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럭키박스’를 제안한 쪽은 나였다. 우편으로 서로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을 보내자고 했다. 독서 안목과 취향을 확인하고 싶었다. 출신 학교, 나이, 사는 곳, 직업 따위는 내게 어떤 사람에 대한 주요 정보가 되지 못했다. 한 사람의 독서 목록이야말로 그 사람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책 선물’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내게 보여 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선물로 보낼 책 목록 안에 일정 부분 담기게 되리라 여겼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청혼은 내 쪽이 먼저였다. 카페에서 레고 블록을 맞추고 있던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충동’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는 승낙의 말 대신 "잘 생각해"라고 답했다. 그 말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답이었다. 나는 결혼을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비혼이야말로 나를 지키며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일정 부분 여전히 그렇게 믿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금’ 같이 놀고 싶은 친구를 만났고, 같이 놀면 재밌는 사람을 만났으니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같을 수 없는 한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치관 우선순위를 체크하는 테스트를 했을 때 우리는 둘 다 최우선 순위로 ‘나’를 꼽았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돌보고 아낀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건강함이 마음에 들었다. 며칠에 걸쳐 정말 ‘잘’ 생각한 끝에 나는 그에게도 청혼을 요구했다. "《행복한 질문》이라는 그림책을 나에게 선물해. 청혼 대신 받아 줄게."

나는 사랑을 ‘어떤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맹세보다 중요한 사랑의 태도가 짧은 그림책 안에 깊고 빼곡하다. 책을 펼치면 아무런 글자 없이 개 부부가 길가의 꽃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온라인상에서 주로 쓰는 이름은 ‘둥글게’이다. 많은 사람이 동요 제목으로 착각하지만, 이상은의 노래 제목이다.

꽃을 밟지 않으려 뒷걸음을 치던 너와 부딪혔어
함께 웃음이 나왔어
하늘이 투명해서 너도 빛났지
- 이상은 작사·작곡, <둥글게>, 2005

가사를 처음 접했던 날,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내 그 가사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바로 그 사람이 있었다.

뒤에 숨는 마음

"술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약간의 막막함을 느낀다. 성인이 되어 술을 경험한 이래 나는 술 앞에서 단 한 번도 호오를 따져 보지 않았다. 불성실로 점철된 내 인생에서 평생에 걸쳐 가장 꾸준하게 해 오고 있는 드문 일 중 하나가 음주다.

왜 그렇게까지 술을 마시느냐고 묻는다면 역시 최선의 이유는 ‘세상 탓’일 테다. "설명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자면, 제가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은, 이 빌어먹을 세계 때문이죠."

일과 세상에 대한 푸념을 안주 삼아 마시는 동안 긴장이 풀리고 안도가 몰려왔다. 물론 더 많은 날을 자괴감과 더불어 폭음을 일삼았다. 어쨌든 무사히 한 주가 지나갔고, 나는 아무튼 마감을 했으며, 그러니까 마실 ‘자격’이 있었다.
사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었다. 취재나 마감이 뜻대로 안 될 때는 그 핑계로 마시는 법이다.

누군가 건강을 이유로 술을 끊겠다고 하면 그렇게 서운했다. 나이 먹을수록 그런 사람은 하나둘 늘어만 갔다. 외로운 나는 캐롤라인 냅처럼 혼잣말을 하곤 했다. "별 웃기는 유행 다 보겠네. 이게 도대체 무슨 재미야?" 그럴 때면 이상한 다짐을 하곤 했다. 어차피 한번은 죽으니까 좋아하는 술 담배라도 마음껏 하자고.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공드리의 9년은 내가 지나온 9년이기도 했다. 공드리의 맥주가 모나고 상처 난 마음을 동글동글 뭉툭하게 만들어 줬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술은 제2의 따옴표다. 술로만 열리는 마음과 말들이 따로 있다.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뾰족한 연필심은 뚝 부러져 나가거나 깨어지지만, 뭉툭한 연필심은 끄떡없듯이, 같이 뭉툭해졌을 때에서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이제 그 말들을 나누려면 460km를 날아가야 한다. 오늘은 그 이유로, 술을 마셨다.

그해 여름은 비가 지독했다. 장맛비가 자주 방으로 밀고 들어왔다. 축축한 등이 먼저 알았다. 그럴 때면 책상 위로 올라가 쪼그려 앉곤 했다. 물이 차오르는 모양을, 빨간 쓰레받기를 들고 물을 걷어 내는 엄마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언제나 물이 이겼고, 나 대신 책이 울었다. 비가 그치면 물에 불어 망가진 책을 추려 쓸모를 구분했다. 이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유년의 책들은 그런 식으로 수장되었다. 다음 날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니다, 가지 못했다. 문에서 세 계단, 다시 두 계단을 딛고 오르면 공기가 달랐다. 햇볕의 틈을 찾아 젖은 책을 널어놓으며 신에게 빌었다. ‘2층으로 이사 가게 해 주세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해, 일찌감치 상업계고 진학을 마음먹었다. 나는 지하에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난이 지겨웠다. 진학 서류를 요청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엄마에게는 합격하고서야 알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선택’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좀체 나아지지 않는 형편의 이유가 온전히 우리에게만 있는 거라면, 더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노력하면 돈을 벌 수 있고, 그러면 이 수렁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믿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이었다.
편모 가정인 것, 사글세 지하에 사는 그런 것들. 중학교에서는 매우 소수의 친구에게나 겨우 나눌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은 감춰지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친구들 사이에서 배제됐다. 고등학교에서는 달랐다. 나는 그곳에서 내 불행과 가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때로는 아버지가 없다는 게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도 ‘고3’ 시절이 있었다. 80%에 가까운 또래들이 수능 준비에 열을 올리는 동안, 20% 안에 속한 우리는 반을 합치고 밥을 합쳤다. 이미 많은 친구들이 취업으로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반의 취업되지 않은 아이들이 와서 채웠다. 3학년 2학기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나는 교육 이슈 앞에서만큼은 중요성을 가늠하지 못해 허둥댄다. 정확히는 교육이 아닌 ‘대입’이다. 나는 늘 대입을 둘러싼 이 사회의 풍경이 기이하다. 대입개편공론화위원회를 꾸리고, 그 결과를 내가 속한 매체를 비롯한 거의 모든 언론이 비중 있게 보도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도 모른다. 대입만을 관장하는 게 아닌 교육부장관이 이 문제를 이유로 개각 대상 명단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다, 안다. 대입 전형에 사활을 걸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과대 대표되어 있다.

《우리 아이들》의 부제는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이다. 500쪽 가까운 책을 한 달에 걸쳐 어렵게, 어렵게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 때문이었다. 정임, 소영, 세진, 윤주, 연재‘들’의 얼굴이 행간 위에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16년 차지만 고졸이라 여전히 주임 직급을 달고 있는, 비정규·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하는,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원치 않는 전업주부가 된 나의 그때 그 친구들. 우리에게는 특별히 운이 좋은(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에어백’이 없었다.

나 역시 1인분의 책임이 있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됐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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