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없을 땐 평화도 없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간간이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내 뜻과는 상관이 없었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들볶이는 참깨처럼 온몸이 바삭바삭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탈진해서라도 잠들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고통을 살아야 할 까닭으로 삼아서라도 질기게 살아가게 될 내 앞으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늙은인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예절, 체면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내가 받은 벌은 내 그런 교만의 대가였을까.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교만이라니 나는 엄중하지만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듯했다.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 왜 그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알아야만 했다.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내 죄목이 뭔지 알아냈다고 생각하자 조금 가라앉은 듯하던 마음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내 아들은 뭔가.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란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아침에 눈을 뜨자 잘 잤다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애를 잃은 게 꿈이기를 바라는 몽롱한 순간 없이 곧장 의식이 명료해지고 말았다. 또 하루를 살아낼 일이 힘에 겨워 숨이 찼다. 이런 속도로 세월이 가서야 언제 내 아들에게 이르를 거나.

나는 남의 운명을 점치듯이 담담하게 내 앞날의 모습을 내다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수영만의 바다빛이 꼭 잉크를 풀어놓은 것 같다. 문인들하고 유럽을 여행하면서 탄성을 지른 지중해 빛깔도 저러했던가. 그때가 언제더라. 먼먼 옛날의 일 같았다. 내가 문인이었던 것도.

새벽엔 뒤척이기도 지겨워 베란다로 나가 앉아 날이 밝아오는 걸 지켜보았다. 엷은 어둠이 지워져 가는 동안의 바다 빛깔의 변화가 말할 수 없이 미묘했다.
어느 순간 수영만의 빛깔이 정신이 아찔하도록 새파란 속살을 드러내면서 눈높이까지 차올랐다.

보이는 것이라고 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억하는 것이라고 다 존재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 않나. 연일의 불면 때문인가, 기억과 보임, 실재와 감수성이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진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은 다행히 몽롱하다.

내 딴에 이성이나 지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절망적인 내 정신의 한계를 느낀다. 눈 딱 감고 부수든지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못 그러도록 나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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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족과 카르타고가 나눠 차지한 땅과 바다를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이은 세력이 바로 로마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750년경 오늘날의 로마시 일대에 몰려든 라틴족이 세운 도시가 로마의 기원이라고 본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전황은 카르타고에 유리해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제1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바로 ‘땅’ 때문이었다. 카르타고의 정권을 장악했던 지주 계급은 지중해 대신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지중해의 제해권은 포기하더라도, 당시 비옥했던 북아프리카의 땅을 확보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들은 카르타고 해군 일부를 빼돌려 북아프리카 원정에 나서기까지 했다.[2] 그사이에 로마 해군은 재건에 성공했다. 땅(북아프리카)에 집중한 카르타고의 지정학적 판단과 바다(지중해)에 집중한 로마의 지정학적 판단의 차이가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것이었다. 이는 훗날 벌어질 제2차 포에니전쟁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서구 문명이 지중해를 핵심 영역으로 삼아 꽃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포에니전쟁의 결과 지중해의 제해권을 잃은 카르타고군으로서는 로마까지 걸어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군을 이끈 한니발은 기적처럼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를 공격했다. 하지만 마땅한 보급로가 없었기 때문에 곧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한편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며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로마가 한니발을 이탈리아반도에 묶어두고, 히스파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지중해를 장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땅을 걸어 이동하는 것보다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하는 것이 빠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지치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보급도 유리하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한니발이 미처 손쓰기도 전에 지중해를 통해 대군을 급파, 히스파니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즉 한니발의 패배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바다 대신 땅을 선택한 순간 정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로마는 땅을 단순히 삶의 터전 정도로 여겼던 켈트족과 달리, 점령과 지배의 대상으로 보았다. 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켈트족의 느슨한 부족 연합체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던 국가 체제와 어우러지면서, 로마가 전 유럽으로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탈리아반도의 일개 도시에 불과했던 로마가 유럽, 더 나아가 서구 문명의 영역적 토대를 마련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수백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로마가 융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바로 포에니전쟁과 갈리아전쟁이었다. 포에니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카르타고)의 바다가 아닌 유럽(로마)의 바다가 되었다. 이어진 갈리아전쟁을 통해 켈트족의 땅이었던 유럽은 로마의 땅이 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을 온전히 통일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히스파니아에 이슬람 왕국이 들어서고 오스만제국이 강성한 순간에도 지중해는 유럽의 바다로 남았다. 유럽의 문화도 로마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알파벳과 라틴어, 로마법, 예술과 건축, 그리스도교 등 유럽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여러 요소가 로마에 기원을 둔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모습은 로마가 그 땅과 바다를 지배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포에니전쟁과 갈리아전쟁은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한 계기를 넘어, 유럽 자체를 구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206년 ‘대大몽골국’이라는 뜻을 가진 예케 몽골YekeMongol 울루스, 즉 몽골제국을 세운 테무친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을 가진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북쪽 너머에 있는 광대한 스텝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몽골인의 정체성을 획득했다. 그러면서 케레이트족, 나이만족, 메르키트족 등의 유목 민족들이 몽골제국에 속한 울루스들로 흡수, 재편되었다. 칭기즈 칸이 오늘날 몽골인들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는 까닭은 그가 이룩한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위업뿐 아니라, 그를 통해 몽골인의 영역성과 정체성이 온전한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장악하고 관리한 덕분에 실크로드는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안전한 길이 되었고, 자연스레 무역이 활발해졌다. 무역이 선사하는 경제적 이익에 일찍 눈뜬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일례로 트란스옥시아나 서부를 다스리며 원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히바 칸국KhivaKhanate21의 칸이자 역사학자 아불 알가지 바하두르Abual-GhaziBahadur(1603~1604)는 칭기즈 칸의 치세의 중앙아시아를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인 채 아무런 위협도 폭행도 당하지 않고 해 뜨는 땅에서 해지는 땅까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땅"으로 묘사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몽골제국이 만든 ‘하나의 세계’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태종 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와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을 침공한 일본도,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도 상당한 국력을 소모했다. 그런데 각국의 피해 정도와 별개로, 임진왜란은 무엇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우선 일본의 진짜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정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조선, 즉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내어주지 않고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결국 동아시아 전쟁으로 비화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전체의 지정학적 변화를 낳았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조선, 명나라, 일본, 동아시아라는 다양한 스케일을 아우르는 다중스케일적 접근에 따라 해석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략은 명쾌했다. 육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내쳐 달리고, 수군은 남해를 끼고 돌아 서해를 따라 북상하며 보급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 일본 육군은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했으나, 수군은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났으니,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한 남해의 지형을 이용해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 육군은 그 힘이 빨리 소진되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임진왜란 무렵 시작된 기후변화였다. 15세기 말부터 전 세계가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여름 평균 기온이 1도가량 떨어졌다.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작물의 생육이 크게 달라지므로, 기근이 초래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문제는 그 시기가 임진왜란 직후였다는 점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명나라에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결국 17세기에 이르러 기근과 빈곤, 사회적 혼란을 참지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모든 혼란이 수습된 후에도 정성공鄭成功(1624~1662) 같은 명나라 잔당 세력이 타이완과 일부 해안 지대를 근거지 삼아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 이상으로 강력한 해금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몽골, 티베트고원, 타림분지 등 유라시아 내륙 방면으로는 영토를 계속 확장해 현대 중국의 영역성을 구체화했다. 바다를 막고 땅을 크게 넓힌 청나라의 행보는, 현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가 만들어진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한 문물 교류로 경제력과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서구 열강에 추월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명·청 교체로 조선에는 소小중화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 왕조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조선이 중화 문명과 성리학의 중심지라는 생각이었다. 큰 전쟁을 거치면서 충효 관념 또한 더욱더 강조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확립되고 여성의 지위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선이 나름의 분명한 영역성과 정체성을 가진 민족국가로 발전해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대외적으로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 내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일본과 조선이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에 조공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자 에도막부는 조선에 관계 회복과 무역 개시를 요청했다. 대신 조선을 상국으로 대하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명·청 교체로 유사시 청나라를 견제할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던 조선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고 수립된 에도막부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한일 교류사의 한 장을 장식한 통신사가 파견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청나라의 해금 정책은 일본이 바다로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명나라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고 동아시아의 바다가 무주공산으로 변한 틈을 타 일본은 1609년 오늘날 오키나와제도 일대를 다스린 류큐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류큐왕국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동아시아의 해상 중계무역을 담당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세력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류큐왕국을 속국으로 만든 뒤 사탕수수 재배 등을 강요하며 착취했다. 다만 청나라가 개입할지 모르므로 류큐왕국을 완전히 복속하는 대신 속국으로 남겨두었다.(류큐왕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멸망한 때는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메이지유신 이후인1879년이었다.) 아울러 체제 안정을 위해 쇄국 정책을 고수하기는 했지만, 규슈 서부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류를 이어갔다.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일본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나름의 영역성과 정체성을 쌓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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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명문장/강수

강수(强首)는 (・・・) 얻는 바는 높고 깊어서 우뚝 솟은 당대의 인재가 됐다. 드디어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됐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谷)의 대장장이 집 딸과 혼인 전에 정을 통했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자못 돈독했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읍내의 처녀들 중에서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자를 중매하여 장차 그의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며 사양했다. 아버지가 성내며 말하기를 "너는이 시대에 이름이 나서 너를 모르는 나라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미천한 사람을 배우자로 삼는다면 또 수치스럽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조강지처는 마루에서 뜰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미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라고 했으니 미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 문무왕(文武王)이 말하기를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편지로 뜻을 다 전했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나의 선왕이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고 하지만 또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즉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삼국사기> <강수열전>에 나오는 글이다. 통일신라기 때 살았던 강수는 탁월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6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진골귀족이 될 수없기 때문에 국가 고위직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으나 평민보다는 훨씬 지체 높은신분이었다. 당시에는 신분이 낮은 여성과 결혼하면 지탄받았고 자식의 신분은낮아졌다. 그럼에도 사랑을 선택한 강수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로맨티스트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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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학문•철학/이기론 논쟁

성리학은 김종직, 조광조 같은 사림파에 의해 발전하다 이황, 이이에 의해 만개한다. 성리학사에서 이황의 지위는 특별하다. 심성론(性論) 분야에서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특별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성론은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관한 문제다. 인간은 선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악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황은 선한 마음은 하늘이 준 순수한 본성에 있고, 악한 마음은 개인의 감정에 근거한다고 봤다. 이황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이(理)‘ 즉, ‘도덕성의 가치‘를 절대화했는데, 사람안에도 절대적인 도덕적 본성이 있고 이를 잘 유지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황은 독실하고 경건한 삶의 태도를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이는 ‘기(氣)‘ 즉,
‘현실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사람의 마음과 본성은 나눌 수 없고 결국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개인적 훌륭함도 중요하지만 사회 개혁을 통해 모두가 훌륭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논쟁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대표적인 논쟁은 조선 후기 ‘인물성동이론‘으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를 둔 논쟁이다. 같다는 입장을 견지한 세력이 낙론, 다르다는 입장을 주장한 세력은 호론이다. 이황과 이이의 논쟁이 사회개혁 논쟁으로 흘러간 것처럼 호론과 낙론의 논쟁은 이후 청나라 문물을 수용할 것인가, 서양 문물을 수용할 것인가로 발전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도 동등한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북학파, 개화파는 주로 개방적인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낙론을 계승했다고 보고, 위정척사파 호론을 계승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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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문화/붕당

중국과 조선의 독특한 정치 문화, 중국에서는 여타의 문명권과 다르게 일찍부터 관료 제도가 발전한다. 이미 전국 시대부터 본격화됐고 당나라 이후 과거제도가 도입되면서 유교적인 소양을 지닌 사대부가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이 일반화된다. 특히 송나라와 명나라 때는 관료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신하들 간에 정파가 생기고정파 간의 격렬한 정쟁이 벌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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