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의 기준 목표가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보통 생애 주기를 성공과 실패로 정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인기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수식어를 붙여 쿼터라이퍼를 조롱하는 용도로 사용하고는 한다.
이 시기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또 다른 원인은 어느 시기든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유행을 타면 다들 그 단어에만 집착하는 풍조다. 이렇게 한 세대에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는 그 세대가 쿼터라이프에 진입했을 때 이루어지고는 한다. 과거의 ‘밀레니얼’, 최근 ‘Z세대’를 보면 알 수 있듯, 특정 세대를 일컫는 말은 ‘요즘 애들’(이것도 흔히 쓰는 말이다)에게 주로 사용된다. 세대를 지칭하는 말인데도 그 세대만의 특징보다는 특정 나이대를 묘사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이는 막대한 혼란과 오해를 낳는 심각한 문제다. 현재 많은 밀레니얼이 정확히 쿼터라이프 시기를 지나고 있고 나머지는 중년에 진입했다. 매일 더 많은Z세대가 쿼터라이프에 진입하고 있으나 대다수는 청소년기와 아동기에 머물러 있다.세대와 생애 주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같은 나이대에 속한 사람들이 전부 똑같은 것도 아니다. 한 세대를 향한 편견은 다른 세대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역사적으로는 미국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생성된 후, 다른 인종과 다양한 경제적 계층의20대와30대에게 투사되었다. 게다가 이런 편견은 주로 무시하고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 같다. 연장자가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통탄할 때 활용되는, 정말이지 오래되고 지겨운 현상이다. "역사상 어느 시기든 노인들은 요즘 젊은이들이20년 전의 젊은이들만 못하다고 말하면서 새롭고 진실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이1968년에 기록한 씁쓸한 관찰이다.
나는 쿼터라이프 시기를 지날 때 "끝없이 도약하려 애쓰지만 발조차 떼지 못하는 상황"을 줄곧 견뎌야 했고, 내 또래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담을 시작한 후로는 같은 상황의 내담자도 거듭 마주치게 되었다.
쿼터라이프는 여성의 가임기와 겹치기 때문에 결혼과 양육에 관한 고민, 혹은 두 과제를 해야만 한다는 확신이 커지기 마련이다. 성역할은 단호하고 답답할 때가 많다.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여성이 쿼터라이프에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희망과 야망"을 향한 본능이라든지 "삶의 의지와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의지"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고 기대하는 수동성과 의존성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겪은 다양한 정서적?신체적 증상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쿼터라이프는 전 세계적으로 신화와 민담에서 가장 자주 묘사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권에는 쿼터라이프에 관한 구비문학이 전승되는데 이는 그저 흥미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젊은이를 향한 심리 교육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의 귓가를 맴돌던 이야기들은 명확하게 말해주었다. 삶에는 성공과 좌절이 있을 테고 좌절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좌절을 이겨낼 방법이 있다고, 그 방법은 이상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위험과 혼란을 이겨내면 더 나은 자신이 되어 있을 테고, 그것은 성장하고 변화한 자신일 것이라고. 이런 이야기들은 소위 현대의 명언 중 하나인 "당신을 죽이지 못한 것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보다 훨씬 더 깊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알려주었다. 인생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관해 알려주었다. 외로움과 고통, 두려움, 지겨움, 혼란을 이겨내고 그 경험을 소화한 후에는 기쁨과 쾌감,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자신을 신뢰해야 한다고, 삶이란 의미를 찾아가는 미지의 개인적인 여정이고 사회적 성공과 실패는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아기들이 비슷한 시기에 네발로 기거나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처럼, 성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자기만의 인생을 향해 떠난다. 전통적으로 쿼터라이프는 원가족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도모하는 시기다. 처음 집중하는 대상이 일, 육아, 결혼, 학업 중 어떤 것이든 모두가 세상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쿼터라이프 여정의 목표는 단순히 파트너를 구하거나 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만의 개인적이고 진실한 삶 말이다. 쿼터라이프 발달기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전한 자신을, 내면과 외면이 일치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지금과 다른 무언가,지금 이상의 무언가를 향한 가슴 저릿한 갈망이 멈추는 것이다. 쿼터라이퍼는 삶의 기반, 안전함, 사회적 안정을 원하기도 하고, 모험, 경험, 자기만의 의미를 원하기도 한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굳건한 체계를 구축해야 하지만, 삶에 온기와 동기를 부여하는 수수께끼, 친밀감, 심지어 불안 같은 것도 끌어안아야 한다. 쿼터라이프 심리학을 논할 때, 나는 이러한 모순을 ‘안정과의미를 향한 혼란스러운 갈망’이라고 설명한다.
20세기 중반에는 ‘중년의 위기’라는 개념이 새로이 주목받았고 이를 경험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에 따라 성인기의 행동 양식과 목표에 관한 굳건한 믿음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중년의 위기를 겪으면서 무어라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갈구했다. 중년의 위기는 심리적 변화의 기점으로 정의되었다. 자식들이 독립한 후 부모가 ‘빈 둥지’의 허전함을 느끼는 시기,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시기, 부모의 죽음 같은 힘든 사건들이 실존적?정신적 고민을 낳는 시기로 중년기를 해석하게 되었다. 중장년 성인이 생존 기반, 안정감, 가정을 이뤘다고 해서 당연히 만족하며 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전반적으로 옅어졌다. 수많은 중산층 중년이 자기 삶에 부족한 것이 있고 자신에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쿼터라이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만의 독립적이고 고유한 삶을 구축하는 것, 안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이 정확히 어떤 삶인지개인적이고구체적인 방식으로 밝혀내는 것이다. 쿼터라이프를 잘 살아낸다는 것은 ‘정상적’이거나 ‘훌륭’하거나 ‘성공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 서사를 더 오래 지속하면서 쿼터라이퍼에게 천성과 가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도록 강요하면, 그들은 치솟는 정신병 확진율에 지배당할 것이고, 길을 잃었다는 심정으로 미래를 향하게 될 것이다. 안정과 의미 둘 다 적절하고 건강한 지향점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수록, 성인기를 ‘승자’와 ‘패자’로 가르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껏 세상에는 두 종류의 쿼터라이퍼가 존재했다. 안정을 먼저 추구하면서 자신의 우선순위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의미를 먼저 추구하면서 종종 자신이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실 안정과 의미는 명확하게 무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스펙트럼를 이루고 있지만, 나는 전자를 ‘안정형’, 후자를 ‘의미형’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유형의 쿼터라이퍼, 즉 의미형과 안정형을 이해하는 일은 쿼터라이프의 심리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다. 자신이 의미와 안정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가려내면 더 강력한 동기와 열의를 갖춘 채 쿼터라이프의 온갖 과제를 해결해낼 수 있을 것이다. 쓸데없고 혼란스러운 말들, 고루한 기대와 조언에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미형은 전형적인 ‘중년의 위기’를 겪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삶 자체가 하나의 길고 긴 위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의미형이 살아남아 중년기에 진입했다면 이미 세상에서 살아가고 성장하는 방법을 깨달은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의미형은 균형을 찾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처음에는 안정을 목표로 삼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내면의 의미 감각과 연결을 유지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안정적이고 기능적인 사회생활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더 성공적이고 건실하며, 더 ‘체계적인’ 쿼터라이퍼들. 나는 이들을 ‘안정형’이라고 부른다. 의미형이 한마디로 ‘예술가’, 철학자나 음악가인 것과 달리, 안정형은 한마디로 ‘변호사’, 이를테면 금융에 종사하거나 사업을 운영하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안정형 쿼터라이퍼를 "굳건하다", "정상적이다", "안정적이다"라고 묘사한다.
안정형은 종종 의미형보다 불안과 자기 보호가 심한 것처럼 보이고, 극단적인 경우 나르시시스트나 소시오패스가 되어 자신을 방어한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조종하면서 삶의 기능을 유지하기도 한다.
안정형은 인생의 발전에 필요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의지력이 높지만,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거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 막막함을 느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안정형은 중년기쯤 한계점에 도달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서 유지하던 외양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사회가 정해준 과제를 하나하나 수행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바로 이때부터 외부의 기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삶의 더 큰 의미를 탐색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중년의 위기’의 기원이다. 중년의 위기란 안정형의 위기인 것이다.
안정형이 자신이 추구하던 목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면, 그의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한다.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어떤 것에,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미지의 거대한 것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더 심오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쯤이면 그들은 의미형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발달 과정에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정반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쿼터라이프는 안정적인 관계와 경제적 조건을 마련하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의미를 향한 개인적인 여정이다. 진정한 성인기는 심리적인 것이다.
심리적 의미에서 진정한 성인기란 균형을 추구하는 성숙한 탐색의 과정, 공동체의 일원이자 의식 있는 개인으로서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안정과 의미를 모두 추구하는 여정이다. 질서와 혼란, 문명과 자연, 인간성과 신성을 결합하는 시기다. 두 특성이 각각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생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온전한 삶이라는 안정형과 의미형 공동의 목표는 서사의 결말에서 상반되던 것들이 결합하는 상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핵심적인 개념이 재현되는 방식은 수없이 많지만,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만 있는 삶은 기울어진 삶, 불완전한 삶이다. 기울어진 삶에는 명명하기 힘든 충동,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충동이 언제든 찾아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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