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에게서 빛은 빠질 수 없는 것.

5장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

음악은 알 수 없는 리듬을 따라 내가 예상하는 음계에서 항상 조금 위나 아래에 있는 음들로 이어진다. 나는 이것이 선입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흡수할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종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곽희의 아들에 따르면 이 거장은 보통 수시간 동안 명상을 한 다음 손을 씻고, 팔을 휘젓듯 단번에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려냈다고 한다.

곽희는 풍경화가 "일상 세계의 굴레와 족쇄"로부터 "두루미의 비행과 원숭이의 울음소리가 우리의 가까운 벗이 되는" 곳으로 도피할 수 있게 한다는 글을 남겼다. 하지만 반드시 글자 그대로 자연 속이라고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그림 안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자연과 작가의 마음이 적절히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곳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떠한 원숭이나 두루미보다도 곽희 본인이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벗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눈으로나 마음으로나 이 그림을 완전히 흡수하고 감상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기에 나는 그것이 보여주큰 세상의 충만함을 흡수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됐다. 우선 작품에서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이 솔깃해할 만한 대단한 특이점을 곧바로 찾아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낸다. 뚜렷한 특징들을 찾는 데 정신을 팔면 작품의 나머지 대부분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어느 예술과의 만남에서든 첫 단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그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눈에게 작품의 모든 것을 흡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건 좋다‘, ‘이건 나쁘다‘ 또는 ‘이건 가, 나, 다를 의미하는 바로크 시대 그림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상적으로는 처음 1분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해선 안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건초더미 Haystacks>는 모네가 사계절에 걸쳐 하루 중 각기 다른 시간대를 그린 연작의 일부다. 하품을 하면서, 나는 그가 왜 그런 시도를 했는지 이해한다. 실내에서도 이 시간대에는 모든 것이 더 나른해 보인다. 심지어 그림들까지도 잠들 준비가 되어 보인다.

<여름의 베퇴유Vétheuil in Summer>라는 제목의 풍경화가 시야에 가득 찰 정도로 바짝 다가선 나는 내 눈이 이 허구의 세계를 실감 나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한다. 마을과 강 그리고 강에 떠 있는 마을의 물그림자가 보인다. 다만 모네의 세계에는 흔히 아는 햇빛 대신 색채만이 존재한다. 이 작은 우주의 훌륭한 조물주답게 모네는 햇빛을 나타내는 색깔들을 펼쳐두었다. 펼치고, 흩뿌리고, 엄청나게 숙달된 실력으로 끝없이 반짝이는 모습을 캔버스에 고정해두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그림은 점차 풍성해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시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고, 에머슨은 이를 "눈부심과 반짝임"이라고 표현했다. 이 그림의 물결 속에서 흔들리며 녹아내리는 수백만 개의 아롱진 반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옛 거장들의 상징주의적인 표현법에는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 유형의 미학이고, 정돈된 상태를 추구하는 우리의 두뇌가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는 더 혼돈스럽고 타오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모네의 그림은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의 입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드문 순간들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산들바람이 중요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옹알거리는 소리가 중요해지고, 그렇게 그 순간의 완전함, 심지어 거룩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할 때면 가슴에 가냘프지만 확실한 떨림을 느낀다. 이와 비슷한 느낌이 모네가 붓을 집어 드는 영감이 되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지금 이 그림을 통해 모네가 느꼈을 전율이 내게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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