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이상한 일은 인생의 마지막에 다가가서야, 그제야 세상과 타인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을 더 낮은 위치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더 높은 위치로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천박함에 대해 충분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자신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열정이 행복을 가져올 수 없고 어느 특정한 쾌락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노년을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쾌락은 부정적이고 고통은 긍정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즐거움이란 어떤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즐거움도 없어진다는 사실은, 식사를 한 후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고 잠을 푹 자고 난 뒤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한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청년기는 고난의 시기이고, 노년기는 휴식의 시기이다. 이것만으로도 두 시기가 행복하게 생각하는 환경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노년기에는 모든 것이 안정적이다. 피가 차가워져서 감각기관의 과민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경험으로 인해 사물의 가치나 쾌락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게 되어 예전에 사물의 가치에 대한 자유롭고 순수한 견해를 가리고 왜곡시켰던 환상이나 망상, 편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예전보다 더 정확하고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한 어느 정도는 세상 모든 것의 올바름을 이해하게 된다. 거의 모든 노인, 심지어 아주 평범한 능력을 갖춘 사람조차 어느 정도는 지혜롭다는 인상을 주어 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겉모습, 지혜로워 보이는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노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가져온다. 이러한 평정심은 행복의 커다란 한 부분이며, 어쩌면 행복의 필수 조건이자 본질적인 요소이다.
시간과 공간, 그 두 가지의 상호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이러한 조건에서 지각하는 것은 단순한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시간은 우리의 인식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실제로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개개인의 사람은 모든 것의 나약함, 허무함, 꿈과 같은 본성을 더 분명히 인식할수록 자신의 내적 존재의 영원함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사물의 질은 실제로 다른 것들과 대조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이렇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객관적인 현재는 시간이라는 직관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멈출 수 없이 계속 굴러간다. 주관적 현재는 확고해 늘 동일하게 고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지나간 시간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그리고 존재의 덧없음을 인식하면서도 우리의 불멸을 의식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집트인이 저승의 신인 오르쿠스를 아멘테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아멘테스는 플루타르코스(<이시스와 오시리스에 대하여> 29장)에 따르면 "빼앗는 자이자 주는 자"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 동일한 근원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받은 대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은 이 대출의 하루 이자가 될 것이다.
세계라는 무대에서 작품과 가면이 아무리 바뀐다 해도 배우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우리는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자극하고, 눈이 빛나며, 목소리는 더욱 크게 퍼져나간다. 천 년 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똑같은 상황이었고 똑같은 사람들이었으며, 천 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장치는 바로 시간이다.
아무리 현실에서는 하찮은 현재라도 가장 중요했던 과거보다는 더 우월한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유와 무의 관계와도 같다. 수천 년 동안이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에 존재하고, 잠시 뒤 똑같이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놀랍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정신적인 유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점점 사라져가는 현재 이외에는 그것을 기반으로 할 근거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 존재에는 형식을 향한 끊임없는 움직임만 있을 뿐, 우리가 항상 추구하는 안정을 얻을 가능성은 없다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한 안식 속에서 생성하지도 흘러가지도 않고, 변화도 시간도 없고, 다수의 차이도 없다.(플라톤, <티메우스>) 이러한 소극적인 인식이 바로 플라톤 철학의 기초이다.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이 생존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 인생의 장면은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도 같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한평생 일시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과제는 그 무엇보다 어떻게든 생계를 해결해서 자신을 보존하는 업무, 즉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면 그렇게 얻은 것은 부담이 된다. 그리하여 맹금류처럼 안전하게 살아가는 생명체를 노리다가 공격하는 무료함을 방지하기 위해 그 목숨을 처리해야 하는 두 번째 과제가 생긴다. 첫 번째 과제는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 과제는 그것을 얻은 후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첫 번째 과제에서 얻은 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이 일종의 일탈인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은 바로 인간은 욕구의 집합체이며 그의 욕구를 달성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욕구를 달성하면 고통이 없는 상태가 되지만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곧 권태감에 사로잡혀 버릴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무료함은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료함이란 사실 그의 존재가 공허한 것이라는 느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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