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족과 카르타고가 나눠 차지한 땅과 바다를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이은 세력이 바로 로마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750년경 오늘날의 로마시 일대에 몰려든 라틴족이 세운 도시가 로마의 기원이라고 본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전황은 카르타고에 유리해지는 듯했다. 그런데도 제1차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바로 ‘땅’ 때문이었다. 카르타고의 정권을 장악했던 지주 계급은 지중해 대신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지중해의 제해권은 포기하더라도, 당시 비옥했던 북아프리카의 땅을 확보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했다. 실제로 그들은 카르타고 해군 일부를 빼돌려 북아프리카 원정에 나서기까지 했다.[2] 그사이에 로마 해군은 재건에 성공했다. 땅(북아프리카)에 집중한 카르타고의 지정학적 판단과 바다(지중해)에 집중한 로마의 지정학적 판단의 차이가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것이었다. 이는 훗날 벌어질 제2차 포에니전쟁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서구 문명이 지중해를 핵심 영역으로 삼아 꽃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포에니전쟁의 결과 지중해의 제해권을 잃은 카르타고군으로서는 로마까지 걸어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군을 이끈 한니발은 기적처럼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를 공격했다. 하지만 마땅한 보급로가 없었기 때문에 곧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한편 로마는 지중해를 통해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며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로마가 한니발을 이탈리아반도에 묶어두고, 히스파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지중해를 장악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땅을 걸어 이동하는 것보다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하는 것이 빠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지치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보급도 유리하다. 이런 이유로 로마는 한니발이 미처 손쓰기도 전에 지중해를 통해 대군을 급파, 히스파니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즉 한니발의 패배는 제1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바다 대신 땅을 선택한 순간 정해졌다고도 볼 수 있다.

로마는 땅을 단순히 삶의 터전 정도로 여겼던 켈트족과 달리, 점령과 지배의 대상으로 보았다. 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켈트족의 느슨한 부족 연합체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던 국가 체제와 어우러지면서, 로마가 전 유럽으로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탈리아반도의 일개 도시에 불과했던 로마가 유럽, 더 나아가 서구 문명의 영역적 토대를 마련한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수백 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로마가 융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 바로 포에니전쟁과 갈리아전쟁이었다. 포에니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카르타고)의 바다가 아닌 유럽(로마)의 바다가 되었다. 이어진 갈리아전쟁을 통해 켈트족의 땅이었던 유럽은 로마의 땅이 되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을 온전히 통일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히스파니아에 이슬람 왕국이 들어서고 오스만제국이 강성한 순간에도 지중해는 유럽의 바다로 남았다. 유럽의 문화도 로마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다. 알파벳과 라틴어, 로마법, 예술과 건축, 그리스도교 등 유럽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여러 요소가 로마에 기원을 둔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모습은 로마가 그 땅과 바다를 지배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포에니전쟁과 갈리아전쟁은 로마가 제국으로 발돋움한 계기를 넘어, 유럽 자체를 구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206년 ‘대大몽골국’이라는 뜻을 가진 예케 몽골YekeMongol 울루스, 즉 몽골제국을 세운 테무친은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을 가진 ‘칭기즈 칸’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북쪽 너머에 있는 광대한 스텝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몽골인의 정체성을 획득했다. 그러면서 케레이트족, 나이만족, 메르키트족 등의 유목 민족들이 몽골제국에 속한 울루스들로 흡수, 재편되었다. 칭기즈 칸이 오늘날 몽골인들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는 까닭은 그가 이룩한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위업뿐 아니라, 그를 통해 몽골인의 영역성과 정체성이 온전한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장악하고 관리한 덕분에 실크로드는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안전한 길이 되었고, 자연스레 무역이 활발해졌다. 무역이 선사하는 경제적 이익에 일찍 눈뜬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일례로 트란스옥시아나 서부를 다스리며 원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히바 칸국KhivaKhanate21의 칸이자 역사학자 아불 알가지 바하두르Abual-GhaziBahadur(1603~1604)는 칭기즈 칸의 치세의 중앙아시아를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인 채 아무런 위협도 폭행도 당하지 않고 해 뜨는 땅에서 해지는 땅까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땅"으로 묘사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몽골제국이 만든 ‘하나의 세계’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태종 때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오늘날의 세계지도와 매우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조선을 침공한 일본도,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도 상당한 국력을 소모했다. 그런데 각국의 피해 정도와 별개로, 임진왜란은 무엇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우선 일본의 진짜 목적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정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조선, 즉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점을 내어주지 않고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결국 동아시아 전쟁으로 비화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전체의 지정학적 변화를 낳았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조선, 명나라, 일본, 동아시아라는 다양한 스케일을 아우르는 다중스케일적 접근에 따라 해석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전략은 명쾌했다. 육군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내쳐 달리고, 수군은 남해를 끼고 돌아 서해를 따라 북상하며 보급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초기 일본 육군은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했으나, 수군은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났으니,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섬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한 남해의 지형을 이용해 곳곳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 육군은 그 힘이 빨리 소진되고 말았다.

더 큰 문제는 임진왜란 무렵 시작된 기후변화였다. 15세기 말부터 전 세계가 소빙하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여름 평균 기온이 1도가량 떨어졌다.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작물의 생육이 크게 달라지므로, 기근이 초래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문제는 그 시기가 임진왜란 직후였다는 점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명나라에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다. 결국 17세기에 이르러 기근과 빈곤, 사회적 혼란을 참지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모든 혼란이 수습된 후에도 정성공鄭成功(1624~1662) 같은 명나라 잔당 세력이 타이완과 일부 해안 지대를 근거지 삼아 저항을 계속했기 때문에, 청나라는 명나라 이상으로 강력한 해금 정책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몽골, 티베트고원, 타림분지 등 유라시아 내륙 방면으로는 영토를 계속 확장해 현대 중국의 영역성을 구체화했다. 바다를 막고 땅을 크게 넓힌 청나라의 행보는, 현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질서가 만들어진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19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한 문물 교류로 경제력과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서구 열강에 추월당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명·청 교체로 조선에는 소小중화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 왕조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조선이 중화 문명과 성리학의 중심지라는 생각이었다. 큰 전쟁을 거치면서 충효 관념 또한 더욱더 강조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확립되고 여성의 지위가 제한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선이 나름의 분명한 영역성과 정체성을 가진 민족국가로 발전해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대외적으로 임진왜란은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 내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일본과 조선이 가까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에 조공할 여지가 완전히 사라지자 에도막부는 조선에 관계 회복과 무역 개시를 요청했다. 대신 조선을 상국으로 대하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명·청 교체로 유사시 청나라를 견제할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던 조선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고 수립된 에도막부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한일 교류사의 한 장을 장식한 통신사가 파견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청나라의 해금 정책은 일본이 바다로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명나라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고 동아시아의 바다가 무주공산으로 변한 틈을 타 일본은 1609년 오늘날 오키나와제도 일대를 다스린 류큐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류큐왕국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동아시아의 해상 중계무역을 담당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세력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류큐왕국을 속국으로 만든 뒤 사탕수수 재배 등을 강요하며 착취했다. 다만 청나라가 개입할지 모르므로 류큐왕국을 완전히 복속하는 대신 속국으로 남겨두었다.(류큐왕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멸망한 때는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메이지유신 이후인1879년이었다.) 아울러 체제 안정을 위해 쇄국 정책을 고수하기는 했지만, 규슈 서부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류를 이어갔다.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일본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며 나름의 영역성과 정체성을 쌓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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