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어떻게 잘하고는 있는 건지, B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원을 보내 봐도 성적은 늘 거기서 거기에,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 가만히 놔두면 볼 때마다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도저히 참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분명 A양 나름대로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자꾸 성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B의 사과에 A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B를 쳐다봤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엄마가 말 안 해도 성적 문제는 네가 더 신경 쓰고 있을 텐데, 수고했다는 말도 못 해주고 무작정 속만 긁은 것 같아." 미안해, 우리 딸. 벙벙해진 표정으로 B를 쳐다보던 A양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두어 번 뻐끔 거리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지가 않았다. "엄마가, 기대치가 높아졌나 봐. 사진첩 보니까 옛날엔 네가 옹알이 한 번만 해도 온갖 칭찬을 다 적어놨는데, 지금은 수고했단 말 한마디도 못해줬네. 지금이 더 힘들 텐데"
"딸, 실패해도 괜찮아. 어중간하게 살아도 아무 문제 없어. 엄마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너무 힘주고 있지 않아도 돼. … "맨날 공부해라, 성적 올려라 해놓고 이런 말 하니까 웃기지? 근데 생각해보니까, 가끔은 이런 말도 해줘야 되겠더라고. 우리 딸 항상 애써주는 거 알고 있어." 어색하게 웃으며 B는 말했다. "그리고,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꼭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아야 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을 끝마치고 B가 A양의 방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A양은 그저 눈가를 문지르며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펑펑 울고 싶어진 기분이었다.
제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기를. 주변의 기준에 위축되지 않기를. 나와 같은 고민을 나누는 모두에게, 세상엔 너와 같은 이도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또 누구보다 눈부실 찬란한 우리들의 청춘을 응원하며.
B의 잔소리가 길어질수록 A양은 입을 꽉 닫았다. 변명의 여지없이 B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알겠어. 이제 공부할 거니까, 엄마는 나가서 엄마 할 일이나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신경을 어떻게 안 쓰니?" "아 나가라고!!" "얘 좀 봐, 왜 짜증이야?" A양의 날카로운 신경질에 B는 혀를 차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방문 너머로 애먼 방바닥을 쿵쿵 차대는 A양의 발길질 소리가 들려왔다.
B는 요즘 들어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모녀간의 심도 있는 대화를 원하고서 꺼낸 이야기가 어느새 학교 성적 얘기로 넘어가 버리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성적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고 대충 대화를 끝마치려 얼버무리기 일쑤인 A양은 B의 속을 더욱 답답하게만 만들었다. 제 스스로도 성적이 문제라는 것을 잘 알면서, 어째 마주칠 때마다 스마트폰만 붙잡고 있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18살 A양 이야기 울지 마, 울지 마, 제발 울지 좀 마!! 방문을 쿵 닫고 들어오자마자 대책 없이 흐르는 눈물에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서 A양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 일도 아닌데, 멍청하게 꼭 할 말이 없으면 눈물부터 나오는 제 자신이 A양은 너무나도 미웠다.
C양과 대화하던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B에게 쓴소리 몇 마디 듣자마자 순식간에 기분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B의 말이 다 맞는 말이라 뭐라고 받아칠 수도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잘하는 것도 없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게 맞았다.
나는 은솔이에게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면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왜 이렇게 감정이 메마르고 사람에게 기대지 않게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더불어 은찬이의 일까지도 모두 털어놓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 가량을 부 등 껴 안고 울었고 침묵 속에서 은솔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홀로 나를 키운 엄마는 언제나 강인했고 멋진 엄마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매일 가계부를 보며 걱정하는 모습 밤낮으로 일을 다니고 그러면서도 잠을 자지 못해 끙끙 앓는 모습까지도 그렇기에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힘들다고 고민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감정을 숨겼고 고민은 삭였다. 누구나 한 번쯤 온다는 중2병 따위는 없었다. 그게 병이 되는지도 모른 체 내가 로봇이 되어가고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고등학생이 되었다.
최고의 엄마는 엄마가 할 테니 너는 최선을 다하는 딸이 되라는 엄마의 말은 내게 큰 의미였고 나는 내가 바뀌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행복한 저녁 식사는 끝이 났고 엄마와는 잘 해결했다고 은솔이에게 전한 채로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시간은 쉴 새 없이 내가 쫓아가기도 전에 나를 벗어나서 저 멀리서 달리고 있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난 이제 더는 그 시간을 쫓아가지 않는다. 다만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법과 내 마음을 이해하는 법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알아가는 법을 배워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유미가 말을 마칠 때까지 쭉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물론 누가 주변의 죽음을 단 한 번에, 쉽게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니 내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유독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힘들었던 하루를 잘 버틴 위안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지친 몸을 이끌고 걷는 것은 힘이 들지만, 까만 밤, 가끔은 은은한 달빛이 비칠 때도 있고 선명한 달을 보게 될 때면 왜인지 운이 좋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힘들긴 해도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이 분위기가, 공기가 좋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조금씩 힘이 솟는다. 밤거리를 지나며 맞는 선선한 바람도 내 기분을 띄워주는 데 한몫을 하는 요소다.
"이슬이가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여름방학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이야. 장례는 여름방학 도중에 다 끝났고 우리가 애도를 표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슬이를 잊지 않는 거란다." "이슬이가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쉴 수 있도록 빌어주는 게, 우리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선생님은 생각해." "다른 반 친구들한테 말하거나 다른 데 말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지킬 수 있지?" 말을 끝마친 선생님은 교탁을 탁탁 쳤다.
선생님은 청소하자는 말을 끝으로 교실을 나가셨다. 교실 안에서는, 그 누구도 먼저 움직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같은 반에서 함께 지냈던 아이가 죽은 거다. 그저 여름방학을 지내고 왔을 뿐인데. 나는 물론이고 반 아이들은 놀람과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수는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애가 죽었다는 소식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된 지도 일주일이 지나고 2주, 3주, 한 달 가까이 되고 있었다. 나는 하루 이틀 정도 넋을 놓고 지내다가 정신을 차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애 생각이었고, 잠을 줄이면서 생각을 해보았지만 내 결론은 하나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 이슬이가 세상을 떠난 것은 정말 안타깝지만,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애를 잊지 않는 것뿐, 그 애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뿐이다. 한때 나누었던 친구란 이름이 있으니 남들보다 조금 더 깊게, 그 애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바다 그림을 보자 수영을 좋아하던, 그래서 바다와 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 아이가 떠올랐다. 지난 저녁, 나를 찾아왔던 그 애가. 흐릿한 정신을 맑게 바꾸고 소란스러운 교실을 둘러봤다. 앞, 뒤, 옆까지 고루 둘러보아도 이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비로소 나는 그 애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이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루 이틀 지난 것도 아니고,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드는지 혼란스럽다. 이게 다 어제 그 알 수 없는 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이상한 기분을, 마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꿈인지 아닌지도 확실히 분간하기 힘들지만, 그건 꿈이었다. 그냥 꿈. 무거운 마음에 평소 무의식에 있던 생각들이 꿈으로 나타난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얼 생각하란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차를 마셨다. 적당한 온도의 찻물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한 모금 꿀꺽, 하고 마신 그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짜. 분명히 차가 맞는데. 왜 이상하게 짠맛이 나지. 맑은 찻물이 맛은 꼭 바닷물 같았다. 바닷물. 그제야 이슬이 내게 차를 마시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와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아이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 그중에서 지키지 못한, 지키지 않은 한 가지. "같이 바다 가자." 이슬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하얗기만 하다. 바깥 풍경과 똑같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일명 물타기 같은 것이었다. 누구 한명이 남을 욕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이 아닌데도 입을 모아 맞장구치며 흉보기 바빴다. 같이 흉봐주는 게 우정인가? 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기 일이 아닌데 저렇게까지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걸까? 정도가 심할 때는 십몇 명의 아이들이 그 한 명한테 가서 꼽을 주었다. 그땐 정말 내 친구이긴 하지만 너무 싫었고, 쪽팔렸다. 그냥 머릿수 많다고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양 시끄럽게 떠들며 위화감을 형성하는 것이 우스워 보였다. 나는 꼽주는 것이 가장 멍청해 보였다. 그냥 엄청 눈치 주는 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누구 한 명을 까 내리는 것. 자신들은 재밌다고 하는 데 듣는 나는 유치하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들이 세상 어리다고 느껴졌다.
평소 눈물도 많던 엄마는 그날도 눈물을 흘리며 이미 곪을 때로 곪은 자신의 내면을 처음으로 내게 보여줬던 날이었다. 엄마는 22살 어린 나이에 아빠와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1년이 채 안 지나서 첫 아기가 생겼다.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를 하게 된 엄마는 예상과 다를 것 없이 역시나 그 집 식구들에게 갖은 핍박과 무시를 받으며 생활을 했다. 눈치란 눈치는 모두 받으며 홀로 겨우겨우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엄마의 친정집에서 마저 엄마의 결혼과 의견 모두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생겼다. 아기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듣고 할머니는 듣자마자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워라."
엄마는 정말 많이 울었다. 첫 아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용기도 없었다. 지칠 때로 지친 엄마는 3년 뒤 임신을 하게 되었고 겨우 나를 낳게 되었다. 얼마 뒤,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가 아기 성별은 나왔니?" "저… 그게요 어머니" 엄마가 뜸을 들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설마 딸이니…?" 엄마는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어머니 딸이라네요" "…그래. 우선 알겠다. 다음에 내가 또 전화하마" 그 이후로 할머니에게서 오는 연락은 없었다. 할머니의 전화 이후로 엄마는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의문의 종착지 지겹지도 않은지 명절이 또다시 돌아왔다. 나는 명절이 너무 싫었다. 엄마를 닮아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 나와 맞는 또래의 친척도 없었기에 어른들이 우글거리는 장소에서 3시간 이상의 시간을 버티는 건 사실상 고역이었다. 만삭의 엄마와 나 그리고 아빠는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던 집안에서 우리 가족이 들어가는 순간 왠지 모르게 그 전과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어린 나이의 나 역시 우리가 들어가자 갑자기 조용해진 걸 느낄 정도였다.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나는 아빠가 던지는 가벼운 농담이 참 싫었다. 아빠의 농담에는 돌려 말하는 거 같지만 상대에 대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성적인 희롱이 담긴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아빠는 그저 농담 식으로 이 상황을 어물쩍넘기려는 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엄마를 도울 의도였다면 아빠는 엄마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그렇게 아빠의 말을 끝으로 술자리는 더욱 고조되었고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였다.
엄마의 말에 억지로 잠에 들려고 시도했지만, 바깥에서 술자리가 이루어지고 있어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잠이 오지 않자 잡생각이 머리에 가득 찼다. 항상 외갓집에 올 때마다 들었던 생각이 있다. 엄마는 엄마의 가족과 별로 친한 것 같진 않은 것 같다. 한 번씩 외갓집 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엄마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결정적으로 엄마는 가끔 걸려오는 외삼촌들과 이모들의 전화를 일부로 안 받는 것 같다. 왜일까? 나의 이런 의문은 추측만 난무할 뿐 여태 풀리지 않았다. "근데 엄마는 엄마 집에 왔는데도 왜 이렇게 눈치를 봐?" 나의 물음의 엄마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엄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무슨 눈치를 봐~ 엄마는 지금 되게 편한데?" 엄마의 마지막 말에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내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나고 엄마는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았다.
세상이 바뀌고 있고 우리는 애써 묵혀뒀던 문제를 들출 때가 됐다는 것이다. 피하고 외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 또 여성을 바라보는 데 있어 프레임을 씌워선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21세기의 과제는 어렵진 않지만 많은 용기가 필요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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