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 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 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 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 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 정전|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이다.
종묘가 새롭게 조명된 것은 종묘제례가 다시 재현되어 일반에게 공개된 1971년부터였다. 김수근, 김중업 등 해방 후 제1세대 건축가들이 종묘에 주목하면서 오랜 침묵이 깨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은 외국을 경험하고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건축가로서 민족적·애국적 관점에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종묘 건축의 미학적 함의에 놀라움과 경의를 표했다. 전통 건축물임에도 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감동적인, 거의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예찬했다.
종묘 정전은 우선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을 두른 이 정전은 예상을 깬 그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정문인 남쪽의 신문(神門)을 들어서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이 지면을 깊게 누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색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외국인들이 종묘를 보고 감동한 것은) 파르테논 같은 외관의 장중함이었을 게다. 그러나 종묘 정전의 본질은 정전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정전 앞 월대| 신문 앞에서 정전을 바라보면 넓은 월대가 보는 이의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이 월대가 있음으로 해서 종묘 정전 영역은 더욱 고요한 침묵의 공간을 연출한다.
프랭크 게리가 왜 다시 종묘를 보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무어라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당시 게리와 동행했던 기자가 쓴 글이 『S매거진』 9월 16일자에 실려 있어 그 기사를 따라가본다.
신문인 남문에 당도하여 정전의 기다란 맞배지붕이 시야를 완전히 압도하는 순간 그는 문득 멈추어 서서 마음을 추스르는 듯, 기도하는 듯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종묘를 감싼 공기 한 모금조차 깊게 음미하는 듯했다.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일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정전 앞에 선 프랭크 게리| 파격적인 건축으로 이름 높은 프랭크 게리는 단순하면서 장엄한 종묘 정전 앞에서 조용히 이 건축의 미학을 음미하고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게리 일행은 종묘 신실을 재현해놓은 공간과 종묘제례 DVD를 10여 분간 관람했다. 안내원이 게리에게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여기에서 종묘제례가 열린다고 하니 이렇게 물었다.
"그때 오면 나도 볼 수 있습니까?"
역시 대가는 명작을 그렇게 바로 알아보았다. 게리의 건축과 종묘는 정반대의 세계이다. 형태에서는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재료에서는 금속과 목재, 지역적으로는 서양과 동양, 시간적으로는 현대와 전통, 어느 모로 보나 양극을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와 나라와 양식이 달라도 대가는 대가끼리, 명작은 명작끼리 그렇게 통하는 바가 있다.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즉 백성(인간)들의 생존 토대를 관장하는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한편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그래서 옛 임금들이 나라에 혼란이 닥치면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종사(宗社)를 어찌하려고…"라며 위기감을 표하곤 했던 것이다. 좌묘우사에서 왼쪽이 더 상위의 개념이니 그중 종묘를 더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종묘는 19칸의 정전과 16칸의 영녕전, 공신각과 칠사당 그리고 제례를 위한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정전 하나뿐이었고 그것이 곧 종묘였다. 규모도 7칸으로 작았다. 정전이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고 영녕전이라는 별묘까지 건립된 것은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가 낳은 결과였다.
위에서 내려다본 정전의 풍경| 종묘를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서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자리앉음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과연 신전이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종묘가 창건된 지 15년 후, 태종은 디자인과 구조를 완전히 바꾸며 종묘의 면모를 일신했다. 태종은 일(一) 자 형태의 긴 건물 양끝에 월랑(月廊)을 달아 짧은 ㄷ자 형태로 만들었다. 월랑이 달림으로써 종묘는 사당으로서 경건함을 얻고 건축적 완결성을 갖출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것 같아도 이 월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태종의 건축적 안목은 종묘 건물에 월랑을 단 것에 그치지 않는다. 태종은 종묘에 경건하고 아늑한 기운이 깃들게 하기 위해 종묘 앞에 가산(假山)을 조성했다. 그 당시에 이처럼 건축 공간에 주변 환경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녕전| 더 이상 종묘에서 모실 수 없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종은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영원히 후손들과 함께할 수 있게 했다.
증축을 거듭한 영녕전| 왕조가 이어지면서 신주를 모실 분이 늘어나 정전과 영녕전을 계속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헌종 2년에 마지막으로 영녕전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인 16칸을 갖추었다.
영녕전의 측면| 영녕전에는 좌우로 날개를 단 듯한 월랑이 있어 신전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지닐 수 있었다.
영녕전의 열주|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을 측면에서 보면 열주의 행렬이 장관으로 펼쳐진다. 신전으로서 종묘의 엄숙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헌종 대의 증축이 마치 왕조의 마지막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종말과 함께 정전과 영녕전의 신실이 모두 채워지고 더 이상의 빈 공간이 없어졌다. 정전의 마지막 신실인 제19실에는 순종을 모셨고, 영녕전의 마지막 칸에는 영친왕을 모시면서 16개 신실이 다 찼다. 그러고는 더 모실 신위도 빈 신실도 없었으니 왕조의 종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이리하여 현재 정전에는 19분의 왕(왕비까지49위)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왕비까지34위)을 모셨다. 조선의 역대 임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태정태세문단세…" 대로 27명이지만 35명의 왕이 모셔진 것은 태조의 선조 네 분,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익종)처럼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분이 열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후의 수가 왕보다 더 많은 것은 원비의 뒤를 이은 계비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종묘의 정전 담장 안에는 각 임금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종교 건축에서 권속(眷屬)에 해당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협시보살, 사천왕, 십대제자와 나한 등이 배속된 것, 기독교에서 열두제자와 성현을 모신 것과 같은 개념으로 임금의 치세를 도와준 공신과 천지자연의 귀신들에게도 함께 제를 올린 것이다. 한 공간에 있지만 이것들 사이에도 엄격한 위계가 있어서 칠사당과 공신당은 월대 아래 별도의 작은 건물에 모셔져 있다.
칠사당| 칠사당은 천지자연을 관장하는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유교 공간이면서도 토속신을 끌어안아 모신 것이 이채롭다.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 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 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신과 혼을 담은 신전이다. 그 신전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조선인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문화력에서 나온다.
종묘 건축의 미학|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 있다.
종묘의 낮은 담장| 종묘의 담장은 예상과 달리 아주 낮다. 밖에서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건물의 지붕이 드러나고, 안에서 밖을 보면 담장 지붕 너머로 열린 공간이 펼쳐진다.
많은 현대 건축가가 찬사를 보내듯 신을 모시는 경건함에 모든 건축적 배려가 들어가 있다.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20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있다는 사실이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다. 그 단순성에서 나오는 장중한 아름다움은 곧 공경하는 마음인 경(敬)의 건축적 표현이다. 이 단순한 구조에 아주 간단한 치장으로 동서 양끝을 짧은 월랑으로 마감하여 하나의 건축으로서 완결성을 갖추었다. 그로 인해 정전 건물은 보는 이를 품에 끌어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이는 이 건축에 친근함을 가져다준다. 동서 월랑의 구조는 대칭이 아니다. 하나는 열린 공간이고 하나는 막힌 공간이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 보이는 ‘비대칭의 대칭’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그렇고, 조선 왕릉에서 수복방과 수라간 건물이 그렇고, 능묘의 망주석 다람쥐가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내려가는 것도 그렇다. 평면으로 보면 대칭이지만 입면으로 보면 비대칭을 이룬다. 단순함이 주는 경직됨이나 지루함이 아니라 다양함의 통일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기하학적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한 형태로 더 큰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과 같은 비정형의 멋이 서린 조선의 미학이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로(神路)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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