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팀에서 편집팀으로 옮긴 지 한 달 뒤쯤이었다. 팀장과 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나의 잦은 지각 때문이었다. "늦지 마라." "죄송합니다." 따위의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그때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 나도 의아했다. 다른 회사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파격적인 출근 시간인가. 러시아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출근하는 동안 하루치 기운을 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선배…… 저는 10시까지 출근 못 하겠습니다."
더는 죄송하기 싫었다. 경험상 이럴 때는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문제의 성격을 막론하고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솔직함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그날, 선배도 웃고 나도 웃었다. 선배는 어이없어서 웃었고, 나는 그 말을 기어이 해 버린 내가 대견해서 웃었다. 남들이 다 할 수 있어도 나는 못 할 수 있다고, 못 하는 부분은 인정하고 ‘다르게’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직 생활인 만큼 선배의 염려를 인정하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쯤 더 지각했지만 그 횟수는 현저히 줄었다. 마음의 자유를 얻으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바뀐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팀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팀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의 방식이 바뀌었고, 시간 쓰는 법 자체가 달라졌다. 기다림은 편집팀 업무의 거의 전부다. ‘내 글’을 쓰는 일에서 ‘남의 글’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세운 계획대로 일할 수 없었다. ‘연쇄 지각마’는 그 시스템에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내가 만들어 낸 또 다른 나였다.
가난한 언론사가 월급으로 최고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대책 없는 양반들이 내세운 최고 대우라는 건 ‘양심에 따라 쓸 수 있는 자유’였다.
그 자유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던 건 실질적인 근무 조건이었다. "돈 많이 못 주는 대신 근무 조건이라도 좋아야지." 창간 주역인 한 선배는 신입 기자 앞에서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 조건이라는 게 별건 아니다. 이를테면 ‘법이 정한 대로’ 휴일을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명절에 쉴 수 있고 되도록 주5일제를 보장하는 것도 다른 언론사라면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그야말로 업계 최고의 대우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면 편할 거 같지만 많은 일이 그렇듯 기자도 결국 결과, 즉 기사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허투루 일한다는 건 내 이름뿐만 아니라 이 매체가 쌓아 온 신뢰에 먹칠하는 일이었다. 불안을 밥 먹듯 먹으며 시간을 쌓는 동안 나는 ‘나만의’ 일하는 스타일과 리듬과 호흡을 가지게 됐다. 그러므로 나에게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졌다는 건 엄청난 변화였다.
기자로 일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기자의 일이란 ‘나’와 ‘일’을 완벽히 분리하지 못할 때가 많고,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으며, 완벽에 가까운 책임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고강도 스트레스에 늘상 노출돼 있는 기자들은 빨리 죽는다. 원광대 보건복지학부 김종인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11개 직업군별 평균 수명 조사에서 언론인의 수명이 67세로 제일 짧았다. 편집팀 발령은 나에게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첫 직장을 다닐 당시에는 대학 진학이라는 출구가 있었다. 하지만 삼십 대의 직장인은 출구를 만들 의무가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느덧 나도 이 사회에 책임이 있는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른의 고민이라면 책임감에서 출발해야 하는 법이다.
한국에서 건물주로 태어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노동을 해야 한다. 시간은 돈이 되고, 우리는 그 돈으로 ‘아슬아슬’ 입에 풀칠하며 산다. 살아 보려고 하는 일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때로 우리 삶을 위협한다. 노동에 대한 다종다양한 책이 증명하고 있듯 다행히(?) 나만 불행한 건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이다. 우리의 일이 불행한 이유는 내가 그랬듯이 일의 과정에서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는 데 기인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회사에 단지 노동력을 파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과 자율성도 저당 잡힌다. 대부분 9시까지는 출근해야 하지만 퇴근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는 듯, 세상은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책 속에 길이 있을까? 적어도 길의 흔적은 더듬을 수 있다.
갑이 우리의 노동에 대해 다른 방식을 상상하지 못하고(혹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처럼 나쁜 방향으로만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자주 필사적으로, 그보다는 조금 대충이라도 계속 떠드는 수밖에. 우리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내 의지로 행복하게 일할 권리가 있다. 그편이 훨씬 이익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이다. 역사가 발전하는 게 사실이라면 이게 제대로 된 방향이다. ‘10시 출근 불가’를 선언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어쩔 수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은 웬만해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여느 병원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기 꺼려지는 병원은 산부인과였다. 지금이야 정기적으로 산부인과를 다니지만 그렇다고 심리적 문턱까지 낮아진 건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갈수록 성경험 여부를 묻는 칸을 ‘없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없음 칸에 체크할 때마다 내 인생의 결여에 대해 생각하며 속을 끓였다. 성폭행 경험을 성경험 ‘있음’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경험이 가져온 트라우마는 긴 세월 애인들에게 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평생 ‘없음’ 칸이나 채울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내 몸을 부정하면서 살았다. 그냥, 여자가 되고 싶었다. 평범한 여자. 나는 안다. 평범이나 평균은 허구라는 걸. 평범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모두들 평범을 바라는 거라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랐다.
짝꿍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나를 지나간 몇 명의 다른 애인들처럼 그가 섹스를 청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전 애인들에게는 못 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와 함께 ‘있음’의 세계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있음의 세계를 열망하던 그즈음 그가 내 곁에 있었다는 것, 이런 타이밍을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면 그건 그런대로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묻거나 ‘더’ 묻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 왼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상처도, 성폭력 경험에 대해서도. 그는 그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나도 마침내 긴 시간(과 돈을 들인) 끝에 나를 ‘돕는’ 산부인과 의사를 만났다. 사소한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았고, 내 몸에 대해 먼저 꼼꼼히 묻는 사람이었다. 그는 검사를 하는 와중에도 이 검사는 왜 하는지, 어떤 걸 확인할 수 있고 없는지 등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줬다. "긴장 풀라고 해도 긴장되죠? 당연해요." "조금 아플 건데, 이 검사를 하려면 조직을 조금 긁어내야 해서 그래요. 칫솔질하는 거 같달까요." 병원 안에는 요란한 미용이나 성형 광고도 없었다. ‘기본’을 하지 않는 병원을 여럿 경험한 탓에 나는 ‘쉽게’ 이 산부인과에 반해 버렸고 내 맘대로 주치의 삼아 버렸다.
앞에 놓인 일들을 한번씩 가늠할 때마다 막막해서 차라리 사라지고 싶었다. 다짐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되는 쓸모란 얼마나 무서운가. 일을 잘하고 싶다는 바람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낙담은 단짝이라, 내가 나인 게 싫어지는 시간만 성실했다. 일과 일상이 구분되지 않은 채 한 몸처럼 지낸 지 오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닥친 마감과 기획안으로 엉킨 생각이 밤새 몸을 들쑤셨다. 아침에 눈떠 보면 죄 시답잖았다. 모든 게 나처럼 시시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한 반의 정원이 30명이라면 15~16등쯤 하는 학생 같은, 뭐 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나는 이 세계에서 주로 ‘그런 애’를 맡아 왔다. 나 하나만 잘 수습하면 그럭저럭 괜찮았던 시절이 그렇게 끝났다. 선배의 선택과 판단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짓눌렸다. 실망시킬까 봐 무서웠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해 봤다면 해 봤고 안 해 봤다면 안 해 본 일들을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곤란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업무 압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에이, 이거 말고 딴거 해." 반쯤은 진심이었다. 일과 일상이 구분 없이 한데 뭉쳐 굴러다니기 시작하면 생활은 불규칙해지고, 몸은 망가진다. ‘기레기’로 뭉뚱그려 호명될 때마다 가까스로 쥐고 있던 긍지마저 사그라든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기자질’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건, 이 일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기여하는 일이라는, 분명한 보람과 자부 때문이다.
자신은 원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 내가 하는 일을 원하는 후배의 ‘앞길’ 막는 얘기는 왜 자꾸 하게 되는 걸까.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이상은 현실보다 늘 앞서간다. 내가 그러했듯, 뒤에 오는 사람들이 그 낙차에 실망할까 지레 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대도 실망도 당사자 몫이다. 선배는 그 모든 걸 온전히, 하지만 나보다는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겪게 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만화가 이종범 씨가 쓴 ‘청소의 요정’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ize>, 2014년 10월 2일) 이씨가 ‘거지 같은 만화판’에 대한 이야기만 주구장창 듣던 지망생 시절, 선배인 《덴마》의 양영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면 너무 좋아. 빨리 만화가 해." 그 글을 읽은 이후 나 역시 기자 지망생을 만나면 "기자가 되면 정말 좋아. 빨리 기자 해"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했다.
어떤 직업을 좋은 일, 필요한 일로 만드는 힘과 책임은 그 직업군에 속한 사람에게도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권할 수 있으려면 내가 선 땅이 좋아지도록 부지런히 일궈야 한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자신 있게 건네려면 그만큼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한다. 일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일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어디 기자만이 그럴까. 세상의 많은 일이 그런 노력에 힘입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때로 망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아주 망친 일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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