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형

미라는 유명한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서른한 살의 변호사였다. 주로 회색과 검은색 옷을 입었다. 니트 원피스와 스타킹, 때로는 짙은 청바지와 멋진 부츠 차림이었다. 세심하게 고른 것이지만 지극히 깔끔해서, 마치 군중 속으로 쉽게 사라지기 위해 선택한 옷차림 같았다. 미라는 언행이 진중하고 조용했는데, 옆에 앉아 있으면 어딘가 짓눌린 듯한, 너무 ‘통제된’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때로는 미라의 완벽하게 통제된 몸 옆에 있으면 덩달아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미라는 자기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듯 자신과 불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려고 상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미라가 상담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더 이상 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안정형은 종종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사실은 우리의 언어에 그 감정을 전달할 만한 어휘나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미라 같은 안정형은 보통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어도 진정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그렇다. 안정형의 삶은 꽤나 기능적이다. 부러움을 살 때도 많다. 인생의 숙제를 전부 해치웠으며,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미라는 자기 일에 장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직장 동료들을 좋아했고, 연봉도 높았다. 남편과의 관계도 다정하고 든든했다. 하지만 많은 안정형이 그러듯 미라 역시 무언가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라는 자신이 잘 지내는데도, 심지어 행복한데도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듯한 기분이었다.
때로 이런 미묘한 감정은 은유를 통해 더 쉽게 포착할 수 있다. 나는 미라에게 은유를 이용해 내면을 묘사해보라고 제안했고, 미라는 때때로 자신과 세상 사이에 창문이 있는 것 같다고, 아니면 세상이 수족관이고 자신이 관람객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미라에게 그 기분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미라는 부끄러운 듯 싫다고 하더니, 곧 높은 벽을 사이로 한쪽에는 한 사람이, 반대쪽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을 쓱쓱 그려냈다. 벽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은 한쪽에서 얼어버렸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이 그곳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속한 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 같고, 전부 보이기는 해도느낄 수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안정형은 자기 내면보다 외부 세계에 더 익숙하다.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며, ‘비합리적인’ 것, 신화나 상상 같은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시간을 선형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그리스인이 ‘크로노스’라고 부른 것으로 인식한다. 안정형은 힘든 상황이 되면 자신과 세상 사이에 벽이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안정형과 심리 상담을 진행할 때는, 가끔씩 그들을 살짝 찔러 안정적 성향 반대편으로 보내야 한다. 공상, 비합리성, 연약함 쪽으로 안내하고, 때로는 무책임하고 괴상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자극할 필요도 있다. 그들이 삶을 사는 방식과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일상의 동기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한다.

안정형은 비인지적이고 합리성이 떨어지는 작업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이야말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꿈, 수수께끼, 미지를 향한 호기심 같은 것들. 안정형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 이를테면 자연이나 밤하늘, 우주 같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안정형을 도우려면 그들이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줘야 할 때도 있다. 논리적이고 선형적이고 실용적인 영역을 깨고 나와, 바라건대 어린 시절에는 느껴봤을 감각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때로는 예술 작법이나 다른 창의적인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면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신비주의나 점술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다. 미라의 열정은 여행에서 싹튼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사실에 집중한 채로 작업을 시작했다. 미라가 바다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항상 통제하려고 애쓰는 대신 혼자 여행을 즐기고 파도에 젖어드는 감각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처음에 내가 인사를 건넸을 때 코너는 나와 선뜻 눈을 맞추지 못했다. 악수하려고 다가서자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심리 치료에 관해 문의하는 메시지를 남겼을 때는 목소리가 어색하고 서두르는 것이,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억지로 말을 짜내는 느낌이었다.

코너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비볐다. 코너의 스웨터와 방수 재킷은 너무 큰 것을 샀는지 어깨와 손목 부분이 잔뜩 뭉치고 구겨져 있었다.

심리 치료를 향한 코너의 부정적인 마음이 상담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코너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코너는 잠시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분명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코너의 창백한 피부가 눈에 띄게 시들어 병약해 보였다. 푸른 눈은 마치 구름이 낀 듯 흐릿했다.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 목과 어깨가 굳어졌고, 호흡이 짧아졌다. 마치 짙은 안개에 휩싸인 여행자처럼, 코너는 수치심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몇 가지 던졌다. 코너는 최근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고 했다. 그 변화 때문에 코너의 가족은, 그리고 코너도 겁에 질려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코너는 긴장이 풀린 것 같았는데, 어쩌면 내가 코너의 이야기를 지겨워하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그의 자기비판에 동참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듯했다.

코너는 사회의 기대에 맞추어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내는 중이었고, 삶의 모든 요소가 체계와 안정을 향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물한 살의 나이에 삶이 통째로 무너져버렸다. 결국에는 대학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고, 장학금과 농구팀의 주전 선수 자격을 빼앗겼다. 그가 연달아 이어진 실패에 관해 말해주는 동안, 나는 그것이 얼마나 아픈 경험이었을지 겨우 상상이나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코너가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해 전의 코너였다면 자신이 수업을 몇 과목이나 낙제하고, 농구팀에서 쫓겨나고, 집에 틀어박혀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너는 최고의 농구선수,A+만 받는 학생이 되고 싶었다. 동기들과 함께 졸업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혼자서 계속 게임만 하고 있고, 식사도 챙기지 않으며, 자꾸만 분노가 치밀고, 부끄러워 지인 앞에 나설 수도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지금이 코너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정말 솔직하게 대화해야 할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외부인에게는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심리 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코너의 속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였다. 이 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다면, 코너가 어떤 감정 때문에 혼자 끙끙대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면, 첫 번째 상담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상담 전보다 더욱 큰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코너는 그 모든 것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구구절절 말했지만, 성취감이나 인정 욕구 외에 기쁨 비스름한 것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순수하게 원하는 마음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는 이런 식의 욕망을 장려한다. 만족보다는 성취감을, 친밀감이나 연결감보다는 물질 획득을 부추기는 것이다. 개인이 진정한 안녕을 누리기보다는 사회적 기대에 기반한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과제를 하나씩 완료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 또래들이 으레 그러듯 코너가 어린 시절부터 순응한 사회의 대본이었다. 하지만 코너의 삶은 그 대본만으로 지속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알아챘다. 코너와의 작업은 겁에 질린 채 숨어있는 길거리의 강아지를 유인해내는 것과 비슷할 터였다. 나는 코너의 신뢰를 얻어 그를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꺼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코너의 본능을 사로잡을 무언가를 제공해야 했다. 굶주린 동물에게 지금 막 요리한 맛있는 음식 냄새를 풍겨주는 것과 비슷하다. 줄곧 코너의 이성만을 상대로 대화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이성이 독재자, 사디스트로 변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코너의 이성은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에 순응하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안정형의 삶에서, 그 가치가 변하고 부패할 때 생기는 증상이다. 코너의 행동 체계는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에 부합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코너의 개인적인 욕구는 삶 속에서 비이성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당했다.

코너는 심각한 위기를 맞은 안정형이었다. 한 해 전에는 심리 치료 같은 것은 고려할 필요조차 없었고,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문제가 있다고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코너가 의지하고 있던 체계가 전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코너가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그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무너져내린 충격은 삶이 통째로 사라진 듯 격렬했을 것이다. 코너에게는 단 한 가지 계획밖에 없었고, 그때까지는 훌륭하게 계획을 실천했다. 올라갔고, 성취했다. 코너는 지금껏 배운 대로 수행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 농구팀의 주장으로서 학교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끌어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두 해 동안 줄곧 비슷한 길을 가다가 무언가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것저것 다른 질문을 던진 후에도 변화의 자세한 내막을 밝혀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익숙한 패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는 쿼터라이퍼를 등 떠밀어 수직적인 성취의 사다리를 오르게 하지만, 그 사다리는 결국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것은 불완전한 계획이다. 맨 위에 도달한 사람은 위험할 정도로 자아가 부풀고, 진정한 삶이 있는 지상과 단절된 채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코너에게 행운이라고 말했던 것은, 그의 상승을 지탱하던 부유물이 터졌을 때 그는 겨우 대학생이었으니 삶의 방향을 급격하게 바꿀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이 무너졌지만, 아직 코너를 잡아줄 친숙한 안전망이 있었다. 긴 경력을 쌓았거나 대출금을 갚아야 할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부양가족도 없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아야 하는 상황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머물 곳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코너는 안전했고, 삶은 막 시작된 참이었다. 분명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 올릴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전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안정형이 의미를 향해 나아가려면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할 때가 많다. 이렇게 통제와 계획을 놓아버리는 것은 일종의 희생이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죽음이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할 것만 같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다. 놓아주는 행위는 오래된 삶의 방식이 끝났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여정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여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했다. 삶의 여정도, 받아들인다는 개념도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이론적이다. 하지만 허공에서 낙하하는 것 같다거나 지친 손으로 절벽에 매달리는 것 같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내면의 경험은 은유나 직유를 통해 묘사할 수 있다. 때로는 꿈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도, 받아들이는 행위에 수반하는 두려움도, 전부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코너는 사다리 오르기를 그만두고 통제를 놓아야 했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진정한 삶이 있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집중해온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의 다른 면에 관해 배우고 그의 의지력이나 계획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를 신뢰하겠다는 뜻이었다. 코너는 열심히 삶에 매진하면서도 추락이 임박했다는 것을, 자신이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균형을 잡기 위한 훈련과 기초가 없던 상태였기에, 의지력을 총동원해서 과거의 계획과 목표를 포기하라는 직감을 거부했다. 생과 영혼이 자신에게 권장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의 작업은 주로 이런 사실을 이해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었다. 코너의 생각, 기분, 예감, 꿈, 경험에는 자기 자신과 미래의 안녕을 위한 정보가 풍부했고, 실은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미리 예견한 것 같았다. 어쩌다가 코너는 한때 즐기고 사랑하던 것들을 잊어버렸을까? 대학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놓아줘야 할까?

안정형은 의미형이 "유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심 의미형의 풍부한 감정과 창의적인 표현력을 부러워하곤 한다. 반면 의미형은 안정형이 "꽉 막혔다"거나 "특권을 누리며 산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내심 안정형의 일관성과 손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며 부러워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수많은 변주가 존재한다.

보통 상대 유형을 판단하고 질투하는 이유는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과 갈망을 투사?3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적인 반응은 온전한 삶을 향한 이끌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안정형의 의미 추구는 궁극적으로 삶의 안정성을뒷받침하는데, 의미가 풍부하면 삶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고 허무라는 유령이 안정감을 압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형의 안정 추구 역시 오히려 삶의 의미를뒷받침하는데,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에게 외부 세계에서 살아가고 성장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형은 자기 내면을 더 깊이 탐험하면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평온한 일상에 위협이 될지라도, 자신에게 생동감과 목적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반면 의미형은 일상의 과제와 장기적 목표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아주 고생스럽겠지만, 이런 과제와 목표는 창의력의 흐름을 돕고 삶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두 유형 모두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삶 속의 관계와 소통을 개선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다층적이고 단단한 개인이, 자신에 관해 더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편안하게 외부 세상에 참여하는 개인이 탄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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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인물/김대중

정치가이자 15대 대통령, 김대중(1924년~2009년)의 별명은 ‘인동초‘다. 인동초는 겨울을 이겨내는 꽃으로 유명한데, 오랜 기간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큰 고난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낙선,5.16 군사쿠데타로 인한 의원직 상실 등 어려움을 겪으며 국회에 입성한 김대중은 1960년대 가장 탁월한 역량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합리적인 정책 제시 등 그 유능함을 널리 인정받았다. 1971년40대 기수론에 동참하여 결국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을 이긴 후 대통령 후보가 돼 박정희와 자웅을 겨루었다. 당시 박정희는 집권 연장을 위해 3선 개헌을 단행했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집권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김대중은 대중경제론, 4대국안보론 등을 주장하며 박정희의 경제 성장과 반공주의에 대해 분배 경제와 주변국 참여에 기반한 남북 교류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불행은 이때부터 연이어진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며 미국, 일본 등지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다 중앙정보부에 납치당해 현해탄에서 수장당할 뻔 했다. 하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간신히 살아남았고, 유신 체제 동안 가택 연금을 당했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해 ‘내란 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 미국으로 강제 망명 생활에 나선다. 1985년 귀국하여 6월 항쟁의 불쏘시개가 됐으나 1988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출마하여 또 낙선한다. 1992년에는 3당 합당에 성공한 김영삼과 대결하여 또 다시 낙선했으나 1997년 김종필이 이끌던 자유민주연합과 야권단일화에 성공하는 등 보수 세력을 끌어들여 대통령이 된다.

김대중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97년 대통령 당선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고, 햇볕정책을 주창하며 남북 교류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최초로 평양에 방문하여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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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사건/6.10 민주항쟁

1987년 독재 타도를 외치며 벌어진 전 국민적인 민주화 투쟁. 이를 통해 비로소대한민국은 독재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1980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대다수 국민의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권력이었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가 붕괴하면서 민주화가 진행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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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명문장/상인에 관하여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상인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사람의 풍류와 명예는 그대로 인정된다. 유생들은 직접 책방에 가서 책을 산다. 재상들도 가끔은 융복사 근처 시장에 직접 가서 골동품을 사기도 한다. 나는 지체 높은 사람이 융복사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출입하면 모두들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니다. 청나라의 이런 풍속은 어제 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벌써 명, 송 시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치레만 알고 고개를 저으며 꺼려하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는 놀고먹을 뿐 하는 일이라곤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대부가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가 없다. 사대부는 짧은 바지에 대나무로 만든 갓을 쓰고 시장에서 물건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 또 자와 먹통, 칼과 끌 등을 가지고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그를 부끄러워하고 우습게 여기며, 그의 혼인길마저 끊어놓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집에 돈 한 푼이 없어도 높다란 갓에 넓은 소매가 달린 옷으로 치장하고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치는 것이다.
-박제가,<북학의>중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년~1805년)가 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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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들의 세상

한번씩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승욱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우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집 방향이 비슷해 종종 하교를 도와주곤 했다. 딱히 도울 것도 없었다. 그저 그 애의 속도에 맞춰 발을 늦추는 일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지치고 피곤한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를 때면 지금도 한번씩 잠을 설친다. 승욱의 어머니는 승욱에게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승욱의 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다.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 본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로 돌아가도 나는 승욱을 외면할지 모른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몰라서 연대에 ‘실패’했다. 솔직히 말하자. 어쩌면 알면서도 실패할 것이다. ‘당당한 병신’ 곁에 수많은 ‘9’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여전히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때마다 《노란들판의 꿈》을 펼쳐 들고 박경석 교장의 외침을 읽을 것이다. 누군가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해야 한다. 이 ‘당연한’ 문장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이 죽어, 몸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

신문도 재밌지만 주간지는 더 재밌었다. 어떤 월요일에는 밥 대신 가판에서 주간지를 산 적도 있었다. 가난한 대학생에게 주간지는 꽤 자주 ‘사치품’이었다. 덜컥 정기 구독을 신청해 두곤 구독료가 하염없이 밀리던 어느 날, <시사IN> 지면에서 인턴 기자 모집 광고를 봤다. 자기소개서 첫 줄을 이렇게 썼다. "인턴 활동비 받으면 밀린 구독료 내겠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다. 당시 미납금을 독촉할 여력이 없었던 이 신생 언론사는 ‘돈 내겠다’는 자기소개서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 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뉴스를 만드는 데는 돈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하다. 언론이 중요하다고,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유료로 구독하는 사람은 한 줌이다. ‘좋은 기사’를 쓰면 반응하는 독자(시장)가 있다는 믿음은 기자에게도 없다. 언론도 문제지만 독자도 이 망가진 시스템의 일부라는 의미다. 같은 기사지만 종이로, 웹으로, 영상으로 보는 일은 모두 다른 경험이다. 디지털 시장은 아직까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이것저것 해 보거나 못 하거나를 반복한다. 해 보고 싶은 건 많지만 돈이 없을 때가 많다. 이곳저곳에서 취재 비용을 펀딩 받을 수도 있지만, 인건비는커녕 제작비도 못 맞출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를 갈고 주변을 갈아 가면서 한다. 좋은 뉴스와 좋은 매체가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생각하니까.

서글픔과 피곤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저널리즘이라니 우리끼리만 아는 ‘나쁜 농담’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속절없이 그런 것에 마음을 홀리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힘을 믿고 싶다.

무언가를 보이게 하는 것(주목받게 하는 것), 혹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일이다. 이런 판이라면 아무리 유튜브가 레드오션이라고 해도 내가 끼어들 여지가 아주 없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넘어서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이야기를,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정치 대신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자랐다.

어떤 정당을, 정치인을, 그리하여 정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기란 때로 매우 쉽고 간편하다. 그사이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일상은 무람없이 공격당한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동시에 참 지루한 일이다. 그 ‘좁은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독립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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