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명문장/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즐거움 아니겠는가

이곳에 집을 정한 지 이제 십여 년이다. 속세의 손님이 오지 않아 세상사를 듣지 못한다. 함께 다니는 사람은 산에 사는 승려뿐이고, 나를 아는 것은 강가의 새벽뿐이다. 명예와 이익을 잊고 수령이 있건 없건 내버려 둔 채 피곤하면 낮잠을 자고 즐거우면 시를 읊는다. 그저 해와 달이 뜨고 지며 강물이 쉬지 않고흘러가는 모습만 볼 따름이다. 찾아오는 벗이 있으면 먼지에 덮인 평상을 쓸어놓고 기다리고, 용렬한 자들이 문을 두드리면 평상에서 내려가 만나본다. (…) 샘물이 졸졸 흐르니 갈증을 해소할 수 있고, 강물이 넘실거리니 갓끈을 씻을 수 있다. 술이 있으면 걸러 오고 없으면 사다가 혼자 따라 혼자 마시면서 혼자 노래하고 혼자 춤춘다. 산새는 나의 노래 친구요, 처마의 제비는 나의 춤상대다.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태산에 올랐던 공자의 기상을 떠올리고, 강가에서 시 읊으며 흘러가는 강물을 탄식한 공자를 본받는다. 거센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좁은 집도 편안하고, 밝은 달이 뜰을 비추니 홀로 천천히걸어 다닌다. 처마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면 베개를 높이 베고 꿈을 꾸며, 산에 눈이 날리면 차를 끓여 홀로 따르기도 한다. (・・・) 갈대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줄풀은 하늘거리며 안개비가 내렸다 그쳤다한다. 구름 덮인 강물이 만 리에 넘실거리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또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겨울 추위가 혹독하면 화로를 끼고 앉아 술동이를 열기도하고, 책을 펴고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드넓은 천지에 홀로 서서 조용히 즐기는 것이야말로 은자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 길재, <야은선생언행습유》중
길재 (1353년~1419년)는 은둔 생활을 통해 끝까지 고려에 대한 충정을 지킨 인물이다. 정몽주, 길재는 이후 김종직, 조광조 등을 거치며 조선 사림파 계보의 기원이된다. 역설적이게도 사림파는 조선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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