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해 질 무렵이면
무거운 것이 가볍다
가벼운 것이 무겁다

해 질 무렵이면
배가 고파도 배부르다
배가 불러도 배고프다

해 질 무렵이면
보고 싶어도 보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싶다

해 질 무렵이면
좁은 골목길에
텅 빈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아름답다

무거울 때는 가볍게
가벼울 때는 무겁게
흔들리다가 엎어져
텅 빈 물통의 물을
다 쏟아버린 사람이 아름답다

마지막 순간


싸락눈 내리던 날 집을 나와
함박눈 내리는 날 집으로 돌아갔으나
집이 없다
집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돌아가셨다
집을 나오던 그때가 바로 마지막이었다

돌아가신 집을 다시 나왔다
함박눈은 계속 퍼붓고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다
함박눈이 내리는 하늘의 길은 있어도
내가 가야 할 인간의 길은 없다

사람들은 모든 마지막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아차린다
잠깐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던
바로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음을

잘 갔다 오라고 손을 흔들고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주던
그때가 바로 마지막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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