 인간 말로가 결국 이렇게 됐군! 그렇게 우릴 핍박하더니만. 갑자기 사라졌길래 뭔 일이 있긴 있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설마 이렇게 됐을 줄은. ―와, 전 진짜 충격! 그냥 어디 찌그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요, 이런 상황이면 누가 죽인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기사를 보던 창에서 메신저 창으로 넘어간 한경은 바로 다음에 뜬 메시지에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난 동의. 근데 누가 죽였을까?
입술 안쪽을 질끈 씹었다. 재빨리 공소시효를 찾아보기 위해 검색 앱을 띄웠다. 하지만 이내 현실을 자각하고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고작3년이었다. 김 교수가 실종되자마자 죽었다고 해도 살인의 공소시효가 그보다 짧을 리는 없다. 한경이 짧게 숨을 뱉어 내며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드러나고 마는 건가.…잡히게 될까? 심장이 제어하지 못할 박동을 지속하는 중에도 메시지들이 다시 이어졌다.
연구실 막내였던 최순창의 메시지에 한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특유의 깐죽거리는 농담이 술자리에서 나왔다면 웃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곤두선 신경을 짜증스럽게 긁어 대는 헛소리로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농담이나 할―’, 빠른 타이핑으로 메시지를 쓰다가 멈췄다. 정신 차려, 박한경. 지금 여기서 이러면 괜한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어. 화살표 버튼을 길게 눌러 대화창에 썼던 글을 단번에 지웠다.
예상했던 대로 김 교수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얘기였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한때 김민규 교수는 질병 치료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전자 연구 학자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우연히 출연한 방송에서 대중적 언어로 쉽고 재미있게 자신의 분야를 설명한 게 계기였다. 유명세를 치르면서 관련 분야의 연구를 지원하는 재단은 물론, 유수의 대기업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앞다퉈 연구비를 대겠다고 나섰다. 거기에2015년을 기점으로 유전자가위 기술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커지자, 한국 대중에게 그 분야의 유일한 전문가로 인식된 김 교수가 과학 분야는 물론 정치, 경제 분야 뉴스에까지 도배되었다. 그 시류를 타고 김 교수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스타 과학자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3년이 지나서야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전화를 끊었지만 한경의 얼굴에 떠 있던 경계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선이 자연스레 전화기를 쥔 손목 아래로 향했다. 커다란 몬스테라 잎으로 이어지는 녹색 줄기의 문신이 시작되는 곳으로.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연희의 뚝뚝 끊기는 말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번은 어느 연구원이 반려묘가 죽어서 얼마간 힘들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정 봐주지 않고 실험 성과를 독촉하는 바람에 연구원들 사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성실은 오히려 공사 구분 못 하고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 연구원이 더 문제가 아니냐며 반박했고, 완성된 논문이 해외 저널에까지 소개되면서 결국 성실을 향했던 비난은 수그러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이 박사에게 성실은 ‘실험실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 박사는 순창에게 설명하면서 화가 조금씩 진정됐다. 몸을 책상에 기대며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박 박사는 연구실 단톡방에 그걸 비교하는 수치를 정리해서 올리며 언론에 까발리자고 한 거야. 다들 우리가 그간 핍박받았단 사실을 수치로 보니 더 흥분하고 분노해서, 모두 그러자며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할 거 같은 분위기가 됐던 거지.…근데 너도 알지? 사람들은 그러다가도 금방 식어. 감정을 그냥 말로 털어놓는 것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거니까. 우린 그냥 김 교수 욕이나 하고 말 생각이었어. 하지만 박 박사는 달랐던 거지, 우리랑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결국 다음 날 기자들까지 불렀어."
김 교수는 즉시 한경을 뺀 연구원을 모두 초대해 따로 단톡방을 열었다. 해외에서만 공부한 한경이 한국의 연구 환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한 거라고 설명하며, 최근 새롭게 지원받은 연구비는 연구원들에게 자율권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한경에게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만 하면 향후 최고의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도 했다. 연구원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한경과 함께 있던 단톡방을 나왔다. 결국 다음 날 기자들을 맞은 연구원은 한경 혼자였다. 그마저도 김 교수의 신고를 받은 경비원에게 쫓겨 학교 정문 밖에서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온라인에 기사 몇 건이 올라오긴 했지만 하루 이틀 사이 자취를 감추었고 사건도 묻혔다.
민규는 홀로 중얼거리며 점차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전혀 다른 표정이 된 민규가 룸미러로 슬쩍 성실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작게 헛기침 소리를 내고는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어…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네? 연구실…?" "가까운 모텔로 가, 모텔. 좀 쉬었다 들어가자." 한 손을 파닥이며 가벼운 말투로 민규가 말했다. 성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으며 파리해졌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민규가 막 두 눈을 감으려고 할 때, 성실이 다급히 입을 뗐다. "교수님, 죄송한데. 제가 또 대상포진이 올라와서." "뭐? 하, 너는 왜 그렇게 몸 관리를 못 해서 맨날 그 지랄병을 달고 살아? 내일이면 마누라도 연주회에서 돌아오는데. 알았어, 연구실로 가. 쯧!" 성실은 말없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클래식 채널에 맞추고 볼륨을 낮게 설정하자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차 안을 채웠다. 차는 음악의 리듬에 맞춰 일정한 속도로 연구실을 향해 달렸다.
담당자는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깊게 숙였다. 연구비가 끊긴 후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스타트업 회사의 자문 계약 해지 통보였다. 한경은 일방적인 통지에 화가 났지만 표정을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건물을 나서며 한경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바보같이! 김 교수가 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회사의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한경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건물에 드나드는 학생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자신도 저 나이 땐 저렇게 풋풋하고 생기가 넘쳤을까 싶어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관찰자 입장에서 자신을 회상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쨌든 적어도 지금보단 생기가 넘쳤겠지. 지금은 하루하루가 날카로운 송곳 위를 걷는 기분이니까. 생각의 흐름을 따라 한경의 이맛살이 한껏 찡그려지고 있을 때, 종이 상자를 안은 순창이 도서관 앞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슬금슬금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서 누군가의 눈에 띌까 봐 두려워하는 티가 났다.
순창은 항상 존댓말로 대해 주는 한경이 고마웠다. 언젠가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경의 부모님은 미국에서도 집에선 한국어만 사용하도록 교육하면서 반말도 금지했다고 했다. 그 덕에 순창은 보통의 연구실 막내라면 거의 들을 수 없는 존댓말을 한경에게만은 듣고 지냈다. 순창이 연구실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경이 쫓겨나는 바람에 비록 그 기간은 짧았지만.
며칠 후, 한경은 작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초조한 듯 마주 쥔 두 손을 계속 움직거리고 있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동안, 프로젝트로 진행하던 실험과 논문 초안 작업은 물론, 연구실 재정과 관련한 일도 성실을 거쳐야 했기에 함께 일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함께 ‘일한’ 시간일 뿐이었다. 다른 연구원들과 달리, 성실과는 친분을 쌓기가 쉽지 않았다. 연구실 내의 유일한 여성 연구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실 스스로가 높은 벽을 주위에 두른 채 자리를 내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팀워크 차원에서 협조가 필요한 일에도 사생활이 관여되면 정색하고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성실에게 친한 사이끼리도 쉽지 않을 이야기를 해야 했다. 너무도 개인적이고도 수치스러울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다시 안부를 묻고 연구 프로젝트를 묻는 식으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한경은 여전히 두 손바닥을 마주 댄 채 차오르는 식은땀을 비벼서 날리기라도 하려는 듯 문질러 댔다. 점원이 주문했던 음료를 가지고 나타나면서 잠시 말이 끊겼다.
뜬금없이 띄운 화제에 성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주스를 한 모금 빨아올리곤 답했다.
한경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성실이 그 얼굴을 잠시 마주 보다가 백팩에서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경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손수건으로 향하려는 찰나, 성실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목소리 톤을 바꿔 날카롭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절 보자고 하셨어요? 박사님과 제가, 이런 담소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한경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떴다. 잠깐 고민이 됐지만 지금 와서 물러설 순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곤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소,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문요?" "저, 기 박사님이 김 교수에게… 성 착취를 당하신다는." 한경은 차마 성실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낮춰 말끝을 흐렸다. 순창은 성실과 김 교수의 관계가 상호합의에 의한 거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한경은 상식적으로 위계에 의한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한경의 귓가에 들려온 건, 어조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담담한 성실의 목소리였다. "그래서요?" "…네?" "제가 성 착취를 당하고 있다… 쳐요. 그래서요? 그게 박 박사님과 무슨 상관이죠?"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 성실의 태도에 한경의 머리가 하얘졌다. 이런 상황으로 흘러갈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성실의 얼굴을 바라만 봤다.
한경은 실수를 깨닫고 급히 몸을 움츠렸지만 트인 공간에서는 그다지 효과가 없는 대처였다. 하지만 성실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앞으로 숙여 한경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느린 말투로 또박또박 얘기했다. "박 박사님, 양심에 손을-얹고-답해-보세요." 한경의 눈이 커졌다. 성실은 그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제겐 너무도 치욕스러울 수밖에 없을 그런-일을-정말로 절-생각해서-끄집어-내신 거예요? 진심?" 한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테이블로 떨어지고 입가가 일그러졌다. 성실이 옅은 조소를 입가에 머금고 백팩을 챙겨 일어서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박사님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제가 이제껏 희생하며 지켜 왔던 자리를 포기할 순 없어요. 곧 발표될 논문들이면 목표한 교수 임용도 코앞이에요. 박사님의 상황은 다 본인이 벌이신 일 때문이니까, 그 결과는 오롯이 스스로 감당하셔야죠. 그 똥물을 왜 저한테까지 튀기려고 하세요, 양심도 없이? 저는 제 길 알아서 만들어 갈 테니까, 박사님은 본인 길로 가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성실의 구두 소리가 가볍게 카페 바닥을 울렸다. 한경은 내리깔고 있던 눈을 결국엔 감아 버렸다. 그렇게 성실의 구두 소리를 따라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기회가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경은 착잡한 마음에 숨을 깊게 내쉬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떼려는데 성실이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손수건이 눈에 걸렸다. 평소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면 소중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연구실에 우편으로라도 보내 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 김민규 교수가 행방불명됐다.
쏟아지는 알람이 멈추길 기다리며 휴대폰을 쳐다보고 섰는데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까지 걸려 왔다.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한경의 뇌리를 스치면서 머리가 쭈뼛 섰다. 경찰이 나한테 연락할 일이 뭐가 있지? 게다가 내가 어디 있는지가 왜 중요한 걸까.
한경은 경찰을 상대로 답변을 미루는 건 현명하지 않단 판단에 위치와 상황을 곧바로 설명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한경의 말이 빨라지며 목소리가 커졌다. 경찰이 갑자기 자신을 찾는다면 미국에 계신 부모님이 유일한 이유였다. 하지만 다급한 물음에도 건너편에선 침묵만 유지했다. 답답해진 한경이 더욱 소리를 높여 상대방을 불렀다.
한경은 순간적으로 하 경사의 말을 인지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고 머리가 하얘졌다. 김 교수가 실종되었다고…? 속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해 봤지만 여전히 그 문장이 갖는 현실감은 영점, 제로였다.
전화를 끊은 한경은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경찰서로 왔다. 진술 녹화실에 홀로 앉아 있는 한경의 얼굴은 초췌함, 그 자체였다. 병원에 입원까지 해서 치료받긴 했지만, 난생처음 앓았던 대상포진의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신체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퇴원하자마자 김 교수의 실종 건으로 조사를 받게 되자 심적 부담이 신체로 다시 고스란히 옮겨 간 거 같았다. 명치 부분에 답답한 느낌이 들자 한경은 주먹으로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경은 생수병을 받아 단숨에 반을 비웠다. 전화를 받은 이후부터 바싹바싹 입이 말랐다. 경찰이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최근 상황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가정할 테니까.
한경은 거리낄 게 없었지만 그 눈빛을 받아 내야 하는 상황이 묘하게 꺼림칙했다. 자신은 떳떳하지만 자칫 오해라도 사면 평생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한경이 하 경사를 마주 관찰하며 오른 소매를 걷었다. 그런데 손목에 몬스테라 줄기의 문신이 드러나자, 하 경사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이걸… 찾으시던 겁니까?" "김 교수님 실종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납치입니다만." "네? 납치요?!" 한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멍한 표정이었다가 이내 상황을 깨달은 듯 표정이 심각해졌다. 몸을 앞으로 숙이며 황급히 물었다.
흥분한 한경의 태도에 놀랄 법도 한데, 하 경사는 동요 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한경의 눈조차 피하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페이지 하나를 찾아 멈추곤 거기에 쓰인 문장을 또박또박 읽었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말을 마친 하 경사가 시선을 치켜뜨며 한경과 다시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의 부드러웠던 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매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목격자가 연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경은 평소에 연희를 많이 아껴 주었다. 김 교수가 연구실의 박사들을 동원해 자기 아이를 가르치게 하는 건 상식적이지 않은 행태였고 한경이 비난하던 일의 일부였지만, 그래도 한경은 연희를 대할 땐 성심을 다했다. 김 교수의 자식이라고 해도 아이는 그와 별개의 인격체였으니까.
원망스러운 마음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희가 왜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이상했던 건, 연희가 사실이 아닌 말을 만들어 냈을 리도 없다는 거였다. 그런 사고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내 문신을 언급했을까? 그날 정말 나를 보기라도 한 걸까?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연희가 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희의 정신세계는 한경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있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연희의 증언을 부정할 만한 다른 증거를 확보하는 거였다.
김 교수는 여전히 실종 상태였다. 경찰은 몇 번 더 한경을 찾았지만 모두 사실 확인을 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오늘은 성실이 가장 오랜 시간 조사받았지만 연구원들에 대한 혐의는 이제 모두 걷혔고, 경찰은 유력 용의자로 한 조직폭력배의 행방을 쫓는 중이라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걸 확인한 한경이 드디어 미뤘던 전화를 걸었다. 꼭 얼굴을 보고 지난 일을 사과하고 싶다며 만남을 꺼리던 상대를 설득해 약속을 잡았다.
한경은 두 달여 전 성실을 만났던 카페로 걸어 들어갔다. 당연한 기시감이 오히려 생소했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는 성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날과 같은 테이블, 같은 자리에, 같은 옷차림의 성실이 있었다. 어중간한 시간이라서인지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도 직원 한 명만 홀로 분주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성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짜증 섞인 말투로 답하던 찰나, 한경이 성실의 왼쪽 팔을 붙잡곤 재빨리 토시를 잡아당겨 벗겨 냈다. "무슨 짓이에요!" 성실이 기겁해 소리치며 한경에게 잡혔던 손을 빼냈다. 황급히 오른손으로 왼 손목을 가렸다. 한경을 쏘아보는 눈빛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한경은 예상했던 흔적을 이미 확인한 후였다. 착잡한 눈초리로 시선을 옮겨 성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손목에 나뭇가지가 있었어. 연희가 말했다는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계속 되뇌다 결국 깨닫게 됐다. 그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한경이 어릴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누나의 몸에서였다.
미국 이민 생활 초기,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던 한경과는 달리 내향적이었던 누나는 오랜 시간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살아온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한참이 걸려서야 함께 다니는 친구 몇이 겨우 생겼다. 그러나 그들은 한경의 누나를 교묘하게 농담거리로 삼아 놀리거나 돈을 갈취하기 위해 친구인 척했을 뿐이었다. 장난삼아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는 것을, 누나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됐다. 하지만 누나는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고통을 숨기면서 잘 지내는 척 연기를 했다. 이젠 친구들이 생겨서 괜찮다고, 즐겁게 학교생활도 하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참아 낸 고통과 아픔은 밤에 혼자가 되었을 때, 잘 보이지 않는 몸의 한 곳에 칼로 새기며 버텼다.
마음의 상처는 아물 수 없었지만 칼이 들어간 자리엔 새살이 돋았다. 허벅지 안쪽 하얀 속살에 핑크빛 나뭇가지가 하나씩 뻗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뭇가지의 색이 어두워지면 그 위로 새로운 가지가 더해졌다. 그렇게 하나둘 겹치던 나뭇가지들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위로, 더 위로 자라나 누나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압박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누나의 심장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쪼개져 버렸다. 부서진 심장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마무리는 나뭇가지가 더 이상 자라지 않게 하는 거였다. 가지가 밖으로 드러나 가족들에게 들키기 전에 끝을 내는 거였다. 그렇게 부모님을, 한경을 떠났다.
그래서 한경은 확인해야 했다. 전에 카페에서 마주한 성실의 태도는 한경의 상식을 너무도 벗어나 있었다. 김 교수의 온갖 수발을 든 것에 더해, 성 상납 소문에까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건 납득하기 힘든 위화감까지 불러일으켰다. 당시엔 미처 그 이유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연희의 말이 가슴에 묻었던 아픔을 상기시키자,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성실 또한 누나처럼 아픔과 분노를 억누르고 버텨 내기 위해 비슷한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걸 일상적인 방법으로 감추었을 거라고. 한경은 성실이 그동안 감내해야 했을 고통을 상상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경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담했던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김 교수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모든 걸 던졌지만 연구원 하나의 일탈 행위로 취급되며 끝이 났다. 모든 수입원이 끊기고 연구 커리어마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김 교수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경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 교수의 비리는 여전히 꽁꽁 감춰진 채 영원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거였다.
성실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훗, 기억하시네요? 그래요, 내가 가장 잘하던 거. 숨 참고 버티기. 그렇게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어요. 가장 완벽하게, 놈이 이용하고 착취했던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아니, 그 이상 돌려줘도 남들이 전혀 의심할 수 없을 순간까지. 그렇게 모든 걸 단숨에 빼앗아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후련해 보이는 표정의 성실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한경이 얼어붙은 눈빛으로 그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안타까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춰 얘기했다. "하지만… 박사님이 저지른 짓은 정의 실현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예요. 기 박사님도 그걸 알잖아요?" 한경은 성실이 분노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일생을 바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잘못의 시작은 김 교수였지만 그 결과는 피해자인 성실이 고스란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의 속성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웠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한경의 눈을, 성실은 뚫어져라 바라봤다. 상대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결국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답답하다는 듯 얘기했다. "제가 언제 정의 실현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냥 되갚아 주고 싶었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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