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학문•철학/상업 문화

고조선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상업이 활발했다. 위만조선이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시도한 것. 삼국은 물론 발해까지 중국과 북방 민족, 일본 등과 활발히 교류했다는 기록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가 되면 대외 무역은 더 활발해진다. 통일신라는 울산항, 고려는 벽란도에서 이슬람 상인들과 교역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었고 대부분 사치 품목 위주로 상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가 되면 이러한 역동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고 유학 사상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상업은노력하지 않고 이득을 취하는 나쁜 노동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오랜 기간 중농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 다만 왕실과 양반 사대부의 생활에 부응하기 위해 종로에시절 상인이 활동하고 제한적 범위에서 중국, 일본과 무역을 벌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여러 변화가 나타난다.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무허가상인인 난전상인이 등장했고 선박을 동원해 운송업으로 큰 이윤을 내는 선상 포구에서 도매를 하고 은행의 역할까지 담당하는 객주, 여각 등이 나타났다. 또 특정물품을 매점매석하는 독점 상인 도고가 등장했다. 지방에서는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물건을 파는 보부상이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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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문화/조선의 관료 제도

조선은 고도의 중앙 집권 사회를 지향했다.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뽑았고 여타의 수단으로 권력 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방의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했고 중앙에서는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중국의 관료 제도를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룩한 결과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한층 정교화됐다.
조선은 장원을 비롯하여 과거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인재들을 주로청요직에 발탁했다. 청요직은 삼사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원을 말한다. 사헌부는 관리를 규찰하고, 사간원은 언론 역할을 담당하고, 홍문관은 경연, 국왕의 공부를 주관하는 기능을 한 곳으로 관직은 낮지만 국가 운영에 관해 직언할 수있었고 여론을 조성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보통 삼사의 관원을 거쳐야만 판서, 재상 같은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중앙 정치는 의정부와 6조에서 주관했는데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의정부에서 국정을 총괄했다. 일반적으로는 좌의정이 실세였다고 한다. 6조는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으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조는 인사권을 관할하고, 병조는 군권을 관리했기 때문에 가장 위상이 높은 기구였다. 사극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이 제후국을 표방했기 때문에 황제가 아닌 왕, 폐하가 아닌 전하, 태자가 아닌 세자 그리고 6부가 아닌 6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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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 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 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 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 정전|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종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종묘제례가 다시 재현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1971년부터였다. 김수근, 김중업 등 해방 후 제1세대 건축가들이 종묘에 주목하면서 오랜 침묵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외국을 경험하고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건축가로서 민족적·애국적 관점에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종묘 건축의 미학적 함의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했다. 전통 건축물임에도 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감동적인, 거의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예찬했다.

종묘 정전은 우선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을 두른 이 정전은 예상을 깬 그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정문인 남쪽의 신문(神門)을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이 지면을 깊게 누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색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외국인들이 종묘를 보고 감동한 것은) 파르테논 같은 외관의 장중함이었을 게다. 그러나 종묘 정전의 본질은 정전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프랭크 게리가 왜 다시 종묘를 보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무어라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당시 게리와 동행했던 기자가 쓴 글이 『S매거진』 9월 16일자에 실려 있어 그 기사를 따라가본다.

신문인 남문에 당도하여 정전의 기다란 맞배지붕이 시야를 완전히 압도하는 순간 그는 문득 멈추어 서서 마음을 추스르는 듯, 기도하는 듯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종묘를 감싼 공기 한 모금조차 깊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정전 앞에 선 프랭크 게리| 파격적인 건축으로 이름 높은 프랭크 게리는 단순하면서 장엄한 종묘 정전 앞에서 조용히 이 건축의 미학을 음미하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게리 일행은 종묘 신실을 재현해놓은 공간과 종묘제례 DVD를 10여 분간 관람했다. 안내원이 게리에게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여기에서 종묘제례가 열린다고 하니 이렇게 물었다.

"그때 오면 나도 볼 수 있습니까?"

역시 대가는 명작을 그렇게 바로 알아보았다. 게리의 건축과 종묘는 정반대의 세계이다. 형태에서는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재료에서는 금속과 목재, 지역적으로는 서양과 동양, 시간적으로는 현대와 전통, 어느 모로 보나 양극을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와 나라와 양식이 달라도 대가는 대가끼리, 명작은 명작끼리 그렇게 통하는 바가 있다.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그래서 옛 임금들이 나라에 혼란이 닥치면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종사(宗社)를 어찌하려고…"라며 위기감을 표하곤 했던 것이다. 좌묘우사에서 왼쪽이 더 상위의 개념이니 그중 종묘를 더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종묘는 19칸의 정전과 16칸의 영녕전, 공신각과 칠사당 그리고 제례를 위한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정전 하나뿐이었고 그것이 곧 종묘였다. 규모도 7칸으로 작았다. 정전이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고 영녕전이라는 별묘까지 건립된 것은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가 낳은 결과였다.

위에서 내려다본 정전의 풍경| 종묘를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서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자리앉음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과연 신전이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一) 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月廊)을 달아 짧은 ㄷ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것 같아도 이 월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태종의 건축적 안목은 종묘 건물에 월랑을 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假山)을 조성했다.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녕전| 더 이상 종묘에서 모실 수 없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종은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영원히 후손들과 함께할 수 있게 했다.

증축을 거듭한 영녕전| 왕조가 이어지면서 신주를 모실 분이 늘어나 정전과 영녕전을 계속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헌종 2년에 마지막으로 영녕전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인 16칸을 갖추었다.

영녕전의 측면| 영녕전에는 좌우로 날개를 단 듯한 월랑이 있어 신전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영녕전의 열주|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을 측면에서 보면 열주의 행렬이 장관으로 펼쳐진다. 신전으로서 종묘의 엄숙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헌종 대의 증축이 마치 왕조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이 모두 채워지고 더 이상의 빈 공간이 없어졌다. 정전의 마지막 신실인 제19실에는 순종을 모셨고, 영녕전의 마지막 칸에는 영친왕을 모시면서 16개 신실이 다 찼다. 그러고는 더 모실 신위도 빈 신실도 없었으니 왕조의 종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현재 정전에는 19분의 왕(왕비까지49위)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왕비까지34위)을 모셨다. 조선의 역대 임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태정태세문단세…" 대로 27명이지만 35명의 왕이 모셔진 것은 태조의 선조 네 분,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익종)처럼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분이 열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후의 수가 왕보다 더 많은 것은 원비의 뒤를 이은 계비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종묘의 정전 담장 안에는 각 임금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종교 건축에서 권속(眷屬)에 해당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협시보살, 사천왕, 십대제자와 나한 등이 배속된 것, 기독교에서 열두제자와 성현을 모신 것과 같은 개념으로 임금의 치세를 도와준 공신과 천지자연의 귀신들에게도 함께 제를 올린 것이다. 한 공간에 있지만 이것들 사이에도 엄격한 위계가 있어서 칠사당과 공신당은 월대 아래 별도의 작은 건물에 모셔져 있다.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 것이 이채롭다.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 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 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종묘 건축의 미학|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 있다.

종묘의 낮은 담장| 종묘의 담장은 예상과 달리 아주 낮다. 밖에서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건물의 지붕이 드러나고, 안에서 밖을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는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 보이는 ‘비대칭의 대칭’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그렇고, 조선 왕릉에서 수복방과 수라간 건물이 그렇고, 능묘의 망주석 다람쥐가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가는 것도 그렇다. 평면으로 보면 대칭이지만 입면으로 보면 비대칭을 이룬다. 단순함이 주는 경직됨이나 지루함이 아니라 다양함의 통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기하학적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한 형태로 더 큰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과 같은 비정형의 멋이 서린 조선의 미학이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로(神路)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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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남대문, 보물 1호는 동대문이다. 문화재를 지정하고 보호하는 제도는 일제 강점기부터였다. 남대문의 경우 일제 강점기 보존령에 따라 보물 1호로 정해졌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국보 1호가 됐다. 일부시민단체는 남대문이 아니라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바꿔야 한다고 경험히 주장했다. 2008년 남대문에 화재가 나면서 목조 구조물이 대부분 타버리자 이러한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논란의 배경에는 1호가 가장 좋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보가 보물보다 좋은 것이고, 국보 중에서도 낮은 숫자일수록 중요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보와 보물은 단지 구분 방식에 불과하고 번호는 편의상 필요한 것으로 특별한 의미가 없다.

북한의 국보 1호는 평양성이다. 552년부터 성을 쌓았고 586년에 완공했다. 성의 규모는 매우 큰데 내성, 중성, 외성, 북성 4개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에는 궁궐과 관청이 있었고, 외성에는 백성의 거주 공간이 있었다. 대동강과 보통강이 성을[둘러싸고 있고, 북쪽에는 모란봉 을밀대, 만수대 등이 있어 지형이 험하다. 성벽에는 고구려 특유의 축성술이 반영돼 있다. 평양성의 문들도 국보유적인데 보통문, 대도문, 칠성문 등이 남아 있다.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고, 군사 지휘를 할 수 있는 장대가 일곱 개나 성안에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을밀대 최승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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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부여읍은 정말로 작다. 인구 2만 명이 채 안 되고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킬로미터도 안되는 소읍(小邑)이다(2010년에야 규암에 리조트가 문을 열었고 백제문화테마파크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가람 이병기 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김동환 편 『반도산하』, 삼천리사1941)
부여에 얽힌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123년간의 도읍지로, 백제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는 성왕, 위덕왕 시절 위업도 들은 바 있어서 고구려의 평양, 신라의 경주에 필적할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된다. 최소한 공주 크기만할 것도 같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고요한 풍광뿐이다.

육당의 부여에 대한 사랑의 예찬은 이처럼 끊임없는 사설로 이어져 만약 삼도 고적을 심리적으로 나눈다면 고구려는 의지적이고, 신라는 이성적임에 반해 백제는 감정적이면서 더 나아가 관능적이고 촉감적인 고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는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찬미했다.

부여 답사는 순서와 시간대를 적절히 배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부여 답사의 일정표를 하나의 모범 답안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출발하든 광주 혹은 대구에서 출발하든, 또 공주를 거쳐 오든 곧장 오든 오후 서너 시에는 부여 초입에 있는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에 들르는 것으로 부여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왕도에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며, 거기에서 나성의 등줄기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부여로 들어갈 때 곧 부여 입성(入城), 백제행을 실감케 된다.

백제고분모형관을 능산리 고분군 산자락 반대편에 유적 자체를 방해하지 않고 세운 뜻부터 훌륭하다. 모형관 안에는 서울 가락동 제5호 돌방무덤, 영암 양계리의 독무덤, 부여 중정리의 화장무덤 등 종류별로 아홉 개의 무덤 내부를 해부하듯 재현해놓아 그 까다로운 백제의 분묘 구조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능산리 고분군| 사비시대 왕릉묘역으로 온화한 백제의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여기와 인접한 곳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은 예부터 왕릉이라 전해져왔고 또 사신무덤 같은 특수한 예를 볼 때 더욱 왕릉으로 추정케 된다. 그러나 그 모두 왕릉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비시대 백제의 왕은 모두 여섯 분인데 그중 무왕은 익산, 의자왕은 중국에 그 무덤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으니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네 분이 여기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능산리는 왕가(王家)의 묘역이거나 어느 왕, 아마도 위덕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하들의 딸린무덤〔陪塚〕이 된다. 아무튼 귀인의 무덤인 것은 틀림없다.

백제금동대향로 | 백제 금속공예의 난숙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금동향로는 디테일이 아름다워 연판과 산봉우리마다 백 가지 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능산리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다. 1993년 고분모형관이 있는 바로 옆 논에서 그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이 자리는 원래 절터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 구조인데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이 향로가 발견됐다. 그리고 목탑 자리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리감이 발견됐는데, 이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昌王,즉 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써 있어서 이 절은 왕궁의 원당사찰, 말하자면 백제의 정릉사(定陵寺)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부여 하면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 백마강, 낙화암, 부소산, 고란사 등이다. 조금 주의 깊은 사람이면 학창시절에 정림사 오층석탑과 능산리 고분군을 배운 것(사실은 외운 것)을 기억할 터이고 부여 나성 같은 유적은 거의 초면인 셈이다.

낙화암에서 본 백마강 | 부소산성의 누각과 정자들은 모두 이처럼 아름다운 한 폭의 강변 풍경화를 연출한다. 나는 그중에서 이 경치를 제일로 치고 있다.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 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지도 모른다. 엉겁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어느 옛 시인이 읊었다는 ‘강산여차호 무죄의자왕(江山如此好無罪義慈王)’이다. 풀이하자면 ‘강산이 이토록 좋을지니 의자왕은 죄가 없도다’.

부여 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못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본래 회랑 안에 세워진 것이니 우리는 중문(中門)을 열고 들어온 위치에서 이 탑을 논해야 한다. 이 탑의 설계자가 요구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볼 때 정림사탑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본이 되는 것이다. 완만한 체감률과 높직한 1층 탑신부는 우리에게 준수한 자태를 탐미케 하며 부드러운 마감새는 그 고운 인상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특히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풀(graceful)한 우아미의 화신이다.

정림사터 오층석탑 | 우아한 백제미의 상징이 된 석탑이다. 1층은 성큼 올라서 있고 2층부터 5층까지는 알맞은 체감률을 지니고 있다.

요네다가 제시한 측량에 의하면 모든 수치에서 5층이 관계되면 반드시 다른 층보다 약간씩 커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5층은 4층까지의 체감률을 적용하지 않고 약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요네다가 제시하는 치수들이 약간씩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5층이 약간 커야만 했던 이유는 도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탑을 절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5층이 약간 커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비례가 맞다고 느낄 수 있다. 정림사탑의 설계자는 바로 이 점까지 고려하여 설계했던 것이다.
이 점은 고대국가 시절의 조각과 건축에 자주 나타나는 고대인의 체험 논리이다. 석굴암 본존불,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은 얼굴이 크게 되어 있다. 아이들 표현으로 짱구라고 할 정도로 눈에 두드러지게 머리를 크게 한 것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의 비례감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감은사탑은 2층과 3층의 탑신 높이가 똑같은 치수지만 탑 앞에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서는 3층이 약간 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니까 도면상에서는 7:7.2로 나타나지만 실제 눈으로 볼 때는 7:7이 되는 것이다. 이 실제 체감에 적용될 비례를 위해 고대인들은 슬기롭게 도면상의 비례를 파기했다.

나는 부여 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 답사가 아니라 부여 지방 풍광 기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부여 답사의 핵심은 어쩌면 이 박물관 관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 아니라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 문화권 지방 박물관으로서 아주 특색 있게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 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본래 불상과 보살상은 당시의 미인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이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은 어여쁜 맵시를 하고 있어서 미술사학도들은 ‘미스 백제’라고 부른다. 이 보살상은 특히 뒷모습도 아름답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불, 보살, 나한상이 모두 소품인지라 그 감동의 폭이 작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아쉬움을 한번에 달래주는 유물이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불상 좌대다. 저 큰 좌대에 앉아 있을 불상은 어떤 모습이겠으며, 저 맵시 있게 반전된 연꽃에 어울릴 옷주름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노라면 금세 보았던 백제의 불, 보살, 나한상 들이 열 배, 스무 배 크기의 영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백제의 숨결은 살아나고 백제의 미학은 고양된다.
그러나 꼭 크고 웅장해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일 뿐만 아니라 거의 병적인 현상이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격언도 있다. 그것을 소중현대(小中現大)라 한다. 즉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작은 화첩에 역대 명화 대작들을 축소하여 복사하듯 그려보고는 그 표장에 ‘소중현대’라고 적어서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우리야말로 소중현대의 철학을 배워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백제의 유물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요컨대 백제의 미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소중현대’를 합치면 제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나라 예술 속에서 그리움을 노래한 몇몇 대가를 알고 있다. 한 분은 김소월(金素月)이다. 그분의 시는 거의 다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초혼」 같은 시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소월이 보여준 그리움이란 항시 이루어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절한 동경의 그리움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은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황혼녘에 울부짖는 「소」 「달과 까마귀」 「손」에 실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는 그리움의 고통을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그의 그리움에서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소월과 이중섭의 그리움에는 치열한 현실의식이나 역사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까지를 말하는,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은 신동엽의 차지였다. 그의 「산에 언덕에」에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남김없이 서려 있다. 지금도 백마강변 나성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이 「산에 언덕에」가 조용한 글씨체로 잔잔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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