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 적부터 거의 ‘강제로‘ 공부를 해왔다. 뭐, 반쯤은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으니 ‘강제‘보다는 ‘반강제‘가 더 적절할까. 엄마가 시켜서, 성적 잘 받으려고, 선생님이 혼내서, 사회적통념이 강요해서, 좋은 학벌 얻으려고, 돈 많이 벌려고, 주변의 선망 때문에………. 학생들에게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은 다양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즐거워서‘ 공부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무도 공부란 무엇인지,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 건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려주지 않으니 혼자 어떻게든 깨우치느라 숱한 방황을 거쳤다. 그렇지만 시련이란 진리로 향하는 으뜸가는 길이라는 말처럼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끝없이 이어질것만 같던 방황의 발걸음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그 여정을 통해 공부에 눈이 뜨여갔다. 서서히 공부란 무엇인지 그 본질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날부터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체 나는 왜 공부하는가? 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학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공부에 매진하는 것인가? 대체 왜? 나는 원래 이유를 찾지 못하면 신이 나지 않았다. 공부를 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 당연히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꾸역꾸역 학교생활을 해나가긴 했지만, 가슴속엔 공부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 가득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난 중학교 1학년 여름, 나는 드디어 그 질문에 불완전하게나마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나의 황소고집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납득하고 넘어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꾹 닫고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문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고, 마음을 활짝 열고 이해할 준비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해가 될 때까지, 몇 시간, 며칠, 몇 년이고 끈질기게 질문을 던져 답을 찾아내려 했다. 내 사전에는 ‘이해가 안 된 채로 단순히 납득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무튼 공부를 도대체 왜 하는 것인지, 주변 친구들은 대체 어떤 이유로 지금 교실에 앉아 있는 것인지, 그 무엇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 이유를 명확히 깨닫기 전까지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선언을 내렸다.
하루에 1000번씩, 몇 주가 지나자 골밑 슛 정도는 눈 감고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이제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어디 하나 각진 부분 없는 동그란 공이 왜 그렇게 사방팔방 튀던지. 내 팔이 내 것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죽어라 드리블 연습을 했다. 그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노력한 끝에 어느새 우리 학교 농구부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농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나는 농구가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즐거움. 세 글자뿐이었다.
나의 꿈은 죽었다 깨도 프로 농구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확고한 꿈이 있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쉬지 않고 농구를 했다. 꿈은 나를 달리게 했다. 하루하루 점프가 높아지고 슛이 정확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꿈에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즈음 농구에 미친 나를 보는 부모님의 심정은 편치 않으셨던 듯하다. 내가 농구를 하겠다고 선언한 날 어머니께서는 당황하셨고 아버지께서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황소고집 김규민아니던가.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한 고집하는 나이기에 부모님께서도 반쯤은 포기한듯 보였다.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농구를 하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 힘든 걸 대체 왜 하는 거야? 나같으면 안 해." 그러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행복하니까 하지." ‘힘들다‘라는 단어와 ‘행복하다‘라는 단어는 같이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절대 그렇지 않다. ‘힘들다‘와 ‘행복하다‘는 분명 함께할 수 있고 그 둘이 나란히 있는 그 순간, 힘들어도 그 사실조차 잊고 흠뻑 빠져들 수 있다. 그 행복감 자체가 꿈을 향한 장작이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전부 다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적어도 내가 물어본 친구들은 ‘공부는 이유는 몰라도 그냥 해야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안타까웠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꿈을 꾸며 힘차게 헤엄치고 있는 줄 알았던 이들이 빼끔거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머릿속에 정돈된 생각이지만, 어떤 길을 걸어가고 어떤 공부의 세계를 모험하든, ‘가장 첫 단계는 각자의 꿈을꿔야 하는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자가당착이라 하던가. 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생각이 가진 치명적인 허점으로 인해 좌절하는 순간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프로농구 선수가 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진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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