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학문•철학/물산장려운동

1920년대 국산품을 사용하여 우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운동으로, 한국의 독특한 경제민족주의에 영향을 준 사건이다.

물산장려운동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받는다. 자본의 속성에 대한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산품애용운동을 활용하여 민족 자본가들이국산품의 가격을 올려 이득을 보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은 모두 실패했다. 보통 일제의 탄압에 의해 실패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모금운동이나 캠페인이 지닌 한계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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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문화/김소월과 조지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중

벌레 먹은 두리 기둥, 빛 낡은 단청,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등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팬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조지훈, <봉황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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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유적•유물/김정희와 세한도

김정희(1786년~1856년)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관료로, 대표적인 엘리트다. 아버지를따라 이른 시절에 북경에 가서 당대 저명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과 교류했고, 국내에서는 실학자 박제가 등에게 배웠다.

그는 순조 시대에 관료를 역임하며 개혁을 시도하지만 실패했고 오랜 기간 유배지에서 세월을 보낸다.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세한도>라는 조선 문인화의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문인이 지녀야 할 학문적 깊이를 강조했고 난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붓글씨의 기초가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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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장소/통일의 집

통일의 집은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문익환(1918년~1994년)이 1970년부터 살던 집을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문익환은 북간도 출신으로 용정에서 어린 시절을 윤동주 등과 함께 보냈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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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인물/남자현

남자현(1872년~1933년)은 ‘여걸 남자현 선생‘이라 불렸던 인물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다. 남자현의 남편 김영주는 1896년, 남자현의 나이 24살 때 홍구동 전투에 참여했다 죽는다. 당시 임신 중이던 남자현은 아들을 낳아 키우는 한편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부상을 받기도 한다. 이후 친정아버지 남정한과 함께 의병 궐기에 참여하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경상도 만세 시위 조직 책임을 맡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남자현은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에 참여, 부상병 간호를 맡는다. 또 길림성에서 20여 개가 넘는 교육 단체를 조직했고, 이관린, 이양숙 등과 함께 조선혁명자후원회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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