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4차 산업혁명, AI 혁명의 시대이다. 물론 이런 혁명은 기술의 발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비약적인 기술 발전의 기원은 무엇일까? 중세를 마감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화려하게 펼쳐진 과학의 힘이다. 그 힘의 원천은 당연히 ‘이성’이다.
과학이 보편적 진리인 까닭은 그 과학을 주관하는 이성이 보편적인 까닭이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지배력을 이성의 보편성에서 확인했다.

하나의 보편적 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라 여겨졌던 이성은 이런저런 역사와 맥락에 따라 출현하는 ‘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의사소통적 이성 역시 보편적인 것이 아니리라. 우리의 소통 자체가 인간 이성의 품을 떠난 시대에 들어서버렸다는 사실이 이를 잘 알려준다.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인간 이성이 아니라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근대는 인간 이성이 수학과 수학에 뿌리를 둔 기계기술을 통해 대상을 지배한 시대였다. 지배하는 능동적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이분법이 근대의 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지배하는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구도는 허구적일 것이다.

우리는 벌써 근대를 지나쳤는데 여전히 근대적 인간 주체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챗GPT는 이미 지식을 산출하고 유통하는 주체인데, 한낱 학생들이 부정 과제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래전 전자오락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을 때 폭력이 난무한다며 도덕적 설교자의 어조로 이 기계의 폐해를 우려하던 목소리가 기시감 속에서 들린다.
새로운 기계만 나오면 인간 주체는 주체와 대상을 가르는 이분법, 그리고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터미네이터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챗GPT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 윤리 규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일 수 있을까?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챗GPT의 언론자유를 편드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간 주체와 지배 대상의 구분, 원본과 복사물의 구분 등과는 멀어진 새로운 지식 환경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재래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어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자식 역할도 이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AI와 인간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인간계는 풍비박산이 났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가 인간이란 예술적 갈구 이상으로 종교적 갈구가 심한 생물임을 알게 된다면? AI는 신을 발명해서 인간을 감동시킬(유혹할) 것이다. AI 앞에서 단지 예술가가 살아남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래의 종교가 살아남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직업이 위협받게 되며, 이제 우리는 이런 정겹고도 짜증 나는 질문자가 없는 외로운 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내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챗GPT가 신부님, 목사님, 스님보다 더 영혼의 위로가 될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그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동반자이다. 내가 아는 한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리고 챗GPT만큼 말 잘하는 자도 없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

산책

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린 이동 방식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걷는 중에 생각할 수 있고, 나중에 사람들과 해야 할 말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행운과도 같은 햇살을 만날 수도,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잘 아는 길도 최초의 길인 듯 관광객처럼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다. 차를 타면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진다. 일찍 도착해서 빨리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 빨리 복잡한 대화를 나눠야 할 뿐이다. 촉박한 일정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걷기의 정수는 ‘산책’이 간직하고 있다.
산책을 다른 걷기와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산책은 이동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 세우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맞다. 산책은 자유로운 생각의 폭죽을 만들어낸다.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까? 그럴 것이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산책은 지구 위를 걸어 다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자체이다. 산책 중 얻게 되는 착상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어떤 억압적인 규칙에도 짓눌리지 않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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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계몽군주

근대 철학의 황금기에 철학자들에겐 특별한 후원자, 주인, 또는 보는 관점에 따라선 성가신 학생이 있었다. 바로 계몽군주이다.

계몽군주가 탄생하길 열망하고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도하는 일은, 단지 근대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라 철학 자체의 오랜 꿈이 아닌가? 시라쿠사의 참주들을 방문하기 위해 평생 여행했던 플라톤이 잘 알려주듯, 군주를 철학으로 깨우치는 것은 철학자의 일생일대 소명이었다.

근대의 ‘계몽’은 자유를 추구하는 ‘비판적 태도’의 상속자이다.

칸트가 긍정과 인정 속에 인용하는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이 알려주는 것은, 따지는 일이 복종이라는 한계 속에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계몽의 용기는 통치자에 대한 복종이라는 한계 안의 용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계몽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것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불화가 생긴다면? 칸트는 말한다. "국민이 자신에 대해서조차 내려서는 안 되는 결정을 하물며 군주가 국민에 대해서 내려서는 안 된다." 이 문장은 푸코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 칸트가 통치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계약을 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복종은 하되, 복종해야 하는 정치적 원리가 보편적 이성에 부합하는 한에서 그럴 수 있다는 계약의 제안 말이다. 이럴 경우 "‘복종하라’는 명령이[복종하는 자의] 자율성 자체에 의거하게" 된다.

그러나 복종 자체가 이성의 자율성으로부터 유래할 때 여기에는 어떤 위험이 있지 않을까? 바로 이성 자체가 ‘자율적으로’ 통치자의 권력에 복종함으로써 권력에 불가항력적이 되는 위험 말이다. "바로 이성 그 자체가 권력의 남용과 통치화에 역사적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성 자신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항력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9

철학자와 계몽군주 사이에, 또는 철학과 국가 사이에 계몽은 누구의 소유일까? 적어도 둘의 공동 소유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악마적인 기만이 침입하고 있지 않은지 사방을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계몽 또는 철학함이란 제한이 없는 것이고, 통치자는 제한을 만드는 자이다. 따라서 철학을 하되 제한에 복종하는 일, 정확히는 철학의 이름으로 자율적으로 복종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철학의 이름 아래는 제한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위반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자리 잡는다.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

충직한 개들은 인간의 무용담에 출현하지만 영리한 원숭이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만든다. 매력적인 원숭이 무용담은 고전부터 현대 작품에 이른다.

어두운 《서유기》가 우리 시대의 것이다. 화해와 조화의 이념에 내기를 거는 정치가 있고, 노골적인 이익 행사를 향해 걸어가는 정치가 있다. 오늘날 국제사회 어디를 돌아보건, 누구나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동참하고 싶게 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정치가 없다. 오로지 힘의 자랑과 토라짐과 위협이 있다. 글로 옮기기도 민망할 정도이긴 하지만, 가령 북한의 지도자와 눈높이를 맞추고서 "내 핵단추가 더 세다"고 했던 지난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인류가 바라볼 이념이 사라진 대신 동네 아이들이 주먹으로 투덕거려 골목을 제패하는 수준의 정치가 지배하는 현실을 말해준다. 그야말로 짐승들 사이의 ‘종의 전쟁’이 있을 뿐, 갈등이 상승된 화해에 가닿고, 이상에 드디어 손을 대보는 《서유기》 식 전망은 세상 밖으로 사라진 듯하다.

이런 전망은 관념적이라고? 관념 아닌 현실의 규칙에 대해서는 이미 고달픈 나날의 싸움으로부터 모두가 질리도록 체득했다. 반대로 정치만이 인간의 꿈에 귀 기울이고 그 꿈을 향해 오를 수 있는 계단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삶에는 권력가와 그가 만든 임의의 규칙, 규칙의 허점을 노린 축재蓄財, 위반에 대한 형벌, 그리고 보복으로서 ‘종의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

근대와인간 주체의 탄생

우리는 ‘인간 주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도대체 ‘주체’가 뭐길래 우리는 자신이 ‘주체’이기를 열망하는 걸까? ‘인간 주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담겨 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방향 짓는, 우리가 담겨 사는 요람은 무엇인가? 바로 ‘근대modern times’이다. 근대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인 연표에서 근대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점은 근대란 연표상의 객관적인 어떤 기간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의 ‘태도’라는 점이다. ‘근대moder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형용사 ‘modernus’(모데르누스)는 ‘가까운’이라는 뜻을 지닌다. 가까움이란 지금의 시점에 대해 가까운 것이니, 곧 새롭다는 뜻이다. ‘근대’란 자신의 현재를 새로운 시기로 감지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 점은 근대를 대표하는 저작들의 제목에서부터 표현된다.

주체라는 말은 애초에 인간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주체’를 소유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인간 주체’가 탄생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 학문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성이 지닌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數’이다. 이성은 수를 바탕으로 연구 공간을 열어놓고, 그 안에 들어서는 것을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수리물리학적 질서가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더불어 수적 계산의 ‘정밀성’은 학문이 갖추어야 할 이상이 된다. 수가 본질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대는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정밀함의 시대가 된다. 강물은 수량으로 측정되는 수자원으로, 임야는 생산할 수 있는 목재의 총량으로 계산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수학적 파악을 바탕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근대 기술이 탄생한다. 근대 기술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바로 인간에게 유용하기 위한 기술이다.

결국 인간 이성이 자연 속 모든 대상들의 원리(수학과 물리학)를 제공하는 대상 세계의 ‘근거’, 휘포케이메논(주체)이 된 것이다. 또한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근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귀결된다. 세계의 근거와 귀결의 자리 모두에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인간 주체의 등장을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로 불러도 좋겠다. 인간중심주의는 근대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예를 들어 근대 종교가 있다. 앞서 근대에 자연은 수리물리학적으로 파악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자연으로부터 신들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이제 숲에 사는 정령도 없고, 산을 지키는 신령도 없다.

인간중심주의는 예술의 영역으로도 파고들었다. 바로 ‘미학’이 근대에 등장한 사실이 이를 알려준다. 미학은 고대부터 있어왔던 예술철학 일반과 혼동하면 안 되는 특수한 의미의 근대 학문이다. 미학을 뜻하는 ‘Asthetik(esthetique)’의 원래 의미는 ‘아이스테시스‘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스말 ‘아이스테시스’란 감각적 지각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스테틱’이란 감각적 지각을 가능케 하는 인간 마음의 능력인 감성에 관한 학문, 즉 ‘감성론’이다. 그런데 어쩌다 감성론이 미학이 되었을까? 바로 근대는 아름다움의 척도를 인간의 감각하는 능력, 즉 감성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일어난 근대의 혁명이 예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된 이 혁명은 인간 주체의 생각함(코기토)을 모든 지식과 존재의 토대로 만들었다. 미美의 영역에서는 미학의 출현과 함께 인간의 감성이 아름다움의 척도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주체 되기’라는 이 프로그램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근대인이며, ‘근대’는 곧 ‘현대’를 뜻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면, 즉 주체로서의 인간이 죽었다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간의 계획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현대인일 것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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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인공양심

AI 시대가 도래하며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전문적인 ‘법조인’이나 ‘의사’의 일은 판단력이 핵심인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도전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은 학습될 수 없는 것임을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이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판단은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이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요구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참 많은 시험을 보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늘 문제가 있어왔다. 문제를 푸는 일은 어려웠지만, 문제 자체는 자동적으로 늘 앞에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온 것이 인류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한 집단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이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중요한 것인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구별되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무엇인가?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가령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난점들을 요약하는 ‘하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매우 난감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은 바로 문제를 발명해내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모험인 듯 도전하지만, 자신이 매달리는 그 문제란 누군가가 더 험난한 길 속에서 이미 창안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혹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힘은 비범한 다른 이의 몫이고, 애초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소질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문제에 답안 하나를 공들여 제출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안해내는 소질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매스미디어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 영화, 광고 등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뜻한다. 물론 전달되는 정보는 진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매스미디어는 철학의 친구이다. 철학philosophy이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둘 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이 궤변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스미디어 역시 거짓과 경박함에 시달린다.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에서 또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듯이 철학자를 제공한다. 이때 철학자는 세계의 위협적인 비판자가 아니라, 안전하게 유지되는 세계의 일부이다. 그저 세계가 관리하는 ‘문화’의 한 진기한 모습이다. 그가 아무리 신랄하게 비판하더라도 문화는 그 비판조차 너그럽게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다. 문화와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이다. 처음엔 흥미를 끌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많은 것들처럼, 철학자는 그의 사상이 미처 이해되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버려지고 또 잊힌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그 기본적인 사명에 비추어 보자면, 역설적이게도 미디어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는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가려내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철학의 경쟁자이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흔히 말하듯 정보의 홍수를 이룬다. 모든 자료와 그에 대한 모든 반박 자료, 그리고 수많은 관점이 공존한다.

매스미디어가 사라진 세계를 꿈꿀 수 있는가? 그런 꿈은 공허하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매스미디어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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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나라

문화와 역사와 말이라는 것은 지층이나 암석의 결처럼 단단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못생긴 지층의 표면만 슬쩍 가리듯 타협안으로 여기저기 임시 공사를 한다.

정말 문화와 역사와 말(써놓고 보니 세 가지의 정체는 사실 ‘일상생활’ 그 하나이다) 안에 내재하는 성적 불평등을 아이와 함께 뚫고서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을 만한 동화책을 골라보려니, 정말 못 읽을 것투성이였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고전 명작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 지위가 높아봐야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공주, 왕자로 인해서만 수동적으로 행복해지는 여자, 왕자 구해주는 조연으로 만족하기, 마녀로 몰아 왕따 시키기, 효녀의 아버지 뒷바라지,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끝 모를 노동, 식민지 개척자 백인 청년과 토착민 유색인 소녀의 사랑 등등. 동화는 남자의 판타지가 신나게 점령한 식민지인가? 한마디로 모두 아이에게 읽힐 게 못 되었다. 문화가 길이 아니라 꼭 장애물 같았다. 우리가 고전으로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지금은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고전이 되기 위한 좁은 관문을 지키는 평가의 시선 역시 다 남자들의 눈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러리라.

이런저런 곡절 끝에 든 생각은,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현재적인 입법의 문제(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습을 지우는 문제에 그치지도 않는다.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신화’, ‘종교’, ‘고전’, ‘명작’ 등의 긍정적 이름으로 암석의 결처럼 오래 굳어진 문화 그 자체와 싸우는 일이다. 유전되는 나쁜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핏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역사, 말 안에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나?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바보와 천재

‘천재’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먹방’ 천재도 있고, 탄막 게임을 ‘원코인 클리어’하는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듯한 기준도 있을 것이다.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와 같은 것. 그런데 인간이 발휘하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큼 다채로운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라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천재의 창조성, 규칙을 발명해내는 능력을 미학의 영역에서 해명한 이가 바로 18세기의 칸트Immanuel Kant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네 가지 근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규칙을 창조하는 저 능력이 첫 번째 온다.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2 예술은 인간의 생산품이지만, 여느 기성품과 달리 획일적인 규칙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규칙(질서)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천재로서의 예술가에 의해 작품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더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생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범형範型’이 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세 번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작품을 창작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기보다는, 꼭 자연의 일부처럼 창조한다. 마치 과실나무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네 번째 면모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규칙(가령 자연과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작품에 대해선 ‘천재를 사용해’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 개념은 의미 있는 생산물을 모두 주체가 가진 능력의 소산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오기도 했다.

이제 바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보라는 말은 남에게 주저 없이 쓰면 안 되는 말임을 우리는 안다. ‘바보’는 그저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늑대인간

고대 이래 늑대만큼 인간 정신에 깊이 파고들어온 동물도 없다. 늑대인간을 뜻하기도 하고, 자신을 늑대로 여기는 정신장애를 뜻하기도 하는 ‘lycanthropy’(라이칸트로피)는 문자 그대로 늑대를 일컫는 그리스어 ‘lykos’와 인간을 의미하는 ‘anthropos’가 결합한 말이다. 이런 질환이 가능한 배경에는 인간 정신의 회로처럼 자리 잡은 늑대 변신 신화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늑대 변신 신화는 여러 국가와 민족에 퍼져 있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늑대는 신이 되어서도 출현하는데, 늑대가 많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는 늑대 제우스를 숭배하기도 했다.

인간의 정신 깊숙이 늑대 변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면, 현대 정신분석과 철학이 늑대인간을 통해 사상을 전개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우리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도 늑대인간을 발견한다. 늑대는 사회 안에 적합한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자가 출현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추방’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 아니다. 추방된 자는 법과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버려지는 방식으로 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런 법의 작동방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늑대인간에 집중하자. 늑대인간은 합리적인 법적 질서의 바깥 지점에 법의 진실이 있음을 표시한다. 법이란 자신의 명시적인 통치 바깥에서, 즉 법으로부터 추방된 법적 예외의 자리에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늑대인간은 몸소 드러낸다. 프로이트에게 늑대인간은 이성적 세계 이면의 진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늑대 변신 이야기를 둘러싼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보편적 관심이란, 인간이 자신의 합리성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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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없는 사회를 향하여

14세기에 페스트가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 무렵 광기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되었다. 떠돌던 사악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곧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소문을 물고 악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다. 소문은 곧바로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반복된다.

이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희생양이 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첫 번째 특성이다. 희생양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있다. 학교, 회사, 정치 어디든. 조직은 목숨을 빼앗는 고대의 물리적 폭력 이상의 폭력으로 한 사람의 희생양을 겨냥한다. 여러 성추행 사건들에서 쉽게 예를 발견할 수 있듯 피해자에서 희생양으로의 이행은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희생양이 체험하는 당혹감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은 문제 발생을 귀찮아한다는 것, 자신의 문제 제기와 처지가 다수결이나 회의 등 합리적이라고 위장된 절차를 통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공평한 시선을 지닌 양하지만, 실은 이 시선 자체가 피해자를 뼈아픈 희생양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희생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다. 희생양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가해자들은 신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이 통일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비로소 이들을 통일적으로 만들어준다. 그 이득이란 기득권에 대한 보호, 희생양의 것이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등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희생양 만들기는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도 ‘설계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희생양의 세 번째 특성이다. 물론 사건의 인과적 흐름 전체를 예견하는 전능한 계산자 같은 것은 없겠지만, 희생양을 계획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설계자가 ‘설령’ 있다고 한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할까? 악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박해해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 조직 또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저지른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박해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네 번째 특성이자, 가장 악마적인 특성이다.

이제 희생양 문제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명은 희생양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번제에 바쳐진 희생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신뢰 속에 엮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희생양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분석이 아니라 ‘계몽’이다. 희생양은 더 이상 문명의 일부여서는 안 되고, 계몽의 칼날이 사회로부터 추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구세주에 관한 고대 신화를 지탱할 만큼 오래된 개념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희생양은 정당화될 수 없고 희생양을 가졌던 문명은 교정되어야만 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희생양 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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