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에 페스트가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 무렵 광기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되었다. 떠돌던 사악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곧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소문을 물고 악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다. 소문은 곧바로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반복된다.
이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희생양이 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첫 번째 특성이다. 희생양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있다. 학교, 회사, 정치 어디든. 조직은 목숨을 빼앗는 고대의 물리적 폭력 이상의 폭력으로 한 사람의 희생양을 겨냥한다. 여러 성추행 사건들에서 쉽게 예를 발견할 수 있듯 피해자에서 희생양으로의 이행은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희생양이 체험하는 당혹감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은 문제 발생을 귀찮아한다는 것, 자신의 문제 제기와 처지가 다수결이나 회의 등 합리적이라고 위장된 절차를 통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공평한 시선을 지닌 양하지만, 실은 이 시선 자체가 피해자를 뼈아픈 희생양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희생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다. 희생양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가해자들은 신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이 통일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비로소 이들을 통일적으로 만들어준다. 그 이득이란 기득권에 대한 보호, 희생양의 것이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등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희생양 만들기는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도 ‘설계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희생양의 세 번째 특성이다. 물론 사건의 인과적 흐름 전체를 예견하는 전능한 계산자 같은 것은 없겠지만, 희생양을 계획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설계자가 ‘설령’ 있다고 한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할까? 악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박해해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 조직 또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저지른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박해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네 번째 특성이자, 가장 악마적인 특성이다.
이제 희생양 문제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명은 희생양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번제에 바쳐진 희생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신뢰 속에 엮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희생양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분석이 아니라 ‘계몽’이다. 희생양은 더 이상 문명의 일부여서는 안 되고, 계몽의 칼날이 사회로부터 추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구세주에 관한 고대 신화를 지탱할 만큼 오래된 개념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희생양은 정당화될 수 없고 희생양을 가졌던 문명은 교정되어야만 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희생양 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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