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인공양심

AI 시대가 도래하며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전문적인 ‘법조인’이나 ‘의사’의 일은 판단력이 핵심인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도전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은 학습될 수 없는 것임을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이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판단은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이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요구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참 많은 시험을 보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늘 문제가 있어왔다. 문제를 푸는 일은 어려웠지만, 문제 자체는 자동적으로 늘 앞에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온 것이 인류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한 집단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이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중요한 것인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구별되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무엇인가?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가령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난점들을 요약하는 ‘하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매우 난감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은 바로 문제를 발명해내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모험인 듯 도전하지만, 자신이 매달리는 그 문제란 누군가가 더 험난한 길 속에서 이미 창안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혹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힘은 비범한 다른 이의 몫이고, 애초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소질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문제에 답안 하나를 공들여 제출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안해내는 소질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매스미디어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 영화, 광고 등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뜻한다. 물론 전달되는 정보는 진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매스미디어는 철학의 친구이다. 철학philosophy이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둘 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이 궤변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스미디어 역시 거짓과 경박함에 시달린다.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에서 또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듯이 철학자를 제공한다. 이때 철학자는 세계의 위협적인 비판자가 아니라, 안전하게 유지되는 세계의 일부이다. 그저 세계가 관리하는 ‘문화’의 한 진기한 모습이다. 그가 아무리 신랄하게 비판하더라도 문화는 그 비판조차 너그럽게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다. 문화와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이다. 처음엔 흥미를 끌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많은 것들처럼, 철학자는 그의 사상이 미처 이해되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버려지고 또 잊힌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그 기본적인 사명에 비추어 보자면, 역설적이게도 미디어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는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가려내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철학의 경쟁자이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흔히 말하듯 정보의 홍수를 이룬다. 모든 자료와 그에 대한 모든 반박 자료, 그리고 수많은 관점이 공존한다.

매스미디어가 사라진 세계를 꿈꿀 수 있는가? 그런 꿈은 공허하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매스미디어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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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나라

문화와 역사와 말이라는 것은 지층이나 암석의 결처럼 단단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못생긴 지층의 표면만 슬쩍 가리듯 타협안으로 여기저기 임시 공사를 한다.

정말 문화와 역사와 말(써놓고 보니 세 가지의 정체는 사실 ‘일상생활’ 그 하나이다) 안에 내재하는 성적 불평등을 아이와 함께 뚫고서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을 만한 동화책을 골라보려니, 정말 못 읽을 것투성이였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고전 명작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 지위가 높아봐야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공주, 왕자로 인해서만 수동적으로 행복해지는 여자, 왕자 구해주는 조연으로 만족하기, 마녀로 몰아 왕따 시키기, 효녀의 아버지 뒷바라지,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끝 모를 노동, 식민지 개척자 백인 청년과 토착민 유색인 소녀의 사랑 등등. 동화는 남자의 판타지가 신나게 점령한 식민지인가? 한마디로 모두 아이에게 읽힐 게 못 되었다. 문화가 길이 아니라 꼭 장애물 같았다. 우리가 고전으로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지금은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고전이 되기 위한 좁은 관문을 지키는 평가의 시선 역시 다 남자들의 눈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러리라.

이런저런 곡절 끝에 든 생각은,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현재적인 입법의 문제(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습을 지우는 문제에 그치지도 않는다.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신화’, ‘종교’, ‘고전’, ‘명작’ 등의 긍정적 이름으로 암석의 결처럼 오래 굳어진 문화 그 자체와 싸우는 일이다. 유전되는 나쁜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핏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역사, 말 안에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나?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바보와 천재

‘천재’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먹방’ 천재도 있고, 탄막 게임을 ‘원코인 클리어’하는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듯한 기준도 있을 것이다.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와 같은 것. 그런데 인간이 발휘하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큼 다채로운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라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천재의 창조성, 규칙을 발명해내는 능력을 미학의 영역에서 해명한 이가 바로 18세기의 칸트Immanuel Kant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네 가지 근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규칙을 창조하는 저 능력이 첫 번째 온다.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2 예술은 인간의 생산품이지만, 여느 기성품과 달리 획일적인 규칙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규칙(질서)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천재로서의 예술가에 의해 작품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더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생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범형範型’이 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세 번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작품을 창작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기보다는, 꼭 자연의 일부처럼 창조한다. 마치 과실나무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네 번째 면모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규칙(가령 자연과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작품에 대해선 ‘천재를 사용해’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 개념은 의미 있는 생산물을 모두 주체가 가진 능력의 소산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오기도 했다.

이제 바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보라는 말은 남에게 주저 없이 쓰면 안 되는 말임을 우리는 안다. ‘바보’는 그저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늑대인간

고대 이래 늑대만큼 인간 정신에 깊이 파고들어온 동물도 없다. 늑대인간을 뜻하기도 하고, 자신을 늑대로 여기는 정신장애를 뜻하기도 하는 ‘lycanthropy’(라이칸트로피)는 문자 그대로 늑대를 일컫는 그리스어 ‘lykos’와 인간을 의미하는 ‘anthropos’가 결합한 말이다. 이런 질환이 가능한 배경에는 인간 정신의 회로처럼 자리 잡은 늑대 변신 신화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늑대 변신 신화는 여러 국가와 민족에 퍼져 있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늑대는 신이 되어서도 출현하는데, 늑대가 많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는 늑대 제우스를 숭배하기도 했다.

인간의 정신 깊숙이 늑대 변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면, 현대 정신분석과 철학이 늑대인간을 통해 사상을 전개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우리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도 늑대인간을 발견한다. 늑대는 사회 안에 적합한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자가 출현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추방’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 아니다. 추방된 자는 법과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버려지는 방식으로 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런 법의 작동방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늑대인간에 집중하자. 늑대인간은 합리적인 법적 질서의 바깥 지점에 법의 진실이 있음을 표시한다. 법이란 자신의 명시적인 통치 바깥에서, 즉 법으로부터 추방된 법적 예외의 자리에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늑대인간은 몸소 드러낸다. 프로이트에게 늑대인간은 이성적 세계 이면의 진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늑대 변신 이야기를 둘러싼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보편적 관심이란, 인간이 자신의 합리성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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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없는 사회를 향하여

14세기에 페스트가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 무렵 광기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되었다. 떠돌던 사악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뉴스는 곧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소문을 물고 악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다. 소문은 곧바로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반복된다.

이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희생양이 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첫 번째 특성이다. 희생양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있다. 학교, 회사, 정치 어디든. 조직은 목숨을 빼앗는 고대의 물리적 폭력 이상의 폭력으로 한 사람의 희생양을 겨냥한다. 여러 성추행 사건들에서 쉽게 예를 발견할 수 있듯 피해자에서 희생양으로의 이행은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희생양이 체험하는 당혹감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은 문제 발생을 귀찮아한다는 것, 자신의 문제 제기와 처지가 다수결이나 회의 등 합리적이라고 위장된 절차를 통해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공평한 시선을 지닌 양하지만, 실은 이 시선 자체가 피해자를 뼈아픈 희생양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희생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다. 희생양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가해자들은 신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이 통일되어 있어서 한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비로소 이들을 통일적으로 만들어준다. 그 이득이란 기득권에 대한 보호, 희생양의 것이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등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희생양 만들기는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도 ‘설계자’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희생양의 세 번째 특성이다. 물론 사건의 인과적 흐름 전체를 예견하는 전능한 계산자 같은 것은 없겠지만, 희생양을 계획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설계자가 ‘설령’ 있다고 한들, 희생양 만들기는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할까? 악한 마음을 품고 누군가를 부당하게 박해해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몇 명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한 조직 또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저지른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박해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네 번째 특성이자, 가장 악마적인 특성이다.

이제 희생양 문제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명은 희생양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번제에 바쳐진 희생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신뢰 속에 엮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희생양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분석이 아니라 ‘계몽’이다. 희생양은 더 이상 문명의 일부여서는 안 되고, 계몽의 칼날이 사회로부터 추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생양은 구세주에 관한 고대 신화를 지탱할 만큼 오래된 개념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희생양은 정당화될 수 없고 희생양을 가졌던 문명은 교정되어야만 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희생양 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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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엮은 편집자의 주석은 ‘⚫️’으로,
한국어판 옮긴이의 주석은 ‘*‘으로 표기하였습니다.

간혹 프랑수아즈 사강의 손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해석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베로니크 캉피옹에게 써 보낸 이 편지들은 신기하다. 다른 글들이 특종과 스캔들이 난무하여 불행의 새들이 쪼아대는 먹잇감이라면, 이미 발행 서간집에서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면의 ‘센세이셔널함‘이다. 절대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웃고 지루해하고 유쾌함의 예술을 키우고 어리석은 장난만 생각하는 스무 살 프랑수아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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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관계는 어렵고, 세심함을 요구한다. 남녀관계 역시 당연히 그렇다.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 자기만의 신념 등이 자신과 상대방, 즉 남녀 전체를 위한 절대적 가치라고 착각하는 자이다. 자신은 전체를 대표하고 이끄는 주연이며, 상대방은 이 전체에 기여해야 하는 조연이다. 상대방은 자기를 이해해주어야 하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여해주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로운 일도 결국 전체에게(그러나 사실 그 자신에게만) 좋은 즐거움, 적어도 용인되어도 괜찮은 쾌락이라고 착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별자들이다. 전적으로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고유함 때문에 합쳐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자들로 남아 있는 것이 남녀관계이다.

남녀관계 속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곧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집을 존중하는 길밖에 없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좌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 바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놔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교육이다.

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람들은 동물을 보호한다. 동물이 활용 가치가 높은 자원이라서 그런가? 인간은 살기 위해 환경을 필요로 하고, 동물은 그 환경의 일부이기에 보호하는가? 결국 인간을 위해서? 아니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정말 순수한 도덕적 책임을 지니는가? 인간은 거의 책임을 지지 않고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해왔고, 같은 맥락에서 동물을 지배하고 사용해왔다. 이런 일의 기원에는 적지 않게 유대·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보라. 그 삶의 핵심은 우리가 대체 가능한 살아 있는 장난감과 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영혼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우리에게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만들지만, 동물 그 자신은 신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법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 법 아래 놓이는 동물도 있긴 한데, 그것은 인간적 삶의 은유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물은 신과 인간이 부과하는 초월적 법을 파괴하고 생명 그 자체를 구가할 수 있는 길을 인간에게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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