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상은 ‘안동 이천동(泥川洞)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이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제비원이라는 역원(驛院,오늘날의 여관)이 있던 자리여서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과거에는 독한 안동 ‘제비원 소주’(1962년 생산 중단)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원래 제비원의 이미지는 단연코 이 석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안동은 언어생활에서도 전통을 고수하는 집념을 보여준다.
얼핏 생각하기에 안동 양반들은 한자어를 많이 썼을 듯한데 이처럼 한글 이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은 한글이고 한자고 한번 접수한 것은 무조건 끝까지 지키고 보는 전통 고수의 저력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일상에서는 순우리말을 많이 쓰다가 품위와 권위를 찾을 때는 한자어를 많이 쓰는 독특함이 있다.
제비원 석불 | 제비원 고갯마루 겹겹의 바위를 이용해 조성한 고려시대 석불이다.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고려 불상의 좋은 본보기인데 「성주풀이」에서 무당의 본향을 여기로 지목한 것이 아주 흥미롭다.
병산에서 내려다본 병산서원 전경 | 밖에서 본 병산서원은 여느 서원 건축과 큰 차이를 못 느끼는 평범한 서원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 읍내에 있던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4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 존덕사(尊德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건재했던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그런 인문적·역사적 의의 말고 미술사적으로 말한다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이자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병산서원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 상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도 최고이다.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소수서원을 기폭제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서원은 그 구조가 거의 공식화되었을 정도로 아주 정형적이다. 크게 선현을 제사 지내는 사당과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그리고 원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로 이루어진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문집의 원판을 수장하는 장판고(藏板庫),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리고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으로서 누각(樓閣)과 어느 건물에나 당연히 있을 뒷간이 있으며,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관리소인 고사는 별채로 구성된다.
병산서원 또한 그런 전형적인 서원 배치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을 배경으로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 빼어난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건축적·원림적 사고의 탁월성을 보여준다.
만대루| 병산서원 건축의 핵심은 만대루이다. 200명을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이 시원한 누마루는 낙동강과 병산의 풍광을 건축적으로 끌어안는 구실을 한다.
이제 병산서원을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자.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溪流)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이 배치된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결과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 배치는 건물의 레벨 선정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병산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꽃뫼)이다. 이 화산의 낮은 구릉을 타고 외삼문에서 만대루, 만대루에서 강당, 강당에서 내삼문, 내삼문에서 존덕사로 레벨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는 단조로운 기하학적 수치의 증폭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공간 운영을 자세히 따져보면, 사당은 위로 추켜올리듯 모셨는데, 만대루 누마루는 앞마당에서 볼 때는 위쪽으로, 그러나 강당에서 볼 때는 한참 내려보게 레벨이 잡혀 있다. 사당은 상주하고 상용하는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권위와 상징 공간이니 다소 과장된 모습을 취했지만 만대루는 정반대로 봄부터 가을까지 상용하는 공간이므로 그 기능을 최대치로 살려낸 것이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안동 병산서원과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9곳을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병산서원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병산서원에 간 뜻과 건축적·원림적(園林的) 사고가 맞아떨어진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절집 입구의 진입로와 같아서 만약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내소사를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갔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를 생각해본다면 왜 걸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저절로 구해질 것이다.
만대루에서의 조망, 그것이 병산서원 자리 잡음의 핵심인 것이다.
070. 명문장/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즐거움 아니겠는가
이곳에 집을 정한 지 이제 십여 년이다. 속세의 손님이 오지 않아 세상사를 듣지 못한다. 함께 다니는 사람은 산에 사는 승려뿐이고, 나를 아는 것은 강가의 새벽뿐이다. 명예와 이익을 잊고 수령이 있건 없건 내버려 둔 채 피곤하면 낮잠을 자고 즐거우면 시를 읊는다. 그저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강물이 쉬지 않고흘러가는 모습만 볼 따름이다. 찾아오는 벗이 있으면 먼지에 덮인 평상을 쓸어놓고 기다리고, 용렬한 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평상에서 내려가 만나본다.(…) 샘물이 졸졸 흐르니 갈증을 해소할 수 있고, 강물이 넘실거리니 갓끈을 씻을 수 있다. 술이 있으면 걸러 오고 없으면 사다가 혼자 따라 혼자 마시면서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춘다. 산새는 나의 노래 친구요, 처마의 제비는 나의 춤상대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태산에 올랐던 공자의 기상을 떠올리고, 강가에서 시 읊으며 흘러가는 강물을 탄식한 공자를 본받는다. 거센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좁은 집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을 비추니 홀로 천천히걸어 다닌다. 처마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면 베개를 높이 베고 꿈을 꾸며, 산에 눈이 날리면 차를 끓여 홀로 따르기도 한다.(・・・) 갈대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줄풀은 하늘거리며 안개비가 내렸다 그쳤다한다. 구름 덮인 강물이 만 리에 넘실거리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또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겨울 추위가 혹독하면 화로를 끼고 앉아 술동이를 열기도하고, 책을 펴고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드넓은 천지에 홀로 서서 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은자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길재, <야은선생언행습유》중
길재 (1353년~1419년)는 은둔 생활을 통해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정을 지킨 인물이다. 정몽주, 길재는 이후 김종직, 조광조 등을 거치며 조선 사림파 계보의 기원이된다. 역설적이게도 사림파는 조선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한다.
도갑사 관음32응신도
〈관음32응신도〉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에서 관세음보살이 32가지로 변신하여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중앙에 관세음보살을 절벽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유희좌(遊戱座)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는 무수한 산봉우리가 펼쳐지면서 중생이 도적을 만났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등 때마다 관음의 도움을 받는 그림이 동시 축약으로 담겨 있다. 각 장면은 바위, 소나무, 전각, 인물 들로 이루어진 낱폭의 산수인물도라 할 만큼 회화성이 아주 높은데 바위에는 경전의 내용을 마치 암각 글씨인 양 금물로 써넣어 각 장면의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무위사 극락보전| 조선 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맞배지붕의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불당의 엄숙성도 유지하고 있다.
극락보전의 측면관| 극락보전은 측면관이 아주 아름답다. 기둥과 들보를 노출하면서 조화로운 면 분할로 집의 단정한 멋을 은근히 풍기고 있다.
세상의 국보 중에는 국보답지 못한 것이 적지 않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의 영예에 유감없이 답하고 있다.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여기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도 친근함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둥글린 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 초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 있다.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 원색인 것이다.
나의 학생들은 이처럼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정직하고, 무엇인가 느낄 줄 아는 답사의 모범생들이었다.
대학생 시절 나 역시 처음 남도땅을 밟았을 때, 나에게 다가온 가장 큰 감동은 남도의 포근한 들판과 느릿한 산등성이의 곡선 그리고 저 황토의 붉은빛이었다.
계절에 따라, 시각에 따라, 보는 방향에 따라 월출산의 느낌과 아름다움은 다르기 마련이지만 겨울날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덮여 있을 때, 아침 햇살이 역광으로 비칠 때, 그리고 저녁나절 옅은 안개가 봉우리 사이사이로 비치면서, 마치 수묵 산수화의 번지기 효과처럼 공간감이 살아날 때는 그것 자체가 완벽한 풍경화가 된다.
미니북이라 부담없이 꺼내들었지만 다시 읽어도 슬픔이 베어나는 시들이네요.이 분은 다시 태어나도, 일제 강점기일지라도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으실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069. 학문•철학/신문고
백성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 마련된 소원 제도다. 태종 때 만들었고 처음에는 ‘동문고라고 부르다가 세종 때 ‘승문고‘로 바뀌었으나 세조 이후 사라졌다. 그러다 영조때 ‘신문고‘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신문고는 보통 대궐 밖에 있어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창덕궁 안에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오는데 이곳에 걸어둔 것이다.
신문고를 대권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의논은 비록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내놓은 뒤의 일이 진실로 난처하게 된다. 또 점을 침은 역시 그전부터의 고휴(固有)의 법이기에 전면 막아 버리는 일은 또한 경솔하게 의논할 수가 없다.- (정조실록) 1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