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터, 산청의 단속사터,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터, 경주 암곡의 무장사터,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터, 강릉 사굴산의 굴산사터…… 어느 폐사지인들 답사객이 마다하리요마는 그중에서도 나에게 답사가 왜 중요한가를 가르쳐준, 꿈에도 못 잊을 폐사지는 설악산 동해와 마주한 산비탈에 자리 잡은 진전사터와 하늘 아래 끝동네에 있는 선림원터다.
진전사탑은 석가탑의 전통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기단이 상하 2단으로 되어 튼튼한 안정감을 주는 것, 3층의 몸체가 상큼한 상승감을 자아내는데 그 체감률을 보면 높이는 1층이 훤칠하게 높고 2층과 3층은 같은 크기로 낮게 설정했지만 폭은 4:3:2의 비율로 좁아지고 있는 점, 지붕돌〔屋蓋石〕의 서까래가 5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 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장의 돌로 만들어 이었는데 몸돌 네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는 점 모두가 석가탑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미터인데 진전사탑은 5미터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 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 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 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 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 차이다.
불국사가 중대 신라를 살던 중앙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 호족의 새로운 문화 능력을 과시했다. 중앙 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 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승탑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를 알기 어렵다. 승탑은 고승의 시신을 화장한 사리를 모신 건조물로 한동안 ‘부도(浮屠)’라고 불리기도 했고, 많은 문화재 명칭에 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도의선사탑 역시 ‘진전사터 부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명확히 말해서 고승의 사리탑(舍利塔), 또는 승탑이라고 해야 맞고, 오늘날에는 문화재청에서도 박물관에서도 역사교과서에서도 승탑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탑의 본질은 사리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것은 불탑, 줄여서 탑이라 하고, 스님의 사리를 모신 것은 승탑이다. 승탑은 스님의 이름 뒤에 탑을 붙여 부르는 것이 보통이며 별도로 승탑 자체에 이름을 부여한 경우도 많다.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승탑이라 하고, 스님의 이름을 알 경우에는 아무개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하며, ‘보조국사 창성탑’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는 승탑도 있다.
진전사터도의선사탑 | 하대신라 선종의 시대, 승탑의 시대를 말해주는 팔각당 형식 승탑의 시원 양식으로 도의선사 사리탑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선종 사찰 폐사지 선림원터는 행정구역상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지만 실제는 양양군·인제군·홍천군·강릉시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의 움푹 꺼진 곳인데, 이 동네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 아래 끝동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은 새 길이 뚫려 더 이상 하늘 아래 끝동네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처연한 이름에 걸맞은 캄캄한 골짜기였다.
‘하늘 아래 끝동네’, 그것은 반역의 자랑이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너머 해발 900미터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 사람들이 ‘하늘 아래 첫동네’라며 역설의 자랑을 펴는 것보다 훨씬 정직하고 숙명적이며 비장감과 허망이 감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 받침과 용머리 지붕돌은 하대 신라의 문화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홍각선사 사리탑비 |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고 돌거북이와 용머리만 남아 있는데, 거북이의 힘찬 기상과 정성을 다한 조각 솜씨에서 9세기 지방문화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雋,1732~1811)이라는 문인이 당대의 최고 가는 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붙인 글을 내 나름으로 각색하여 만든 문장도 이야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진전사터에는 놀랍게도 고압선 송신탑이 어마어마한 위세로 세워져 있다. 진전사탑보다 10배도 더 큰 철탑이 계곡과 산자락을 건너뛰고 있으니 진전사터는 더 이상 진전사터가 아니었다. 2005년부터는 진전사 복원불사가 시작되어 2023년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유한준의 원문은 "知則爲眞愛愛則爲眞看看則畜之而非徒畜也"이며, 이는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진전사가 정확하게 언제 세워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자료가 없다. 그러나 도의(道義)선사가 서라벌을 떠나 진전사의 장로가 되었던 때를 그 시점으로 잡는다면 821년에서 멀지 않은 어느 때가 된다. 진전사의 삼층석탑은 양식상으로 보더라도 9세기 초 하대 신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점을 의심하는 미술사가는 아무도 없다. 진전사의 삼층석탑(국보 제122호)은 아주 아담하게 잘생겼다. 귀엽다, 예쁘다고 표현하기에는 단정한 맛이 강하고, 야무지다고 표현하면 부드러운 인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염거화상의 사리탑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모셔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것을 반출하려다 실패하여 1914년 무렵 탑골공원에 설치했다가 해방 후 경복궁으로 옮겨놓았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놓여 있게 되었다. 전하기로는 원주 흥법사(興法寺)터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하여 미술사가들은 염거화상 사리탑의 원위치를 찾으려고 이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하여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선림원터 |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 미천계곡 깊숙한 곳에 삼층석탑 하나가 그 옛날을 증언하듯 오롯이 서 있다.
선림원터는 미천계곡이 맴돌아가는 한쪽편에 산비탈을 바짝 등에 지고 자리 잡고 있다. 그 터가 절집이 들어서기엔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곳 하늘 아래 끝동네에는 그보다 넓은 평지를 찾아볼 길도 없다. 그렇다면 선림원은 그 이름이 풍기듯 중생들의 기도처가 아니라 스님들의 수도처였던 모양이며, 바로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어느 날 산사태로 통째로 흙에 묻혀버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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