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불안을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는 삶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 텍스트를 읽는 데 아직까지 큰 불편함이 없는 것, 노트북을 유지하고 책을 살 돈이 있는 것, 대상을 인지하고 의식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 누릴 수 있는 글쓰기라는 행운 속에서, 행운에 대해 조금 길게 떠들면, 혹시 행운을 곁에 두고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구나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 글을 쓰면 참 좋을 사람들이 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루하루를 지나친 기대와 미움 없이 살아내는 것이다.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으니 나 힘든 걸 애먼 데 화풀이하지 않고, 최소한의 교양과 상식을 유지하며 나이 드는 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것들을 염려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들에 목매지 않으며. 그렇게 사는 데에 글쓰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좋아해서 자주 회자되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KarlPaulReinholdNiebuhr의 기도문을 나는 종종 내 식대로바꾸어 외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그동안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감각을 다시 설정하는 일이었다. 나서라, 만나라, 누벼라 외치던 세상이 두 해의 팬데믹을 통과하는 동안 나서지 말고, 만나지 말고, 누비지 말 것을 강제했다. 놀라다가, 얼떨떨하다가, 두렵다가, 슬프다가 문득 의아해졌다. 우리는 그동안 왜 그렇게 자주 악수를 하고, 어디를 그렇게 분주하게 다녔던 것일까. 그 회식들은 정말 필요했을까. 그 경조사엔 꼭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와야 했을까. 그 빼곡하던 술자리는 어떤 의미였을까.
소속감과 친화력을 중시하는 사회일수록 내성적인 사람들이 짊어지는 부담이 커진다. 활동의 반경이 곧 경쟁력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 멀리, 더 넓게, 더 많이, 에너지는 외부를 향하도록 독려된다. 에너지가 밖으로 뻗기보다는 안에 머무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겐 유리하지 않다. 그들은 ‘그런’ 세상에서는 조금 더 애를 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언제나 몇 걸음은 더 움직여야 하고, 몇 마디는 더 말해야 한다. 몇 번씩은 더 웃어야 한다.
‘거리’는 본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조건이다. 그들은 틈과 간격 속에서 판단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듣자마자 대꾸하고, 말하자마자 행동하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다. 말보다 글이 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글에는 내가 직접 운용할 수 있는 틈과 간격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조바심이 생기지 않고, 내성적인 사람들의 에너지는 조바심이 없을 때 발휘된다.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쓰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리가 몇 미터이든 그가 가닿고자 하는 거리는 그보다 멀다.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교감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 덜한 게 아니다. 다만 빨리, 한꺼번에 하지 못할 뿐이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리기 좋은 틈과 간격 속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더 깊고 단단한 통로를 낸다.
‘쓰기’가 통증을 줄여준다는 것,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자문자답의 과정 자체가 처방이 된다는 점이었다. 쓰면 나아졌다. 드라마틱하게 나아지진 않아도 쓰기 전보다는 나아졌다. 어지러움의 일부가 고요를 되찾고, 우울은 서핑 가능한 수준의 파도가 되었다. 활화산 같던 일들이 성냥불처럼 소박해졌다. 나는 입김을 후 불어 불씨를 껐다. 성냥불을 끄는 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의 뇌에는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와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 전자가 편도체, 후자가 전전두엽이다. 슬픔에 빠지면 편도체가 과로한다. 그런데 그 슬픔을 ‘슬프다’라고 쓰는 순간 편도체가 쉬고 전전두엽이 일한다. 슬픔의 진창에서 발을 빼고 ‘슬프다’라는 언어를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썼다. 나를 괴롭혔던 모든 감정에 대하여. 그 감정을 일으킨 사건에 대하여. 그 사건을 차단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하여. 내 마음이 나 자신보다 부풀어 마음에게 질질 끌려갈 때 썼다. 유난히 자주 과로하는 편도체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중 하나라면 의식적으로 전전두엽의 노동을 독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나 많은 언어가 필요했다. 기분도 안 좋은데 글 쓰면 더 머리 아프지 않으냐는 물음은 적어도 내게는 어불성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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