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유적•유물/미륵사지 석탑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백제 무왕이 세운 탑으로, 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곳이다. 사리를 봉안했다는 것은 탑이 곧 부처란 의미이기도 하다.

백제 후기인 639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미륵사지 석탑은 규모가 크고 형식은 목탑인 양식을 따랐다. 내부로 들어가는 공간도 있다. 무왕은 백제 부흥을 꿈꾸며 대규모 사원을 건설했고 사원의 중앙에는 목탑, 동서에는 석탑을 세웠다. 그런데 목탑과 석탑뿐 아니라 미륵사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서쪽 석탑이 일제 시대 때 시멘트로 흉물스럽게 복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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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 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土末〕에 이르는 이 답삿길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그 표현에서 지역적 편애라는 혐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남도답사 일번지’가 아니라 ‘남한답사 일번지’라고 불렀을 답사의 진수처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린 역사의 체취가 살아있으며, 이름 없는 도공, 이름 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 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 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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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 장소/경부고속도로

서울에서 부산을 가로지르는 고속국도 제1호선, 1970년에 완공된 후 현재까지 확장, 개보수하면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는 1968년 서울과 인천을 잇기 위해 만든 경인고속도로다.

부산은 지금도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역항이다. 세계적인 무역항과 공항이 중국, 한국, 일본에 집중돼 있는데 인천공항과 더불어 부산항은 세계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미국,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국가 발전을 도모했고 특히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 경상권 개발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수도권과 경상권을 잇는 도로의 건설은 국가적인 숙원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양재동 일대를 관통한 후 한남대교를 통과해서 남산터널을 넘어 강북의 중심지로 들어온다. 한남대교는 당시 세 번째 한강 다리였고, 강남은 농촌에 불과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한강의 대규모 토목 공사 그리고 강남 개발이 이어지면서 서울은 급격하게 팽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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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해 질 무렵이면
무거운 것이 가볍다
가벼운 것이 무겁다

해 질 무렵이면
배가 고파도 배부르다
배가 불러도 배고프다

해 질 무렵이면
보고 싶어도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싶다

해 질 무렵이면
좁은 골목길에
텅 빈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무거울 때는 가볍게
가벼울 때는 무겁게
흔들리다가 엎어져
텅 빈 물통의 물을
다 쏟아버린 사람이 아름답다

마지막 순간


싸락눈 내리던 날 집을 나와
함박눈 내리는 날 집으로 돌아갔으나
집이 없다
집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돌아가셨다
집을 나오던 그때가 바로 마지막이었다

돌아가신 집을 다시 나왔다
함박눈은 계속 퍼붓고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
함박눈이 내리는 하늘의 길은 있어도
내가 가야 할 인간의 길은 없다

사람들은 모든 마지막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아차린다
잠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던
바로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음을

잘 갔다 오라고 손을 흔들고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주던
그때가 바로 마지막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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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 인물/영조

영조(1694년~1776년)는 조선 21대 국왕으로,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했다. 조선 후기,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특히 탕평책을 통해 공존의 정치를 모색했다. 조선국왕 중에는 유일하게 젊은 시절과 노년의 모습이 모두 그림으로 남아 있다.

영조는 철저한 금주론자였다. 심지어 제사상에 오르는 술조차 식혜 등으로 대체했고 전국적으로 금주령을 실시하여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사실금주령은 조선 시대 때 빈번했다. 하지만 대부분 농사와 관련한 일시적인 조치였는데 영조만이 의지를 갖고 꾸준히 추진했다.
영조의 검소함 또한 유명하다. 정조가 지은 《영조행록>에는 "왕은 천성이 검소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단옷을 입지 않고 명주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입은 옷은 여러 번 세탁한 것이 많았고, 심지어 솜이 튀어나온 것들도 간혹 있었다. 드시는 반찬 역시 늘그막까지 몇 가지 안 되었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만약 보통 때보다 그릇 수가 더 있으면 왕께서는 거절하고 들지 않았다. 곁에서 혹시라도 너무하시는 것 아니냐고 하면, 이르기를 ‘이것도 내게는 과하다‘라고 했다. 남쪽 번신이진상해 온 부채도 유선이 아니면 쓰지 않고, 또 쓰더라도 1년 이상 썼다"라는 기록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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