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7장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그로부터 불과 4개월 후, 타라와 나는 형이 누워 있는 침대곁을 번갈아 지키며 잠든 형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리를 죽인 채 텔레비전을 봤다.
그런 밤 중 하나였다. 늦은 밤, 크리스타 형수와 미아, 타라 그리고 내가 형을 돌보고 있었다. 형이 하는 말은 더 이상 앞뒤가 맞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형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치킨 맥너깃을 먹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맨해튼의 밤거리로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 한 아름 사 들고 돌아오던 그때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침대를 둘러싼 채 우리는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가득한 소풍을 즐겼다.

돌이켜보면 그 장면은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 수확>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까지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배경으로 농부 몇몇이 오후의 식사를 즐기는 모습 말이다. 배경 중간쯤 교회가 있고 그 뒤로 항구 그리고 황금빛 들판이 아스라한 지평선까지 굽이쳐 펼쳐진다. 화면 앞쪽에는 큰 낫으로 곡물을 거두는 남자들과그것을 한데 묶느라 허리를 굽힌 여자가 보인다. 맨 앞쪽 구석에는 일을 하다가 배나무 아래에 앉아 식사를 하는 아홉 명의 농부들이 다소 희극적이면서도 애정을 담아 묘사되어 있다.

브뤼헐의 이 명작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러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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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학문•철학/3S정책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문화 정책, 스크린(screen, 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를 통칭하여 3S라고 부른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정반대의 문화 통치 전략을 구사한다. 박정희 정권기, 특히 유신 정권기에는 문화적 박해가 대단했다. 당시 유행하던 남성의 장발과 여성의 미니스커트를 규제했고, 노래 가사부터 영화 장면까지 검열을 자행했다. 길 가던 남자들을 잡아서 현장에서 가위로 머리를 자르거나자를 들고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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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예술가들도 메트에서는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가 "쇼"라고 부르는 이런 특별 전시회에서 근무하는 것을 대부분의 동료들은 꺼린다. "너무 서커스 같아." 누군가가 투덜거린다. 쇼를 경비한다는 것은 서로를 밀치거나 구시렁대면서 몰려드는 끝없는 관람객 무리를 관리하는 것인데 이건 대개 위엄 있는 분위기에 익숙한 B구역 경비원들에게는 악몽 같은이야기다. 나는 예외다. 특별 전시회에서 나는 전시실 안의 에너지, 작품이 종종 기대 이상이거나 혼란스러울 때 나오는 반응들,
"청색 시대!"라고 외치듯 속삭이는 사람들에게서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받는다. 나는 B구역 대장에게 내키는 만큼 나를 특별전에 배치해달라고 말한다.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그는 수락했고 그렇게 4개월 남짓한 기간에 200시간은 거뜬히 피카소의 드넓은 머릿속을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몇 주 후 나는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근무 구역이 배정되기를 기다리며 《뉴욕타임스》 신문을 펼쳤고 파리에서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레제, 모딜리아니 작품이 도난당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접했기 때문이다. 어느 도둑이 야밤에 혼자 창문을 깨고 침입해 총액 1억 달러 상당의 근대 예술품들을 챙겨 파리 16구로 사라져버렸다. 이 사건은 겉모습으로는 어떤 혼란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미술관이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재차 상기시켜준다. 이곳은 자물쇠가 달린 금고가 아니다.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 한 미술관은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모든 약점과 속임수에 맞서야 한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차림의 바빠 보이는 사람들한테는 취하지 않을 태도로 경비원들을 대한다. 전시가 마음에 들 때는 곁으로 다가오며 우리가 평생 이토록 아름다운 걸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전시가 예술인 척하는 콧대 높은 헛소리라고 생각할 때는 ‘당신과 나 빼고 모두가 이 개똥 같은 걸 좋아하는 것 같다‘는 메시지를 담은 눈빛을 보낸다. 아무래도 이건 유니폼 때문인 것 같다. 유니폼은 우리를 부자에게든 서민에게든 누구에게라도 공감해줄 것 같은 허름한 신사 정도로 보이게 한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관심을 구걸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약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쓰인 천박한 배지를 옷깃에 달고 있었다면 방문객들은 우리를 업신여겼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미술관 경비원들은 그런 배지 따위와는 정반대다. 우리가 침묵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만 누구라도 다가가서 방해해도 괜찮다는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한 관람객이 미동도 하지 않는 조지아의 얼굴 사진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다.
목격하는 순간에는 이것이 초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지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카메라 뒤의 남자는 그가 현실을 더 꽉 움켜쥐고 있는 기분이 들 것이다. 손 틈새로 금세 빠져나가버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우리는 소유, 이를테면 주머니에 넣어갈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소유할 수 있다면?
이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전시실 안의 낯선 사람들이 엄청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하루가 끝난 후 86번가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우물처럼 샘솟는 연민의 마음으로 동승자들을 둘러본다. 평범한 날이면 낯선 사람들을 힐끗 보며 그들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들이 나만큼이나 실존적이고 승리하고 또 고통받았으며 나처럼 힘들고 풍요롭고 짧은 삶에 몰두해 있다는 사실을. 입원해 있는 톰을 방문한 후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던 때를 기억한다. 누구라도 심술을 부리거나, 실수로 부딪힌 다른 승객에게 쏘아붙이면 그게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고 무지해 보였다. 우리 모두 그럴 때가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밤은 운이 좋다. 낯선 사람들의 피곤하거나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 얼굴들을 애정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주제, 그러니까 이 세상과 그 모든 아름다움에 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미켈란젤로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를 알지언정 막상 그의 작업실이나 페르시아의 세밀화가, 나바호족의 바구니 짜는 장인의 작업실 등등 예술의 현장에 가면 자신의 무지를 얼마나 압도적으로 실감하게 될 것인가. 심지어 그 예술가들조차도 거대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기 일쑤인 이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도 메트에서는 길을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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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문화/채용신

조선 말기 화가로, 아마 채용신(1850년~1941년)의 그림만큼 역사책에 자주 인용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영조의 초상화를 복원하고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다. 또 흥선대원군 이하응, 최익현, 황현 등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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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에게서 빛은 빠질 수 없는 것.

5장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

음악은 알 수 없는 리듬을 따라 내가 예상하는 음계에서 항상 조금 위나 아래에 있는 음들로 이어진다. 나는 이것이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곽희의 아들에 따르면 이 거장은 보통 수시간 동안 명상을 한 다음 손을 씻고, 팔을 휘젓듯 단번에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냈다고 한다.

곽희는 풍경화가 "일상 세계의 굴레와 족쇄"로부터 "두루미의 비행과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까운 벗이 되는"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한다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반드시 글자 그대로 자연 속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그림 안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자연과 작가의 마음이 적절히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곳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떠한 원숭이나 두루미보다도 곽희 본인이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벗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이 그림을 완전히 흡수하고 감상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에 나는 그것이 보여주큰 세상의 충만함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건초더미 Haystacks>는 모네가 사계절에 걸쳐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를 그린 연작의 일부다. 하품을 하면서, 나는 그가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이해한다. 실내에서도 이 시간대에는 모든 것이 더 나른해 보인다. 심지어 그림들까지도 잠들 준비가 되어 보인다.

<여름의 베퇴유Vétheuil in Summer>라는 제목의 풍경화가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바짝 다가선 나는 내 눈이 이 허구의 세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 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다만 모네의 세계에는 흔히 아는 햇빛 대신 색채만이 존재한다. 이 작은 우주의 훌륭한 조물주답게 모네는 햇빛을 나타내는 색깔들을 펼쳐두었다. 펼치고, 흩뿌리고, 엄청나게 숙달된 실력으로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고정해두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 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시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고, 에머슨은 이를 "눈부심과 반짝임"이라고 표현했다. 이 그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녹아내리는 수백만 개의 아롱진 반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옛 거장들의 상징주의적인 표현법에는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미학이고, 정돈된 상태를 추구하는 우리의 두뇌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는 더 혼돈스럽고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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