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급진개화파의 정변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난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에 실각하고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는 등 조선 조정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개화 정책은 곧장 격렬한 찬반론을 불러일으키고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등으로 세력이 분화된다. 개화파는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 통상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이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화파로 분화돼 있었다. 김옥균 등은 일본식의 급진적이고 과감한 개혁을 주장했고, 김홍집 등은 청나라의 양무운동 같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선호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자금 지원을 받아 유학생을 보내고 통화 개혁을 비롯한 각종 부국강병책을 제안했다. 박영효는 강병 양성에 주력하는데 이런 노력이 민씨 척족에게 미움을 사면서 문제가 된다. 더구나 급진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를 철폐하는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데 반해 온건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강조하고 청나라의 보호 아래 역량 강화를 선호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