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완벽한 고요가 건네는 위로

아침은 늘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더욱이 미술관 문을 열기까지 30분 정도 남겨두고 근무 자리에 도착하는 날이면 말을 걸어 나를 속세로 끌어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나와 렘브란트, 나와 보티첼리, 나와 실제로 거의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 믿어질 만큼 강렬한 환영들뿐이다.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 몇 주는 뇌가 반쯤 작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그 정도로 몰두가 됐기 때문이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 보통 한 전시실에는 네 면의 벽에 걸쳐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금테를 두른 ‘창문‘이 나 있다. 어느 창문은 돌벽을 단숨에 뚫고 바깥으로 이어져서 굽이치는 언덕과 요동치는 바다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창문은 창틀에 턱을 받치고 들여다보라는 듯 집 안의 광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혹은 고개를 들면 빤히 쳐다보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창문들도 있다.

모두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내 시선이 페르메이르가 즐겨 그렸던 조용한 집 안 풍경으로 가서 멈춘다. 뺨을 손으로 받치고 졸고 있는 하녀가 보이고, 그 뒤로는 잘 정돈되고 텅 빈 듯한 집 안의 모습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 특유의 빛을 받으며 펼쳐진다. 그림을 보다가 페르메이르가 포착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는 깜짝 놀랐다. 가끔 친숙한 환경 그 자체에 장대함과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가 바로 그 느낌을 정확히 포착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형 톰의 병실에서 끊임없이 들었던 느낌이었고, 쥐 죽은 듯 고요한 메트의 아침이면 떠올리게 되는 바로 그 느낌이기도 했다.

오늘의 첫 방문객이 도착한다. 나는 경비원이 서 있기에 좋은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서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작품들을 지켜보는 일을 하는 나는 이 작품을 본래의 의도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14세기 화가는 언젠가 예술품 비평가라는 직업이나 미술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교과서가 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나르도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다. 나는 예수의 그림들에서 새롭거나 미묘한 뉘앙스를 찾는 데 관심이 없다. 내가 이해한 건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의 그림은 고통에 관한 것이다. 고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느끼기 위해 그림을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림의 정수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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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사건/신간회운동

1927년에 결성된 좌우 합작 단체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하여 일제에 대항한 항일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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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1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

미술에 관해 내가 아는 모든 건 부모님에게서 배웠다. 대학생 때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공부한 어머니 모린은 자신의 아마추어적 열정을 형 톰과 누이 미아 그리고 나에게 전도했다. 우리는 적어도 1년에 몇 번씩 시카고 미술관으로 모험을 떠났다. 그곳에서 마치 도둑질을 준비하는 도굴꾼들처럼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고르며 살금살금 걸어 다니고는 했다. 어머니는 시카고 극단 소속 배우였는데, 시카고 극단에 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화려하거나 영화롭기보다 근면과 굳은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미술은 달빛 가득한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고, 여기에는 어머니의 영향 컸다.
아버지는 좀 더 완고한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 나름대로 여러 교훈을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근본적으로 예술만이 가진 특별한 힘에 반응하듯 그 위대한 그림에 반응했다. 다시 말해서 그림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음에도 이미 그것을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그때는 내가 느낀 감상을 말로는 분출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 그림의 아름다움은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물감과도 같이 과묵하고 직접적이며 물체적이어서 생각으로 번역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은 새 한 마리가 가슴속에서 퍼덕이듯 내 안에 갇혀 있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늘 어려운 일이다. 이제는 경비원으로서 수많은 방문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신비로운 감정에 반응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2008년 6월,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열한 살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며 그곳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한동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주 동안 형이 죽은 뒤 처음으로 내 삶이 방향을 잡았다고 느끼게 해준 일들을 지나오고 있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훈련을 받고, 뉴욕 주 운전면허 시험을 통과하고, 지문을 등록하고, 근무복 제작실에서 미술관의 재단사가 내 치수를 재고…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망을 보는 것. 두 손은 비워두고, 두 눈은 크게 뜨고,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소용돌이 속에 뒤앙켜 내면의 삶을 자라게 하는 것. 이는 정말 특별한 느낌이다. 기나길게 느껴진 몇 분이 더 지난 후,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나의 역할이 될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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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명문장/심리록

대저 시골이란 양반과 상민을 구분할 것 없이 정숙한 여자가 포악한 자들에게욕을 당하거나 나물을 캐다가 한번 끌려가기라도 하면 갑자기 바람을 피운다고 손가락질을 받아 온갖 오명을 쓰게 된다.
그러면 강간을 당했든 안 당했든 간에 바람을 피웠다는 모함은 자신이 죽을때까지 씻기 어려운 것이라서 방 안에서 목을 매 자결하기로 맹세하게 되니, 그 일은 어둠에 묻혀 밝혀지지 않고 그 심정은 잔인하고도 비장하다.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에게 호소해봤자 더러는 눈물을 훔치며 방문을 나서고, 더러는 남 보듯 하면서 다른 데로 가버리니, 적적한 빈 방에서 수치와 분노가가슴속에 교차되어 구차하게 살아보려 하여도 참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정조 때 사형 죄수에 대한 판례집인 《심리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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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학믄•철학/식민지 근대화론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제 강점기의 본질이 ‘지배와 수탈‘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때의 여러 경험이 근대화로 나아가는 귀중한 자산이 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선 일제 강점기 통치는 철저하게 본국을 위한 정책이었기 때문에 식민지가 경험한 근대화라는 것은 매우 부수적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극도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60년대 들어서야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시대 주요 산업 시설이 북한에 집중돼 있고 남한의 산업 성장은 지역적, 시기적으로 별도로 시작됐다는 것을 고려하면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 미화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식민지 근대성론이라는 것이 있다. 실증적으로 검토했을 때 일제 강점기 당시 광범위한 사회 변화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며 새로운 인식을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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