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부여읍은 정말로 작다. 인구 2만 명이 채 안 되고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킬로미터도 안되는 소읍(小邑)이다(2010년에야 규암에 리조트가 문을 열었고 백제문화테마파크가 조성되었다). 그래서 가람 이병기 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김동환 편 『반도산하』, 삼천리사1941)
부여에 얽힌 이런 허망은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은연중 들어앉은 부여에 대한 환상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123년간의 도읍지로, 백제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는 성왕, 위덕왕 시절 위업도 들은 바 있어서 고구려의 평양, 신라의 경주에 필적할 백제 왕도의 유적이 있으리라 기대해보게 된다. 최소한 공주 크기만할 것도 같다. 그러나 막상 부여에 당도해보면 왕도의 위용은커녕 조그만 시골 읍내의 고요한 풍광뿐이다.

육당의 부여에 대한 사랑의 예찬은 이처럼 끊임없는 사설로 이어져 만약 삼도 고적을 심리적으로 나눈다면 고구려는 의지적이고, 신라는 이성적임에 반해 백제는 감정적이면서 더 나아가 관능적이고 촉감적인 고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는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찬미했다.

부여 답사는 순서와 시간대를 적절히 배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나는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부여 답사의 일정표를 하나의 모범 답안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에서 출발하든 광주 혹은 대구에서 출발하든, 또 공주를 거쳐 오든 곧장 오든 오후 서너 시에는 부여 초입에 있는 능산리(陵山里) 고분군에 들르는 것으로 부여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왕도에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되며, 거기에서 나성의 등줄기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며 부여로 들어갈 때 곧 부여 입성(入城), 백제행을 실감케 된다.

백제고분모형관을 능산리 고분군 산자락 반대편에 유적 자체를 방해하지 않고 세운 뜻부터 훌륭하다. 모형관 안에는 서울 가락동 제5호 돌방무덤, 영암 양계리의 독무덤, 부여 중정리의 화장무덤 등 종류별로 아홉 개의 무덤 내부를 해부하듯 재현해놓아 그 까다로운 백제의 분묘 구조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능산리 고분군| 사비시대 왕릉묘역으로 온화한 백제의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여기와 인접한 곳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능산리 고분군은 예부터 왕릉이라 전해져왔고 또 사신무덤 같은 특수한 예를 볼 때 더욱 왕릉으로 추정케 된다. 그러나 그 모두 왕릉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비시대 백제의 왕은 모두 여섯 분인데 그중 무왕은 익산, 의자왕은 중국에 그 무덤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으니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네 분이 여기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능산리는 왕가(王家)의 묘역이거나 어느 왕, 아마도 위덕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하들의 딸린무덤〔陪塚〕이 된다. 아무튼 귀인의 무덤인 것은 틀림없다.

백제금동대향로 | 백제 금속공예의 난숙함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금동향로는 디테일이 아름다워 연판과 산봉우리마다 백 가지 도상이 조각되어 있다.

능산리 고분군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다. 1993년 고분모형관이 있는 바로 옆 논에서 그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이 자리는 원래 절터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 구조인데 공방(工房)으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이 향로가 발견됐다. 그리고 목탑 자리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리감이 발견됐는데, 이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昌王,즉 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써 있어서 이 절은 왕궁의 원당사찰, 말하자면 백제의 정릉사(定陵寺)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부여 하면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것이 백마강, 낙화암, 부소산, 고란사 등이다. 조금 주의 깊은 사람이면 학창시절에 정림사 오층석탑과 능산리 고분군을 배운 것(사실은 외운 것)을 기억할 터이고 부여 나성 같은 유적은 거의 초면인 셈이다.

낙화암에서 본 백마강 | 부소산성의 누각과 정자들은 모두 이처럼 아름다운 한 폭의 강변 풍경화를 연출한다. 나는 그중에서 이 경치를 제일로 치고 있다.

그래서 부여에 오면 우선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거지 같은’ 전설의 절벽과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고란초라도 봐야 부여에 다녀왔다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부소산에 오르는 사람은 또다시 부여를 욕되게 말할지도 모른다. 엉겁결에 보는 낙화암은 그 스케일이 전설에 어림없고, 고란사는 초라한 암자로 절맛이 전혀 없으며, 부소산성이라는 것은 말이 산성이지 뒷동산 언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게 잔망스러워서 무슨 전설과 역사를 여기다 갖다붙인 것이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절로 날 것이다.

어느 옛 시인이 읊었다는 ‘강산여차호 무죄의자왕(江山如此好無罪義慈王)’이다. 풀이하자면 ‘강산이 이토록 좋을지니 의자왕은 죄가 없도다’.

부여 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못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본래 회랑 안에 세워진 것이니 우리는 중문(中門)을 열고 들어온 위치에서 이 탑을 논해야 한다. 이 탑의 설계자가 요구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볼 때 정림사탑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한 표본이 되는 것이다. 완만한 체감률과 높직한 1층 탑신부는 우리에게 준수한 자태를 탐미케 하며 부드러운 마감새는 그 고운 인상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특히 아침 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풀(graceful)한 우아미의 화신이다.

정림사터 오층석탑 | 우아한 백제미의 상징이 된 석탑이다. 1층은 성큼 올라서 있고 2층부터 5층까지는 알맞은 체감률을 지니고 있다.

요네다가 제시한 측량에 의하면 모든 수치에서 5층이 관계되면 반드시 다른 층보다 약간씩 커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5층은 4층까지의 체감률을 적용하지 않고 약간 크게 만들었기 때문에 요네다가 제시하는 치수들이 약간씩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5층이 약간 커야만 했던 이유는 도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탑을 절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5층이 약간 커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비례가 맞다고 느낄 수 있다. 정림사탑의 설계자는 바로 이 점까지 고려하여 설계했던 것이다.
이 점은 고대국가 시절의 조각과 건축에 자주 나타나는 고대인의 체험 논리이다. 석굴암 본존불,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은 얼굴이 크게 되어 있다. 아이들 표현으로 짱구라고 할 정도로 눈에 두드러지게 머리를 크게 한 것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의 비례감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감은사탑은 2층과 3층의 탑신 높이가 똑같은 치수지만 탑 앞에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서는 3층이 약간 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니까 도면상에서는 7:7.2로 나타나지만 실제 눈으로 볼 때는 7:7이 되는 것이다. 이 실제 체감에 적용될 비례를 위해 고대인들은 슬기롭게 도면상의 비례를 파기했다.

나는 부여 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 답사가 아니라 부여 지방 풍광 기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부여 답사의 핵심은 어쩌면 이 박물관 관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 아니라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 문화권 지방 박물관으로서 아주 특색 있게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 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본래 불상과 보살상은 당시의 미인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이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은 어여쁜 맵시를 하고 있어서 미술사학도들은 ‘미스 백제’라고 부른다. 이 보살상은 특히 뒷모습도 아름답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불, 보살, 나한상이 모두 소품인지라 그 감동의 폭이 작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아쉬움을 한번에 달래주는 유물이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테라코타 불상 좌대다. 저 큰 좌대에 앉아 있을 불상은 어떤 모습이겠으며, 저 맵시 있게 반전된 연꽃에 어울릴 옷주름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노라면 금세 보았던 백제의 불, 보살, 나한상 들이 열 배, 스무 배 크기의 영상으로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 백제의 숨결은 살아나고 백제의 미학은 고양된다.
그러나 꼭 크고 웅장해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일 뿐만 아니라 거의 병적인 현상이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격언도 있다. 그것을 소중현대(小中現大)라 한다. 즉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작은 화첩에 역대 명화 대작들을 축소하여 복사하듯 그려보고는 그 표장에 ‘소중현대’라고 적어서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우리야말로 소중현대의 철학을 배워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백제의 유물들이 시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요컨대 백제의 미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소중현대’를 합치면 제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나라 예술 속에서 그리움을 노래한 몇몇 대가를 알고 있다. 한 분은 김소월(金素月)이다. 그분의 시는 거의 다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초혼」 같은 시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소월이 보여준 그리움이란 항시 이루어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절한 동경의 그리움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은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황혼녘에 울부짖는 「소」 「달과 까마귀」 「손」에 실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는 그리움의 고통을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그의 그리움에서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소월과 이중섭의 그리움에는 치열한 현실의식이나 역사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까지를 말하는,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은 신동엽의 차지였다. 그의 「산에 언덕에」에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남김없이 서려 있다. 지금도 백마강변 나성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이 「산에 언덕에」가 조용한 글씨체로 잔잔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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