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4차 산업혁명, AI 혁명의 시대이다. 물론 이런 혁명은 기술의 발전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비약적인 기술 발전의 기원은 무엇일까? 중세를 마감한 르네상스 시대 이후 화려하게 펼쳐진 과학의 힘이다. 그 힘의 원천은 당연히 ‘이성’이다.
과학이 보편적 진리인 까닭은 그 과학을 주관하는 이성이 보편적인 까닭이다.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지배력을 이성의 보편성에서 확인했다.

하나의 보편적 이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이라 여겨졌던 이성은 이런저런 역사와 맥락에 따라 출현하는 ‘한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의사소통적 이성 역시 보편적인 것이 아니리라. 우리의 소통 자체가 인간 이성의 품을 떠난 시대에 들어서버렸다는 사실이 이를 잘 알려준다.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인간 이성이 아니라 기계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근대는 인간 이성이 수학과 수학에 뿌리를 둔 기계기술을 통해 대상을 지배한 시대였다. 지배하는 능동적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이분법이 근대의 바탕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런 지배하는 인간 이성과 지배당하는 자연의 구도는 허구적일 것이다.

우리는 벌써 근대를 지나쳤는데 여전히 근대적 인간 주체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챗GPT는 이미 지식을 산출하고 유통하는 주체인데, 한낱 학생들이 부정 과제물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래전 전자오락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을 때 폭력이 난무한다며 도덕적 설교자의 어조로 이 기계의 폐해를 우려하던 목소리가 기시감 속에서 들린다.
새로운 기계만 나오면 인간 주체는 주체와 대상을 가르는 이분법, 그리고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는 ‘터미네이터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챗GPT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라 윤리 규정을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일 수 있을까? 오히려 정의의 이름으로 챗GPT의 언론자유를 편드는 사람도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인간 주체와 지배 대상의 구분, 원본과 복사물의 구분 등과는 멀어진 새로운 지식 환경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재래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어른, 아이, 아버지, 어머니, 자식 역할도 이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AI와 인간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인간계는 풍비박산이 났다. AI는 문학 작품이든 미술품이든 만들어낸다. 이는 인간을 감동시킬 수 있고, 홀릴 수 있으며, ‘유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핵심은 작품의 수준이 높냐 아니냐, 독창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가 인간이란 예술적 갈구 이상으로 종교적 갈구가 심한 생물임을 알게 된다면? AI는 신을 발명해서 인간을 감동시킬(유혹할) 것이다. AI 앞에서 단지 예술가가 살아남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재래의 종교가 살아남을까 걱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 직업이 위협받게 되며, 이제 우리는 이런 정겹고도 짜증 나는 질문자가 없는 외로운 거리를 걸어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내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면, 챗GPT가 신부님, 목사님, 스님보다 더 영혼의 위로가 될 말을 해줄 것 같다. 그러면 이미 그는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동반자이다. 내가 아는 한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그리고 챗GPT만큼 말 잘하는 자도 없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다.

산책

걷기를 좋아한다. 걷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으로 느린 이동 방식 같지만, 실은 시간을 버는 일이다. 걷는 중에 생각할 수 있고, 나중에 사람들과 해야 할 말을 가다듬을 수도 있으며, 행운과도 같은 햇살을 만날 수도,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잘 아는 길도 최초의 길인 듯 관광객처럼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다. 차를 타면 이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진다. 일찍 도착해서 빨리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 빨리 복잡한 대화를 나눠야 할 뿐이다. 촉박한 일정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걷기의 정수는 ‘산책’이 간직하고 있다.
산책을 다른 걷기와 헷갈려서는 안 된다. 산책은 이동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자라난 화초처럼, 산책하는 동안 생겨나는 것은 뭘까? 바로 ‘생각’이다.

산책은 유쾌한 명상, 두서없는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머리에 떠오른 상태 그대로의 생각이 산책길에는 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산책은 책상 앞에 앉아 계획을 세우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맞다. 산책은 자유로운 생각의 폭죽을 만들어낸다.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까? 그럴 것이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반복이 새로움의 조건이라는 것은 산책의 귀중한 동반자인 우리 집 강아지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매번의 산책이 세상에서의 첫날인 것처럼 구름이는 너무 신나서 걸어간다.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산책은 지구 위를 걸어 다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자체이다. 산책 중 얻게 되는 착상 역시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어떤 억압적인 규칙에도 짓눌리지 않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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