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와 말이라는 것은 지층이나 암석의 결처럼 단단히 형성되어 있는 것이라,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더라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못생긴 지층의 표면만 슬쩍 가리듯 타협안으로 여기저기 임시 공사를 한다.
정말 문화와 역사와 말(써놓고 보니 세 가지의 정체는 사실 ‘일상생활’ 그 하나이다) 안에 내재하는 성적 불평등을 아이와 함께 뚫고서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읽을 만한 동화책을 골라보려니, 정말 못 읽을 것투성이였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고전 명작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 지위가 높아봐야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공주, 왕자로 인해서만 수동적으로 행복해지는 여자, 왕자 구해주는 조연으로 만족하기, 마녀로 몰아 왕따 시키기, 효녀의 아버지 뒷바라지, 현모양처라는 이름의 끝 모를 노동, 식민지 개척자 백인 청년과 토착민 유색인 소녀의 사랑 등등. 동화는 남자의 판타지가 신나게 점령한 식민지인가? 한마디로 모두 아이에게 읽힐 게 못 되었다. 문화가 길이 아니라 꼭 장애물 같았다. 우리가 고전으로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는 지금은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고전이 되기 위한 좁은 관문을 지키는 평가의 시선 역시 다 남자들의 눈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러리라.
이런저런 곡절 끝에 든 생각은,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현재적인 입법의 문제(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습을 지우는 문제에 그치지도 않는다. 성적 불평등의 해소는 ‘신화’, ‘종교’, ‘고전’, ‘명작’ 등의 긍정적 이름으로 암석의 결처럼 오래 굳어진 문화 그 자체와 싸우는 일이다. 유전되는 나쁜 형질이 있다면 그것은 핏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 역사, 말 안에 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나?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천재’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먹방’ 천재도 있고, 탄막 게임을 ‘원코인 클리어’하는 천재도 있다. 좀 더 과학적인 듯한 기준도 있을 것이다. 아이큐가 얼마 이상이면 천재라고 한다와 같은 것. 그런데 인간이 발휘하는 거의 무한하다고 할 만큼 다채로운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이큐 같은 기준은 임의적일 뿐이라서 별다른 유의미한 척도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천재의 창조성, 규칙을 발명해내는 능력을 미학의 영역에서 해명한 이가 바로 18세기의 칸트Immanuel Kant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천재의 네 가지 근본 면모를 이야기하는데, 규칙을 창조하는 저 능력이 첫 번째 온다. "천재란 어떠한 특정한 규칙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재능’이다. 즉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숙련의 소질이 아니다."2 예술은 인간의 생산품이지만, 여느 기성품과 달리 획일적인 규칙에 따라 생산되지 않는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고유한 규칙(질서)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천재로서의 예술가에 의해 작품마다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아무리 독자적인 생산물이더라도 무의미한 것을 천재의 소산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생산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범형範型’이 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지 좋지 않은 작품인지 판정할 수 있는 표준 역할을 할 수 있는 ‘범형’이다.
세 번째, 천재는 독창적인 규칙의 새로운 작품을 창시하지만 어떻게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작품을 창작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천재는 학자가 아니며, 천재의 산물은 학문에 속하지 않는다. 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생산물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동류의 성과물을 얻도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기보다는, 꼭 자연의 일부처럼 창조한다. 마치 과실나무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경이로운 열매를 생산하듯 말이다.
그러므로 천재의 네 번째 면모를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규칙(가령 자연과학의 법칙)에 따라 생산한다. 그러나 자연은 독특한 산물인 예술작품에 대해선 ‘천재를 사용해’ 규칙을 부여한다.
천재 개념은 의미 있는 생산물을 모두 주체가 가진 능력의 소산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오기도 했다.
이제 바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보라는 말은 남에게 주저 없이 쓰면 안 되는 말임을 우리는 안다. ‘바보’는 그저 욕이다. 그런데 바보는 그렇게 나쁜 것일까? 바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바보는 늘 매력적이었고, 그 때문에 오래전부터 문학의 주인공으로 흔적을 남겼다.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결국 바보가 물정 모르는(즉 순수한) 바보인 까닭은 세상을 지배하는 기존의 가치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이래 늑대만큼 인간 정신에 깊이 파고들어온 동물도 없다. 늑대인간을 뜻하기도 하고, 자신을 늑대로 여기는 정신장애를 뜻하기도 하는 ‘lycanthropy’(라이칸트로피)는 문자 그대로 늑대를 일컫는 그리스어 ‘lykos’와 인간을 의미하는 ‘anthropos’가 결합한 말이다. 이런 질환이 가능한 배경에는 인간 정신의 회로처럼 자리 잡은 늑대 변신 신화가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늑대 변신 신화는 여러 국가와 민족에 퍼져 있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늑대는 신이 되어서도 출현하는데, 늑대가 많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지방에서는 늑대 제우스를 숭배하기도 했다.
인간의 정신 깊숙이 늑대 변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면, 현대 정신분석과 철학이 늑대인간을 통해 사상을 전개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우리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도 늑대인간을 발견한다. 늑대는 사회 안에 적합한 자리를 가질 수 없는 자가 출현하는 경로이기도 하다.
‘추방’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법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일이 아니다. 추방된 자는 법과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버려지는 방식으로 법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이런 법의 작동방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늑대인간에 집중하자. 늑대인간은 합리적인 법적 질서의 바깥 지점에 법의 진실이 있음을 표시한다. 법이란 자신의 명시적인 통치 바깥에서, 즉 법으로부터 추방된 법적 예외의 자리에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늑대인간은 몸소 드러낸다. 프로이트에게 늑대인간은 이성적 세계 이면의 진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늑대 변신 이야기를 둘러싼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보편적 관심이란, 인간이 자신의 합리성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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