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학문•철학/중앙정보부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 김종필의 주도로 만들어진 정보기관이다. 전두환 정권기에는 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중앙정보부는 창설 초기부터 각종 의혹에 휩싸였다. ‘4대 의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파칭코 사건을 말하는데 중앙정보부가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주가를 조작한 사건, 광진구에 위락 시설인 워커힐을 세우면서 자금을 유용한 사건, 일본에서 불법 수입한 자동차로 폭리를 취한 사건, 불법 도박 기기를 밀수하여 이득을 보려 했던 사건들이다.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벌인 일로 추정하지만 김종필이 옷을 벗는 선에서 무마되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축


살면서 무엇을 만들고,
갈고닦고, 쌓아야 할까?

성장의 세 번째 기둥은 ‘구축’이다. 영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에서 "구축하다, 쌓다, 갈고닦다"를 뜻하는 동사는 "있다, 되다, 일어나다"라는 뜻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삶을 ‘구축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이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청에 열린 마음이 필요했던 것처럼, 구축에는 노력, 일관성, 의지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삶을 구축한다는 것은 노력과 사랑과 헌신을 통해의식적으로 존재를 가꾸어간다는 뜻이다. 자기만의 삶이라는 작품을 창조하려면 크고 작은 노력이, 체계와 질서가 필요하고 때로는 막대한 신념과 신뢰도 필요하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일관성과 집중력이 필요하고, 피로가 쌓이거나 내적 한계에 부딪혀도 밀고 나가야 한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불신과 더 나은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회의감을 상쇄하기 위해 장기적인 과제에 매달려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야 한다. 삶과 미래 구축을 위한 작업은 단조롭고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고 한 사람을 새로이 거듭나게 해줄 수 있다.

모험과 위험 감수는 쿼터라이프의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삶을 구축하기 위한 내적?외적 작업은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보다는 반복적인 과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구축하기 위해 세심하게 공들이고, 피로해도 한 걸음씩 나아감으로써 쿼터라이퍼는 새로운 한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능력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회복력을 얻는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과 성격이 빚어지고 형성되며, 자긍심이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지금까지 대니는 자신의 신체적 욕구에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소망에 귀 기울이는 법을 연습했다. 이제는 미래를 구축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무언가를 이뤄내고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싶었다. 경청이 자기 자신과 비언어적 실마리에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구축은 조금 더 실제적인 작업이었다.

수많은 의미형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구축하려면 때로는 거의 종교에 헌신하듯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 ‘시시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안전성을 강화해줄 장기적 노력에 헌신해야 한다. 의미형은 ‘각고의 노력’을, 마침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돈에 넘어갔다’거나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걱정은 의미형이 사로잡혀 있는 저변의 두려움과 이어져 있다. 그건 바로, 삶에 오롯이 헌신하기 시작하는 순간 영혼 없고 개성 없는 일벌 같은 존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의미형에게 삶을 구축하는 작업은 망망대해에서 목적지 없이 둥둥 떠다니다가 섬을 하나 발견하는 것과 비슷하다. 혼란, 우울, 압도감만 존재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안전한 공간에서 몸을 말리고 안정적인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쿼터라이퍼는 자신이 제대로 밀어붙이지 않을 때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외부에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있는 만큼 내면에도 보이지 않는 허들이 있어 그것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20.문화/운동권

대학생 운동권의 등장은 1980년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정치인, 재야 지도자들이 등장했고197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언더서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0.26 사태를 통해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화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으나 곧장 12.12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뀐다. 일명 ‘서울의 봄‘이 무너진 것이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잔혹한 진압은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혔다. 대학생이된 후 학내 비밀 상영회를 통해 비디오테이프로 ‘광주 학살‘을 직접 목격한 학생들이 가두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평범한 가난

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 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 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지금도 여전히 꿈에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초록색 슬립을 걸친 여자가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간다. 비쩍 마른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맨발은 검다. 그런 장면을 숨도 못 쉬고 목격한 날은 또 생각했다. ‘아가씨는 되지 말아야겠구나.’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까 골몰하던 10대와 이미 아가씨였던 10대가 고작 육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가진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나는 그곳에 닿지 않았다.

런던에서 서울까지 약 8,000km를 건너 내 앞에 도착한 《가난 사파리》를 넘기는 동안 나는 다른 문화권에 살며 다른 언어를 쓰는 저자와 내가 경험한 가난이 너무 가깝고 때로 겹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자꾸 몸서리를 쳤다. 우리가 해 왔던 분노의 다짐과 잦은 실패와 달라지는 신념이 비슷한 뿌리를 지녔다는 게 신기했다. 대런 맥가비의 말마따나 "가난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기 때문일 테다.

어린 시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가족’이 전부였다.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생각지 못한 지출이 반복되며 내 삶도 일부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가난의 그림자는 이런 식으로 내 발목을 잡곤 했다. 내가 잘못하며 살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다. 부채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나만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던 건 그 애가 공부를 못한 까닭도 있지만, 그 이유로 그 애가 돈을 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나는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누나, 나는 잘해 보려고 했던 일인데 매번 이런 식이야."
나는 그 말에 아직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2012년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주변이 모두 당혹해할 정도로 오래 통곡했다. 2.9kg의 조그만 아이를 처음 안고서 터뜨린 울음을 한동안 나조차 해석하지 못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깨달았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갈 많은 날이 안쓰러웠다. 앞으로 ‘당할’ 일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고, 무서웠고, 서러웠다. 이 아이가 자라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일들이 먼저 경험한 내게 무게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 부모의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의 가난을 늘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그건 사실 가난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는 대수로운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핏덩이’는 내가 가난 때문에 늘 상처받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쇄 지각마의
지각을 위한 변명

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옮긴 지 한 달 뒤쯤이었다. 팀장과 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의 잦은 지각 때문이었다. "늦지 마라." "죄송합니다." 따위의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나도 의아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인 출근 시간인가.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는 동안 하루치 기운을 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선배……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더는 죄송하기 싫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그날, 선배도 웃고 나도 웃었다. 선배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그 말을 기어이 해 버린 내가 대견해서 웃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생활인 만큼 선배의 염려를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쯤 더 지각했지만 그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바뀐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팀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팀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방식이 바뀌었고, 시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졌다. 기다림은 편집팀 업무의 거의 전부다. ‘내 글’을 쓰는 일에서 ‘남의 글’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할 수 없었다. ‘연쇄 지각마’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나였다.

가난한 언론사가 월급으로 최고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대책 없는 양반들이 내세운 최고 대우라는 건 ‘양심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였다.

그 자유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실질적인 근무 조건이었다. "돈 많이 못 주는 대신 근무 조건이라도 좋아야지." 창간 주역인 한 선배는 신입 기자 앞에서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이를테면 ‘법이 정한 대로’ 휴일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명절에 쉴 수 있고 되도록 주5일제를 보장하는 것도 다른 언론사라면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야말로 업계 최고의 대우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편할 거 같지만 많은 일이 그렇듯 기자도 결국 결과, 즉 기사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허투루 일한다는 건 내 이름뿐만 아니라 이 매체가 쌓아 온 신뢰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불안을 밥 먹듯 먹으며 시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일하는 스타일과 리듬과 호흡을 가지게 됐다. 그러므로 나에게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졌다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기자로 일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기자의 일이란 ‘나’와 ‘일’을 완벽히 분리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완벽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고강도 스트레스에 늘상 노출돼 있는 기자들은 빨리 죽는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11개 직업군별 평균 수명 조사에서 언론인의 수명이 67세로 제일 짧았다.
편집팀 발령은 나에게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첫 직장을 다닐 당시에는 대학 진학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의 직장인은 출구를 만들 의무가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나도 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른의 고민이라면 책임감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건물주로 태어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노동을 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되고, 우리는 그 돈으로 ‘아슬아슬’ 입에 풀칠하며 산다. 살아 보려고 하는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다종다양한 책이 증명하고 있듯 다행히(?) 나만 불행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내가 그랬듯이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회사에 단지 노동력을 파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도 저당 잡힌다. 대부분 9시까지는 출근해야 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는 듯, 세상은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 적어도 길의 흔적은 더듬을 수 있다.

갑이 우리의 노동에 대해 다른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고(혹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처럼 나쁜 방향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자주 필사적으로, 그보다는 조금 대충이라도 계속 떠드는 수밖에.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의지로 행복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다. ‘10시 출근 불가’를 선언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우리 몸의 구멍이
굴욕이 되지 않도록

병원이라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은 웬만해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여느 병원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꺼려지는 병원은 산부인과였다. 지금이야 정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다니지만 그렇다고 심리적 문턱까지 낮아진 건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성경험 여부를 묻는 칸을 ‘없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없음 칸에 체크할 때마다 내 인생의 결여에 대해 생각하며 속을 끓였다. 성폭행 경험을 성경험 ‘있음’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긴 세월 애인들에게 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없음’ 칸이나 채울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내 몸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냥, 여자가 되고 싶었다. 평범한 여자. 나는 안다. 평범이나 평균은 허구라는 걸. 평범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평범을 바라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랐다.

짝꿍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나를 지나간 몇 명의 다른 애인들처럼 그가 섹스를 청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전 애인들에게는 못 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있음’의 세계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있음의 세계를 열망하던 그즈음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것, 이런 타이밍을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면 그건 그런대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묻거나 ‘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 왼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상처도,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긴 시간(과 돈을 들인) 끝에 나를 ‘돕는’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사소한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았고, 내 몸에 대해 먼저 꼼꼼히 묻는 사람이었다. 그는 검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 검사는 왜 하는지, 어떤 걸 확인할 수 있고 없는지 등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줬다. "긴장 풀라고 해도 긴장되죠? 당연해요." "조금 아플 건데, 이 검사를 하려면 조직을 조금 긁어내야 해서 그래요. 칫솔질하는 거 같달까요." 병원 안에는 요란한 미용이나 성형 광고도 없었다. ‘기본’을 하지 않는 병원을 여럿 경험한 탓에 나는 ‘쉽게’ 이 산부인과에 반해 버렸고 내 맘대로 주치의 삼아 버렸다.

때로 망치더라도
아주 망친 것은 아닌

앞에 놓인 일들을 한번씩 가늠할 때마다 막막해서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다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는 쓸모란 얼마나 무서운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바람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낙담은 단짝이라,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시간만 성실했다. 일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몸처럼 지낸 지 오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닥친 마감과 기획안으로 엉킨 생각이 밤새 몸을 들쑤셨다. 아침에 눈떠 보면 죄 시답잖았다. 모든 게 나처럼 시시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한 반의 정원이 30명이라면 15~16등쯤 하는 학생 같은, 뭐 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주로 ‘그런 애’를 맡아 왔다. 나 하나만 잘 수습하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선배의 선택과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실망시킬까 봐 무서웠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해 봤다면 해 봤고 안 해 봤다면 안 해 본 일들을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곤란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업무 압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에이, 이거 말고 딴거 해." 반쯤은 진심이었다. 일과 일상이 구분 없이 한데 뭉쳐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생활은 불규칙해지고, 몸은 망가진다. ‘기레기’로 뭉뚱그려 호명될 때마다 가까스로 쥐고 있던 긍지마저 사그라든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기자질’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건, 이 일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기여하는 일이라는, 분명한 보람과 자부 때문이다.

자신은 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내가 하는 일을 원하는 후배의 ‘앞길’ 막는 얘기는 왜 자꾸 하게 되는 걸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상은 현실보다 늘 앞서간다. 내가 그러했듯,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낙차에 실망할까 지레 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대도 실망도 당사자 몫이다. 선배는 그 모든 걸 온전히, 하지만 나보다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겪게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만화가 이종범 씨가 쓴 ‘청소의 요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ize>, 2014년 10월 2일) 이씨가 ‘거지 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어디 기자만이 그럴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망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망친 일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