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유적•유물/김정희와 세한도

김정희(1786년~1856년)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관료로, 대표적인 엘리트다. 아버지를따라 이른 시절에 북경에 가서 당대 저명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과 교류했고, 국내에서는 실학자 박제가 등에게 배웠다.

그는 순조 시대에 관료를 역임하며 개혁을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오랜 기간 유배지에서 세월을 보낸다.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라는 조선 문인화의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문인이 지녀야 할 학문적 깊이를 강조했고 난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붓글씨의 기초가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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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장소/통일의 집

통일의 집은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문익환(1918년~1994년)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을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문익환은 북간도 출신으로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윤동주 등과 함께 보냈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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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인물/남자현

남자현(1872년~1933년)은 ‘여걸 남자현 선생‘이라 불렸던 인물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는 1896년, 남자현의 나이 24살 때 홍구동 전투에 참여했다 죽는다. 당시 임신 중이던 남자현은 아들을 낳아 키우는 한편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부상을 받기도 한다. 이후 친정아버지 남정한과 함께 의병 궐기에 참여하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경상도 만세 시위 조직 책임을 맡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남자현은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에 참여, 부상병 간호를 맡는다. 또 길림성에서 20여 개가 넘는 교육 단체를 조직했고, 이관린, 이양숙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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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사건/좌우합작운동

좌우 갈등을 극복하고자 해방 공간에서 여운형, 김규식이 주도한 운동이다. 좌우갈등 문제는 식민지 시대부터 조짐이 뚜렷했다. 구한말부터 이어져온 조선 왕조에대한 충성심, 전통 문화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 민주공화국에 대한 이상 등이 결합하여 민족주의가 탄생했다면, 1920년대 이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며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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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명문장/민중가요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 있다
부동킨 두 팔의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가수 김광석, 안치환 등이 부른 <광야에서>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의식화에 큰 영향을 줬다. 이로 인해 민중가요가 등장한다.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는 진보적 노래 운동모임 ‘새벽‘에서 창작됐다. 김민기, 정태춘과 박은옥,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가수와 그룹이 민중가요 장르를 심화시켰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은 히트곡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기존의 가요 문화가 대학생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하지 못했고, 사회상을 심도있게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현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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