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장소/정동

서울시 중구의 덕수궁 뒤편 일대다. 태조 이성계가 아내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이곳에 만들면서 정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정동은 한국 근현대사와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외국 공사관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세워졌고 일본에 대적하며 미국, 러시아 공사들과 관계를 맺었던 관료들을 정동파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수궁 뒤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정동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중명전, 정동극장이 이어져 있고 좀 더 올라가면 러시아공사관 유적, 이화여고 박물관, 프란체스코회관, 경향신문사가 보인다. 덕수궁 앞 편에서 경복궁방향으로 올라가면 서울성공회성당 등을 볼 수 있다. 성공회성당은 외관이 독특하고 아름다운데 6월 항쟁의 서막이 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정동은 다양한 문화예술을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낭만적인 공간이다. 가을 단풍이 특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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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10월, 농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아보지 않겠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다. 나는 한껏 설레는 마음으로 테스트장으로 향했다. 그것도 잠시, 하늘 위로 한껏 치솟았던 설렘은 이내 깊은 실망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키가 작다고 했다. 5cm가 부족하단다. 실력은 얼마든지 길러줄수 있고 점프력도 꽤 좋은데 키가 작다고 했다. 손가락 두 마디를 가리키며 딱 이만큼만 커서 다시 찾아오면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부모님, 친척들, 사촌들의 키를 물었다. 그들 중 내가 제일크다는 말을 듣자 그분은 입으로 ‘안 되겠네‘라는 말을 소리 없이 내뱉었다. 눈물 가득한 나의 두 눈을 본 그분은 아직 희망이 있으니 성장판검사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다. 이틀 뒤 병원에서는 여기서 더 커봤자 1cm 정도일 거라는 판정이 나왔다.

그 이튿날, 꿈을 포기해야 했지만 별 수 없었다. 학교 농구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여전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퉁~’하고 공을 튕기는 순간 지난 2년간 느낀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복이 밀려오는 게 아닌가. 여전히 농구가 너무 좋았다. ‘프로 농구선수‘라는 꿈은 분명 꺾였지만 농구하는 순간은 여전히 너무 행복했다. 이상했다.
‘분명 나는 꿈이 꺾였는데………. 지금까지 나를 달리게 한건 프로농구 선수라는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데서 오는 행복이었어. 이꿈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나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여전히 농구공을 튀길 때 지난 2년 동안 느꼈던 것과 티끌만큼도 다르지 않게 행복한 거지?‘

이런 이상하면서도 신기한 경험은 내게 두 가지 고민거리를 주었다.
첫째는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금 행복한 거지?"
였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그 사실조차 잊은 채 달려올 수있던 것은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오는 행복‘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꿈이 꺾인 뒤에도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도 더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농구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그러자 두번째 의문이 들었다. "지난 2년 동안이나 지금이나, 농구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똑같이 행복한데,
왜 ‘꿈이 꺾인 사람‘이 되어야 하지?‘ 그리고 이 질문은 꼬리를 물어 "내 진정한 꿈이 과연 프로농구 선수였는가?"라는 고민을 불러왔다. 이 의문은 "꿈이란 것은 꼭 직업이어야 하는가?"로 이어지면서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프로 농구 선수‘는 ‘꿈‘이 아니라 단지 ‘희망 직업
‘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꿈의 본질은 단순히 희망 직업명 따위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꿈이라는 것의 정체가 단지 희망직업명이라면, 그 직업을 갖게 되기만 하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든 행복해야 마땅할 것이다. 꿈을 이룬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프로농구 선수라는 직업을 가지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든 정말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또, 꿈이 단지 희망직업이라면 그 직업을 갖지 못한 자들은 전부 ‘꿈에 실패한 사람‘이 되어 불행해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농구하는 모든 순간이 진실로 행복했다. 즉 꿈은 희망 직업명 따위가 아니었다. 꿈은 명사형의 희망 직업이 아니라, 빛나는 지느러미를 달고 힘차게 헤엄치는 동사형의 행위였다.
이렇게 두 가지 의문에 대해 답을 내리고 지난 시간을 되새겨보니, 나의 생각이 여러가지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프로 농구 선수라는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데서 오는 행복‘ 이 장작이 되어 달려올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행복의 근원‘은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구라는 행위 자체‘에 있었다. 나의 꿈은 명사형의 ’프로 농구 선수‘가 아니라 동사형의 ’신나게 농구공을 튕기며 몸을 부대끼는 행위‘였다.

농구를 접으면서 나는 다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돌아왔다. 끝끝내 답을 찾지 못했던 "왜 공부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또 마주보게 된 거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언저리, 새로운 꿈이 예기치 않은순간 불현듯 다가왔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20분쯤 전, 가만히 밖을 보고 있는데 한 문장이 머리에 박혔다.
‘아프리카에서는 3초에 한 명씩 기아와 질병으로 죽고 있습니다.‘
국제구호단체의 이런 외침은 지하철이나 인터넷, 텔레비전 광고에서 수도 없이 들어봐 온 얘기였다.

그들을 살리고 싶었다. 적어도 그들의 세상이 이토록 쉽고 허무하게 막을 내리지 않도록, 그들이 빛나는 지느러미를 힘차게 휘저으며 그들만의 바다를 헤엄칠 수 있도록.
"나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싶어."
새로운 꿈을 찾은 순간이었다.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를 제일 괴롭혔던 건,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바라는 만큼 성적이 안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었다. 후에 알았는데 이걸 ‘자기불구화의 함정‘이라고 한다. 한번 의심이 들자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가 실패하면 완전한 패배자가 될 것 같아 노력을 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의심이 섞이니 공부하는 와중에도 불안했다.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라는 곰팡이가 싹트자 곧 온 마음이 다 불안으로 뒤덮였다.
겉으로는 집중하는 척했지만 "그만큼 공부하고도 이 정도밖에 안돼? 의대는 못 가겠네."라는 평가를 받을까봐 노심초사였다.

공부를 다시 시작한 날 이후, 나는 밤마다 불을 끄고 누워서 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오늘 하루를 100번 다시 산다고 해도 오늘 산 것보다 단 1초라도 더 열심히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도록,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윤동주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도록, 나는 늘 내가 할 수 있는만큼을 다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때의 2년을 돌이켜봐도 여전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시절로 100번, 1000번을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보다 단 1초라도 더 열심히 살 수 없어."

2학년이 돼서 두 번째 모의고사를 보던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문제가 특별히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만 봤을 뿐인데 성적이 잘 나올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 나는 그날의 자신감을 웃도는 점수를 받아들게 되었다. 성적표에 적힌 숫자는 백분위 100,00, 그러니까 ‘전국 1등‘이었다.
나는 밥 먹듯 1등 하고, 수학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전국 1등을 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 워낙 운동에 몰두했던 터라, 공부를 시작하던 때의 성적도 썩 좋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해도 1등은 남의 일이었다.

그 후로 나는 성적에 관심을 뚝 끊었다. 공부를 하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니 등수는 그저 시험 보면 나눠주는 종이 쪽지에 그쳤다. 등수에 연연했다면 오히려 1등을 사수하려고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방전돼서 쓰러졌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공부 자체가 좋아졌다. 1등에서 미끄러져서 갑작스럽게 100등, 1000등, 10000등을 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자 성적표가 두렵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후 내 성적은 줄곧 1등을 기록했다. ‘깜짝 1등, 언제까지 1등하나 보자‘하고 벼르던 사람도 있었고 ‘김규민 이러다 진짜 의대 가는거 아냐?‘ 하고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성적에 관심을 갖지 않으니 그들의 흥미도 곧 사그라들었다.

공부는 내 인생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공부가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해주는 것 같았다.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이 더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었다. 모두가 비웃던 꿈은 점차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꿈이 되어갔다.

2018년 11월 15일.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실전은 연습처럼, 연습은 실전처럼‘이라는 어머니의말씀을 많이 들어와서 그랬는지, 내 실력에 대한 ‘차고 넘치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공부하는 또 다른 시간‘정도로 여겨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시험 당일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수능 당일은 내게 ’평범한‘ 날이었다.

후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우리 지역 전체에 퍼져 내가 졸업한 다음 해에는 우리 고등학교에 지원한 중학생 수가 엄청났다고 한다. 나를 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게되어 진학한 거라면, 그들의 꿈을 한껏 응원해주고 싶다. 내가 그랬듯, 너희들도 할 수 있다고, 안양시의 첫 번째 서울대 의대 합격자수는 나지만, 두번째, 세번째, 네 번째는 너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학생들에게 ‘꿈‘은 어른들이 남발해서 식상해진 단어,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단어인 거 같다. 하긴 내가 학교 다닐 때도 "내 꿈은 농구 선수야."라고 진지하게 얘기하기 조금 부끄러운 분위기이긴했다. 하지만 내가 근질거리는 분위기를 무릅쓰고 꿈 얘기를 꼭 꺼내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꿈이 공부의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을 좋은 방향으로 ‘살짝 미치게‘ 만든다.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게 해주고, 심지어 그 과정까지 즐기게 해주는 것. 그러니 우선 무엇 때문에 공부하는지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 그러니까 꿈의 조각을 찾아 맞춰나가는 소중한 시간을, 지금 당장이라도 가져보기 바란다. 어렴풋한 잔상이라도 좋다. 아직 꿈이 없어도 괜찮다. 무언가가 하고 싶다,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를 떠올려본 것만으로도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니까. 꿈이 확실해지면 확실해질수록 점점 더 공부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거다.

우리의 자아는 남을 의식하는 ‘사회적인 나‘, 그리고 ‘내면의 진실된 나‘로 나뉜다. 나는 후자를 ‘내면 자아‘라 부른다. 꿈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바로 이 내면 자아다. 그만이 진실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평소 내면 자아가내는 소리를 무시하다 보니, 너무 깊이 숨어버려 나 자신도 찾을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거다.

꿈을 찾는다는 것은 무언가 거창해 보이는 말과는 달리 별 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목소리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일 것. 타인이 원하는 것을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인 양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것. 내면 자아에게 진실된 관심과 사랑을 쏟고,
그와 대화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 이것이 핵심이다.
가슴이 시키는 일, 내면에서 행복감이 샘솟는 일을 마침내 찾아내면 그 벅참과 뿌듯함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행복한 꿈의 지점에 가 닿을지 골똘히 고민하게 된다.
당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이 질문에 당연히 들우봤다고 자신 있게 답하면 좋겠다. 꼭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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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인물/이승만

이승만(1875년~1965년)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영어를 배웠고 미국인들의 눈에 띄었다. 20대 초반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주목을 끌었고 순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치열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공화파로 분류되는 강경파였다. 이것이 문제가 돼 교도소에 갇혔고 이때부터 기독교를 진지하게 믿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영한한사건을 편찬하고, 교도소장을 설득하여 도서관을 만들고,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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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적부터 거의 ‘강제로‘ 공부를 해왔다. 뭐, 반쯤은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으니 ‘강제‘보다는 ‘반강제‘가 더 적절할까. 엄마가 시켜서, 성적 잘 받으려고, 선생님이 혼내서, 사회적통념이 강요해서, 좋은 학벌 얻으려고, 돈 많이 벌려고, 주변의 선망 때문에………. 학생들에게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즐거워서‘ 공부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공부란 무엇인지,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 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려주지 않으니 혼자 어떻게든 깨우치느라 숱한 방황을 거쳤다. 그렇지만 시련이란 진리로 향하는 으뜸가는 길이라는 말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끝없이 이어질것만 같던 방황의 발걸음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그 여정을 통해 공부에 눈이 뜨여갔다. 서서히 공부란 무엇인지 그 본질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부터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체 나는 왜 공부하는가? 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공부에 매진하는 것인가? 대체 왜?
나는 원래 이유를 찾지 못하면 신이 나지 않았다. 공부를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당연히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꾸역꾸역 학교생활을 해나가긴 했지만,
가슴속엔 공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 가득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중학교 1학년 여름, 나는 드디어 그 질문에 불완전하게나마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나의 황소고집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납득하고 넘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꾹 닫고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문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고, 마음을 활짝 열고 이해할 준비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될 때까지, 몇 시간, 며칠, 몇 년이고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 답을 찾아내려 했다. 내 사전에는 ‘이해가 안 된 채로 단순히 납득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무튼 공부를 도대체 왜 하는 것인지, 주변 친구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 지금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인지, 그 무엇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 이유를 명확히 깨닫기 전까지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선언을 내렸다.

하루에 1000번씩, 몇 주가 지나자 골밑 슛 정도는 눈 감고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이제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어디 하나 각진 부분 없는 동그란 공이 왜 그렇게 사방팔방 튀던지. 내 팔이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죽어라 드리블 연습을 했다. 그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노력한 끝에 어느새 우리 학교 농구부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농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나는 농구가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즐거움. 세 글자뿐이었다.

나의 꿈은 죽었다 깨도 프로 농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확고한 꿈이 있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쉬지 않고 농구를 했다. 꿈은 나를 달리게 했다. 하루하루 점프가 높아지고 슛이 정확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꿈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즈음 농구에 미친 나를 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편치 않으셨던 듯하다. 내가 농구를 하겠다고 선언한 날 어머니께서는 당황하셨고 아버지께서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황소고집 김규민아니던가.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한 고집하는 나이기에 부모님께서도 반쯤은 포기한듯 보였다.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농구를 하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힘든 걸 대체 왜 하는 거야? 나같으면 안 해."
그러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행복하니까 하지."
‘힘들다‘라는 단어와 ‘행복하다‘라는 단어는 같이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 그렇지 않다. ‘힘들다‘와 ‘행복하다‘는 분명 함께할 수 있고 그 둘이 나란히 있는 그 순간, 힘들어도 그 사실조차 잊고 흠뻑 빠져들 수 있다. 그 행복감 자체가 꿈을 향한 장작이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 다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적어도 내가 물어본 친구들은 ‘공부는 이유는 몰라도 그냥 해야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안타까웠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꿈을 꾸며 힘차게 헤엄치고 있는 줄 알았던 이들이 빼끔거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머릿속에 정돈된 생각이지만, 어떤 길을 걸어가고 어떤 공부의 세계를 모험하든, ‘가장 첫 단계는 각자의 꿈을꿔야 하는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자가당착이라 하던가. 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생각이 가진 치명적인 허점으로 인해 좌절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프로농구 선수가 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진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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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사건/해방

1945년 8월15일 식민지조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됐다. 당시에는 해방이나 광복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해양 초기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우리만의 힘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것이문제였다. 1941년부터 미국과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건 이후 승기를 잡은 미국은 태양과 동남아시아에서 연거푸 승리하여 오키나와성 일대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일본의 저항에서 소련의 참전용정식 요구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은 8월 초 만주와북부의 일본군을 물리치면서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결국 38도선을 기준으로주와 한반도 북부는 소련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그 밖의 일본 지배 지역은 미국이 관할한다는 합의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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