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책장이 좀처럼 잘 넘겨지지 않아 작정을 하고 나서야 읽고 말았다.
가족에게 닥친 비극과 무기력.
그렇지만 가족이라 미워할 수 없는…
혼란과 권태 속에서 살아가는 게 평온한 삶이라? 아이러니한 무거움이 남는다…
날씨가 서늘하고, 밤이 어둡다. 거리에 여기저기 젊은이들의 무리가 요란스레 웃으며 지나간다. 바닷소리가 들린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소리, 내가 아는 소리 같다. 어디서 들었는지,어떤 것과 비슷한 소리인지 생각하다가,문득?T……에 제대로 도착했음을 깨닫는다. 내 앞에,내 아래,내 뒤에 걷는 발들은 바로 내 발이고,내 양옆에,줄지어 선 가로등 아래를 지나가는 동안에 어둠에서 나왔다가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는 손들은 바로 내 손이다. 나는 미소 짓는다. 어떻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는 휴가 중이고,바다를 보러 왔다. 나는 지금 거리를,정말로 거리를 걷고 있다. 나는 눈앞에서 길게 늘어났다가 흔들리며 내 곁으로 돌아오는 내 그림자에 갇힌 것 같다. 나는 나를 바다에 오게 한 나 자신에 대해 애정과 감사를 느낀다.
방이 아주 작고,테이블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 칸막이벽은 힘센 사람이 몸을 던지면 부서질 수 있을 만큼 약해 보인다. 노란색 벽지 위에 검은 평행선들이 굵은 빗줄기처럼 수직으로 그어져 있다. 잘 정돈된 침대 위에 흰 이불이 덮여 있다. 테이블 앞에 의자가 하나 있다. 그녀는 앉는다. 무엇을 할까??니콜라가 죽은 지 십칠 일째다. 정말이다. 벌써 시간이 그만큼이나 지났고,계속 지날 것이다.
밤에 깨어 있을 때 나는 니콜라가 죽었다는,?이제 지에의 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는 생각을 하고,?이 침대에 누운 나는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 정해지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매일 똑같고,?쉽게 벗어날 수 있다. 계속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믿지만,?사실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생각으로 느껴진다. 늘 비슷하다. 나는 니콜라를 생각하기 시작하고,?결국 바람 속에,?바람이 때리는 바위 구멍들 안에 잠들어 있는 새들 생각으로 끝난다.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나면 자기 자신의 무지가 좋아지고,그 무지와 함께 단숨에 불이 붙는다. 서서히 곧게 타오르는 그 불길을 흩뜨리지 말아야 한다. 무슨 말을 해서 어떤 것에 대해서든 설령 작은 것이라도 의견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새롭게 무지 속에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도 나는 지금 잘 안다. 시간이 어떻게 예고되고 다가오고 도달해서 한순간 그 소용돌이로 우리를 감싸 버리는지,우리가 다가오는 다른 시간을 위해 그 시간을 놓아주자마자 어떻게 흘러가는지 안다.
한순간 세상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바다는 잉크빛이었다. 추웠다.
나는 바깥과 마찬가지로 내 안도 완전한 여름이면 좋겠고,늘 기다리기를 그만 잊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혼의 여름은 없다. 영혼의 겨울에 머문 채로 흘러가는 여름을 볼 뿐이다. 이 초조함의 계절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욕망들이 만든 태양 아래서 늙어 가야 한다. 기다려도 소용없다. 자신이 바라는 것 이상을 기다리는 한 그렇다.
나 자신을 열어 내 안에 들어 있는 쓰라림을,?바람과 바다를 씻어 낼 수 있다면. 하지만 내 살갗은 가죽 부대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고,?단단한 내 머릿속은 골과 피로 가득 차서 터질 지경이다.
무엇이든 다 알게 된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건,?내가 어느 정도로 자기들을 개의치 않는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따뜻한 곳에서 평온히 지내면서 더는 움직이지 않고 싶다.
원한다고 누구나 순수해지는 게 아니며,?원하다고 누구나 심각한 것에 대해서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든 구분 없이 웃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의 손. 내 두 팔 끝에 달린 두 개의 무거운 짐. 나는 무겁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서 발을 구르고 뒤섞인다. 그 어떤 상념도 다른 상념을 쫓아내지 않는다. 무질서다. 질서도 있다. 상념들은 차례대로 온다.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혼자이고 싶다. 나는 그 누구보다 버려졌다. 그 누구보다 무겁다. 내 상념들 때문이다. 상념들이 아무리 무질서해도 나는 헤쳐 나간다. 나는 이미 그 무질서에 익숙하다. 매번 나는 나의 상념들을,?생쥐의 얼굴을 한 그 하나하나를 알아볼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상념이 더해지지는 않을 테고,?평온한 삶이 오고 있다. 나는 내 머릿속을 한 바퀴 다 돌아 보았다. 내 머리는 그 누구보다 무겁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나는 그 누구보다 불쌍하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그 누구보다 불쌍하다. 제일 많이 불쌍하든 제일 적게 불쌍하든 상관없다. 평온한 삶이 올 테니까
혼란,권태,혼란. 그것은 포도 수확을 하던 어느 날 저녁에 니콜라가 클레망스를 임신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서서히 혼란에 혼란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우리는 그냥 떠밀려 갔다.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생각만으로도 미리 겁이 났고 권태가 밀려왔다. 니콜라도 부모님도 모두 그랬다. 불현듯 나는 나의 분노를 알아차렸고,나 역시 혼란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혼란이 갑자기 내 몸속에서 솟구쳤다. 그 혼란을 둘러싸고 있는 권태는 캄캄했고,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이었다.
이제 제롬은 끔찍하지 않았다. 그는 죽었다. 다시 말해 죽음의 위협에서 영원히 벗어난 사물이었다. 제롬은 우리를 떠났고,혼자서 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